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독립영화를 사랑한 배우들 [2] - 고서희

권귀옥 순경, 이런 면이 있는줄 몰랐네

<살인의 추억> <그녀의 핵주먹>의 고서희

<살인의 추억> 이후 3년이 흘렀건만, 고서희는 아직도 권귀옥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선배 형사들의 잔심부름에 열중하던 중, 얼굴없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던 그 모습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탓이다. 평상심을 잃지 않는 뚱한 모습은 초췌한 남자 형사들과 묘한 대조를 이뤘더랬다. <호랑이 푸로젝트>에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엉뚱한 ‘백조’로 고서희를 캐스팅한 이지행 감독 역시 그 묘한 이미지에 끌렸다. “약간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봉준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에서 갱생한 배두나 이미지로 쓴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고, <호랑이 푸로젝트>에서 고서희에게 노란 후드티를 입히기도 했다.”

때론 나른하고 때론 똘망똘망한 동그란 고서희의 눈망울은 영락없는 엉뚱녀의 그것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박하사탕>의 고서희가 생생하다. 연극원 재학 당시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된 <박하사탕>은 장·단편을 통틀어 그의 첫 영화다. 첫사랑을 못 잊는 남자에게 하룻밤을 베푸는 술집 여자, 남자들의 판타지를 에누리없이 채워주는 신비한 캐릭터라니, 데뷔전치고는 혹독했던 편이다. 당시 이창동 감독은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감성” 때문에 그를 캐스팅했다고 말했지만, 유난히 길었던 그의 긴 생머리와 가슴 아플 정도로 가냘팠던 몸매가 먼저 눈에 띄었다. “<살인의 추억>을 찍을 때를 제외하면 고등학교 내내 유지했던 귀밑 3cm 머리가 너무 싫어서 계속 고수”한 그의 긴 머리는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 지나간 연애를 떠올리는 연인(<후…>), 연애의 단꿈에 젖어 있는 순진한 여자(<숙자야>) 등 ‘극도의 여성성(?)’을 발휘하는 캐릭터도 제격이다.

그가 꽉 찬 혼기와 술버릇 고약한 남자친구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강력한 핵주먹을 날리는 여자로 출연한 <그녀의 핵주먹>은 엉뚱함과 청순함이 함께 묻어나는, 우스갯소리로 ‘청승’을 발휘하는 인간 고서희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끌어온 영화다. 선지연 감독은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야리야리한 체격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강단있어 보이는 배우”로 고서희를 점찍었다고 말한다. 소녀가 아줌마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이성(異性)과의 전면전을 담백하고 위트있게 묘사한 <그녀의 핵주먹>은 유쾌한 정서와 달리 고서희에게는 가장 힘든 영화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성격대로라면 술 취한 남자의 전화를 받다가 전화기를 집어던지고 세게 나가야 한다”는 배우와 “평소에는 우유부단하고 얌전한데 결정적인 순간에 돌변하는 여자의 속성을 담아야 한다”는 감독이 맞선 까닭이다. 어떤 감독을 만나도 털털한 친구처럼 모든 것을 맞춰줄 것 같고, “불과 촬영을 이틀 남기고 배우가 펑크내면 급한 마음에 캐스팅할 정도”로 편안하다지만, 알고보면 그 역시 깐깐한 배우라는 얘기다.

아니나 다를까. 고서희는 자신을 선택하는 단편 감독들에게 “납득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기에 촬영하면서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말을 던지곤 한다. 대화와 설득은 그에게 중요하다. 단편 출연작 중 눈에 띄는 작품이 모두 여자 감독의 연출작인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이에 대해 본인은 “남자가 쓰는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남자인 경우도 많고, 여자 캐릭터도 한정돼 있기 때문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고서희에게서 “마냥 당하고도 ‘이게 뭐람?’ 하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것 같은 페이소스”가 느껴진다는 이지행 감독은, “마냥 밝고 희망적이지만은 않은 회의적인 캐릭터로, 함께 고민하고 대화하면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아우라”가 강점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그가 활동적인 이미지를 지녔다 하고, 누군가는 내성적이라 말한다. 소수이긴 하지만 관능적으로 봐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본인의 설명. 고서희는 “종합하면 딱히 어울리는 것도, 그렇다고 절대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는 얘기”라며 웃는다. 과연 그럴까. 푼수기도 있고 자기 욕심도 차리는 <범죄의 재구성>의 구로동 샤론 스톤 정도는, 압구정 샤론 스톤이 아닌 바에야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릿느릿 말하는 그는, 무시할 수 없는 별난 리듬을 지녔다. 보이는 모습, 들리는 말은 그의 전부가 아닐 것 같은 예감. 밤마다 미래를 불안해하고 뒤늦게 혼자 분해하기도 하는 평범한 배우라는 그에게선 느긋한 예민함이 느껴진다. 예전에는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단편 출연을 결정했지만 이젠 그러지 않겠다는, 단편영화는 밥값 정도에서 출연료를 정리했지만 이젠 단편으로 생계유지를 해봐야겠다는 모진 다짐을 말하지만 눈꼬리는 여전히 웃고 있다. 농담 같은 진담, 진심 같은 농담에 애증까지, 능란하게 섞여든다. 스크린 안팎에서,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핵주먹’은 그렇게 남다르다.

필모그래피

장편- <박하사탕> <오아시스> <살인의 추억> <안녕! 유에프오> <아홉살 인생> <잔혹한 출근> 등

단편- <내복> <후…> <숙자야> <호랑이 푸로젝트> <그녀의 핵주먹> 등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