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방문. 2005년 10월12일 오전 서강대교 아래 여의도 둔치

: 봉테일의 진실

순복음교회 건너편 고수부지에는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가을 하늘이 청명하고 공기가 선선하다 해도 이토록 많은 인파가 평일 오전 10시를 만끽할 수는 없는 법. 여기는 <괴물>의 58회차 촬영현장이다. 한강 한가운데로 밤섬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이 공간은 <괴물>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박희봉과 박강두이 운영하는 매점이 자리한 곳이자, 괴물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날 해가 떠 있는 동안 촬영해야 할 분량은 꽤 많았다. 괴물이 나타나기 직전, 그리고 괴물이 나타난 직후의 상황을 찍은 뒤에 한강 둔치의 매점을 폐쇄하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 탓에 스탭들은 오전부터 부산해 보였다. 첫 방문 이후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많이 찍어야 했다는 송강호는 전날 하루 종일 강물 안에 들락날락했다며 약간 피곤한 표정이었다. 역시 전날 바지선의 크레인에 매달려 한강 속으로 빠져야 했던 고아성 또한 거듭되는 촬영이 힘에 부치는 듯했다. 옆에 있던 봉 감독은 “아이를 더러운 한강물에 넣었다 뺐다 하다니… 미국 같았으면 아동학대죄로 쇠고랑찼을 거예요”라며 자진해서 스스로를 ‘비난’했다. 감독이 뭐라거나 아성이는 다음날부터 중간고사가 시작된다며 중학교 사회 교과서를 까만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다.

이날의 첫 번째 컷은 현서가 발로 찬 맥주캔에서 맥주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이다.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장면 같지만 “아성이가 찬 맥주캔에서 분수처럼 맥주가 새나오고, 그게 햇빛에 반사돼 무지개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게 감독의 주문이란다. 촬영장 한쪽에서는 맥주캔을 무자비하게 흔들어 구멍을 내는 작업이 한창이다. 정영민 조명감독은 이처럼 <괴물>에는 CG, 애니매트로닉스 같은 최첨단 특수효과뿐 아니라 스탭들 손으로 어렵지 않게 만들어내는 효과가 여럿 등장하는데, 스탭들은 이런 경우를 ‘특수효과’가 아니라 ‘일반효과’라고 부른다고 한다. ‘일반효과’에 능숙한 스탭들의 노하우 덕분인지 이 컷은 다섯 차례 만에 감독의 오케이 사인을 끌어냈다. 곧이어 현서가 매점 밖으로 나와 발 아래에 있는 맥주캔을 발로 뻥 차는 모습을 찍은 뒤 괴물에 쫓기는 박강두가 현서의 손을 나꿔채 함께 달려가는 이동숏이 시작된다. 난항이 예상됐지만, 의외로 단 두 테이크 만에 오케이가 난다.

분위기가 좋았던 오전과 달리 오후 촬영은 쉽지 않았다. 송강호가 괴물을 발견하는 장면을 14테이크 만에 끝낼 때부터 조짐은 안 좋았다. 이어진 것은 매점 안에서 강두와 희봉, 현서가 TV를 통해 남주의 양궁경기를 보며 대화하는 장면. 3번째 테이크에 접어들자 봉 감독이 모니터 앞에서 매점쪽으로 걸어가면서 똑 부러지는 말투로 이야기를 꺼낸다. “딱 3가지만 지적하겠어요.” 고아성에게는 좀더 템포를 빨리 해달라는 것, 변희봉에게는 강두를 부를 때 시선을 송강호에게 맞춰주라는 점, 송강호에게는 얼굴이 고아성 얼굴에 가려지니 좀 빼달라는 사항을 지시한다.” 송강호의 절묘한 애드리브에도 불구하고 봉 감독은 여전히 컷을 부른다. “아성아 황도 먹을 때 꿀꺽 하는 느낌으로…”, “얼굴이 여전히 가려지는데” 등등 집요하게 지시를 내린다. 그러다가도 그는 “이번 것은 일단 킵해놓고, 이제 대망의 마무리 테이크를 하자고요”라며 배우들을 살살 달래기도 한다. 물론, “황도캔은 아직도 스물두개나 남았다고요”라는 등의 ‘압박’을 까먹을 그가 아니다. 11번째 테이크에서 그가 오케이를 외치자, 맥주를 연신 들이켜 얼굴이 벌게진 송강호가 입을 연다. “아니, 딱 3가지 정도를 지적하셔야 할 텐데….”

봉 감독의 ‘딱 3가지 지적’은 이날만 유별났던 게 아니다. 첫 방문 당시 매점 안에서 가족들이 사발면 먹는 장면을 찍을 때도 “기본적으로 3가지만 말할게요. 첫째, 테이블이 너무 반듯해. 좀 삐딱하게. 둘째,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붓는다는 게 너무 티가 나니까 신경 좀 써주세요. 셋째, 변 선생님 사발면 위치를 좀 바꿔주세요”라며 조목조목 원하는 바를 설명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왜 생겼는지 알게 된다. 그는 앵글의 구석구석까지 신경을 썼고, 배우들의 미묘한 연기 차이를 짚어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배우와 스탭에게 정확하게 전달했다. 가족장면에서 그는 “남일은 피곤하게 오두방정을 떨어야 해”, “남주는 머리를 밥상에 처박고 컵라면을 밀어”, “변 선생님, 물 따를 때 양조절 잘하셔서 본인 라면에 따를 때 마지막 한 방울까지 뚝뚝 나왔으면 좋겠어요”, “만두는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난 상태로 해서 김이 나게 해주세요” 등의 주문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리고 모니터를 향해 걸어가면서 “삼남매 각자 1인당 2개 이상씩 연기 디테일 준비해주세요”라는 궁극의 주문도 잊지 않았다.

두 번째 방문의 마지막 컷에서도 ‘봉테일’은 무뎌지지 않았다. 괴물이 출현한 한강의 매점이 폐쇄되는 이 장면은 기본 설정부터 꽤나 까다로웠다. 크레인에 얹은 카메라가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한강을 수색하는 보트의 모습- 둔치를 수색하는 군인과 경찰의 모습-그 앞쪽으로 진을 친 전경부대와 시민의 시시비비-그리고 바리케이드 밖으로 걸어나오는 박강두 부자의 모습이 차례로 한 테이크 안에 잡혀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촬영 시간조차 해가 막 질랑말랑하는 ‘매직 타임’으로 못박아놓은 탓에 여유도 없다. 오후 5시30분쯤 현장 주변에서 준비를 하던 장갑차, 군용 트럭, 경찰차 등이 일제히 자리를 잡고, 100여명의 보조연기자들도 감독과 연출부의 지시에 따라 리허설을 하기 시작하자 촬영장에 긴장이 감돈다. 연출부로부터 오후 6시30분이 데드라인이라는 말을 들은 봉 감독은 현장 이곳저곳을 휘저으면서 동선을 잡아준다. 여러 팀이 시간차로 움직여야 하는 탓에 리허설이 꽤 오래 걸려 6시10분에야 첫 테이크에 돌입한다. 두 번째 테이크까지 NG가 나자 봉 감독은 또다시 “딱 3가지만!”을 외친다. 곧바로 한 테이크를 건지고 나니까 이젠 조명없이 촬영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초조한 표정으로 촬영된 분량을 모니터로 확인하던 봉 감독이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제야 한강도 참고 있던 숨을 내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