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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하반기 신작 프로젝트 [4] - 원작능가

한국 소설과 만화의 판권이 팔렸다는 뉴스는 더이상 신기하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바보> <오래된 정원> 등이 이미 서점에서 영감을 찾아냈고, 인터넷 소설도 몇년 전부터 연이어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황진이>와 <순정만화>도 미묘한 창작의 과정인 각색을 시도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잊혀진 우리말과 시와 노래를 싣고 있는 <황진이>와 네명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순정만화>는 유독 각색이 어려운 작품들이겠지만, 그만큼 원작이 다른 매체로 변화했을 때의 모습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특별하지 않은 이들의 특별한 사랑, <순정만화>

시놉시스/ 서른살 회사원 김연수는 출근길 아침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사나운 여고생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 여고생 한수영 역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 숙맥 아저씨가 마음에 든다. 어느 날 교복 넥타이를 잊고 집에서 나온 수영은 연수에게 넥타이를 빌려 매고 학교에 간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친해진다. 연수와 수영의 이야기가 있는 반면, 권하경과 강숙의 이야기가 있다. 강숙(이름은 여자 같지만 남자다)은 그보다 한참 더 나이 많은 하경을 좋아한다. 하지만 사랑의 상처가 있는 하경은 강숙의 애정고백에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수영이 연수를 위해, 강숙이 하경을 위해 사게 되는 같은 목도리, 그 목도리를 파는 규철을 축으로 이들의 인연은 더 얽혀들어간다.

“원작이 워낙 좋으니까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어렵다.” <순정만화> 류장하 감독의 첫마디다. 차라리 “<꽃피는 봄이 오면>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출발해서 더 쉬웠다”는 게 전작과의 비교분석 결과다. 수천만부를 기록했다는 인기 인터넷 만화를 영화로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원작 만화를 영화로 옮기는 데 있어서 핵심은 원작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어떻게 그걸 영화적으로 바꿔 표현할 것인가다. “분량과 등장인물이 많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만화적 상상력을 영화적 리얼리티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 만화에서는 워낙 많은 독백이 등장하는데다, 특정한 한 장면에 기대어 감정이 증폭되는 때가 있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전개상 꼭 필요한 건 생략되어 있으면서도 내레이션 등으로 충분한 감정을 보여주는 장점들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분명한 감정선을 넣어줘야 한다. 만화에서는 문제가 발생하고도 갈등없이 해결되며 그게 이해가 되고, 감정이 생긴다. 그런데 그걸 영화로 그대로 옮기면 감정이 안 생긴다.” 그게 바로 이제 영화 <순정만화>가 풀어야 할 숙제다.

그래서 지금은 내용은 고수하되 형식은 얽매이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만화적 극작법에 대해서는 아예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거의 완성한 시나리오에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도 없으며, 만화의 평행적인 인물구도와 다르게 “김연우를 주인공으로 놓고” 풀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한편으론, “아파트라는 삭막한 공간을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따뜻한 공간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도 관건이다.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 돌아다녀본 결과 너무 삭막한 풍경만 있다는 것. 그래서 류장하 감독은 개인적으로는 잘 선호하지 않는 세트 촬영도 고려 중이다.

요즘 강풀의 원작으로 만들어지는 영화가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정석으로 답변한다. “당연히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원작 그대로인 영화는 없지 않나. 감독 색깔에 따라 영화가 바뀌는 것 아니겠나?” 처음 만화를 보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는 류장하 감독.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이 만나서 조금씩 이해하고 같아지는 이야기”가 될 거라는 그의 연출의도가 영화 <순정만화>를 색다르게 만들어줄 열쇠가 될 것 같다.

류장하 감독이 꼽은 최고의 에피소드, 12화 <생각>

원작 <순정만화>는 에피소드별로 여러 편이 이어져 있는 작품이다. 독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느냐고 류장하 감독에게 물었다. 꼭 하나만 꼽으라면, 12화 <생각>이라고 답한다. “대사 한마디없이 진행되는데, <순정만화>가 갖고 있는 만화적인 장점을 최대한 보여준다. 그런 건 그대로 옮겨 찍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푸른색의 같은 목도리를 매고 각자 집에 들어오는 연수와 수영의 밤에서 아침 사이의 일과가 좌우 양편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씻고, 집안 소일을 하고, 다시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동시에 서로를 생각하며 볼이 빨개지고, 다음날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기까지 두 사람의 하룻밤 일상이다. 결국 둘은 만나는 순간 읊조린다. “이 학생은 알까”, “이 아저씨는 알까”,“내가 얼마나 자꾸자꾸 자기 생각이 나는지…”라고.

자유를 알고, 시대를 비웃었던 여걸, <황진이>

시놉시스/ 송도 황진사집 고명딸 황진이는 미모와 재주로 이름이 높은 규수다. 아버지가 계집종을 범해 낳은 자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파혼을 당한 진이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연모해온 집안 하인 놈이와 초야를 치르고 기생이 된다. 그러나 놈이는 진이의 출생을 폭로하여 그녀를 기생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진이 곁을 떠나고 만다. 몇년이 지나고 진이는 송도 유수 김희열도 손에 넣지 못해 애태우는 송도 최고의 기생이 되어 있다. 문장과 음률에 뛰어난 예인이면서, 양반의 위선과 패악을 참지 못하는 자유로운 영혼. 그러면서도 고독을 느끼던 진이는 화담 서경덕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 놈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또 다른 성장을 향해 나아간다.

북한에서 출판된 <황진이>의 삽화

북한 소설로는 처음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홍석중의 <황진이>는 여인이 주인공인데도 남성적이고 호방한 기운이 넘치는 소설이다. 인물과 사건을 따라 거침없이 뻗어가는 이 소설은 황진이를 자유로운 여인일 뿐만 아니라 시대를 비웃으며 정체성을 깨우치는 사회적인 존재로 묘사했다. 장윤현 감독은 <황진이>가 이러한 이념을 바탕에 두고도 생기있는 정서와 친숙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이끌렸다. “황진이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깨닫고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과정은 사랑과 연결된다. 그녀가 안고 있는 정체성의 고민이 양반 김희열과 상민 놈이와 맺는 삼각관계로 치환되는 것이다. 그 사랑만을 보여주더라도 관객은 사회적 고민을 눈치챌 수 있는 구조다.” 본래 황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장윤현 감독은 씨네2000 이춘연 대표에게 받아 이 소설을 읽고 자기 삶을 돌파하는 현대적인 여인상을 발견했다. 그러나 강물처럼 넓고 깊게 시대를 아우르는 원작은 영화 <황진이>에 여러 가지 난제도 던져주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문장을 시나리오로 옮기거나 황진이의 감정과 사상이 실린 시(詩)를 영상으로 되살리는 일이 그중 하나다. 장윤현 감독은 “<접속>을 찍으면서 모니터에 찍히는 글자를 어떻게 화면으로 옮길까 고민했다. 이번에도 시와 노래를 옮기는 데 성공한다면 신선한 영화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와 계급의 모순, 넘치는 감정, 복잡다단한 사건이 응축되어 있는 인물의 각색도 성패를 가르는 요소가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장윤현 감독은 분방하고 사내다웠으나 치졸한 인물이 되고 마는 김희열을 난중난제로 꼽았다. “김희열은 그 시대가 원하는 유능한 양반이었다. 나름대로 진보적이고 개혁의지도 있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계급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황진이와 놈이를 질투하고 자격지심을 갖게 된다.”

여인과 사랑의 이야기이면서 사회적인 담론으로 확장되는 <황진이>는 외형에서도 기존 사극과 다른 길을 가려 하는 영화다. 장윤현 감독은 <접속> <텔미썸딩> <>에서 차갑고 도시적인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극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난다면 <황진이> 또한 도시의 이야기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옛 왕조의 수도였던 송도는 세련된 도시였고, 기생은 그 첨단에 있는 집단이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가옥의 구조를 재현할 <황진이>는 고증에 충실하되 비어 있는 부분은 그런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메우는 화려한 사극이 될 것이다.

소설 <황진이> 속 명장면들

소설 <황진이>는 황진이와 관련된 야사를 홍석중 작가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들려준다. 벽계수와 지족선사와의 일화가 권력을 가진 자를 조롱하고 그 위선을 폭로하는 사건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는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의 만남이다. 장윤현 감독은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묘사된 그 만남에서 더이상 양반이 아니면서도 양반 세계 주변을 맴돌던 황진이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서화담은 황진이에게 지위가 바뀌었어도 너 자신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가르침을 주는 인물이다. 그를 만난 이후 허공을 떠돌던 황진이의 의식은 땅으로 내려와 단단하게 밀착된다.” 원작에서 불끈 솟아 있는 서경덕의 그곳을 묘사한 문장 또한 백미. 황진이는 그를 만난 다음날 스스로 박연폭포와 서경덕, 황진이가 송도삼절이라 김희열에게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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