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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연애와 성폭력 사이
정희진(대학 강사) 2006-08-18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발표한 상대성이론, 광전효과, 브라운운동의 핵심 아이디어는, 첫 번째 부인 밀레바 마리치의 것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에게 갖은 학대를 일삼다 유부녀인 사촌누이 엘자와 재혼했는데, 그녀의 딸, 그러니까 자신의 의붓딸에게도 청혼했다. 영민한 과학사학자 홍성욱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했지만, 내겐 익숙하게 들어왔던 너무 ‘이해 가능한’ 일이다.

최근 사회적 ‘유명 인사’가 다수 여성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질러서, 시민운동가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000(가해자 이름)의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 침해 사건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내게도 연일 관련 소식이 배달되고 있는데, 나는 이 메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사회적 매장’은 가혹한 처사일 뿐 아니라, 여성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가해자를 ‘일반’ 남성과 구별하고 낙인찍는 것은, 성폭력을 남성의 일상적 문화의 구조적 결과가 아니라 특수한 개인의 문제로 사소화, 사사화(私事化)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은 나의 의견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가해자가 매장될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말라고, 고통받고 매장되는 것은 피해 여성이지 남성은 언제든 다시 거리를 활보할 것이라고 분개했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 가해자는 괴롭지 않다. 작가 안드레아 드워킨과 아드리엔느 리치는 여성들이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폭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성폭력처럼 이 사건도 성폭력과 연애의 애매한 경계에서 발생했다. 성폭력인지 사랑인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은 안 되고 사랑은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잘 구분되지 않는 것 자체가 더욱 심각한 정치적 문제다. 이 남성의 행동은 성폭력의 현행법 개념, 즉 물리적 강제에 의한 폭력도 있지만, 연애에 취약한 ‘여성적’ 심리를 이용한, 여성의 감정 노동에 대한 착취가 주를 이루었다. 이런 사례도 있다. 한 남성이 동시에 여러 여성과 사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여성들끼리 친한 친구 사이여서 여성들의 관계, 커뮤니티가 파괴된 것이다. 지인의 소개로 상담하게 된 가정폭력 가해 남편은 처제, 아내 친구, 조카, 자기 딸, 동네 어린이 등 7명을 성폭행했다.

나는 아인슈타인부터 마지막 사례까지 모두 동일한 정치적 맥락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성폭력인지 연애인지, 동의였는지 강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남성들은 여성을 시민이 아니라 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상대 여성이 사회적으로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그녀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여자는 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성이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라 ‘몸’일 때, 모든 여성은 개인의 정체성, 능력, 지위에 상관없이 남성의 성 행동 대상으로서 개별성이 없는 똑같은 존재가 된다. 언제든지 몸을 기준으로 대체 가능한 물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은 ‘노동자와 자본가’로 나뉘지만, 여성은 ‘어머니와 창녀’로 구분된다.

성, 특히 남성의 성은 본능이라는 오해가 만연해 있지만, 성은 결국 어떻게 실천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철저히 사회적인 것이다. 통찰력 넘치는 여성학자 김은실과 바바라 에렌라이히는, 성 해방은 그동안 성적으로 억압받아온 동성애자와 여성에게 의미있고 필요한 정치학이지, 남성 이성애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지적한다. 수천년 동안 이성애자 남성의 성은 지나치게 해방되어왔다. 무슨 해방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이성애자 남성이 성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마치 자본가와 백인이 “우리는 자유가 부족해, 착취할 자유를 더 주면 안 될까”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더구나 성의 자유는 아무하고나 섹스할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누구나 성별, 계급, 나이, 결혼 여부 등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문제는 여성의 ‘멀티’(‘양다리’ 혹은 그 이상)는 남성 연대를 위협하지 않는데, 남성의 멀티는 여성을 분열시키고 여성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남성은 멀티할 때, 다른 남자의 눈치를 볼 뿐 상대 여성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는 개의치 않는다. 여성의 감정과 고통쯤은 무시해도 되기 때문이다(이것이 성폭력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성 성욕이 남성을 분열시키지만 그것을 남성이 얼마나 ‘슬기롭게’ 극복하여 남성 연대를 지켜내는지에 대한 서사이다. 거세 공포로 인해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양보하면 아버지 사회의 보상이 따르므로, 남성에겐 언제나 여성과의 사랑보다 남자와의 ‘의리’가 중요하다. <언니네 방>의 편저자 권김현영에 따르면, 루이 말 감독의 <데미지>가 남성들에게 그토록 ‘데미지’였던 것은, 여성이 남성의 관계, 그것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파괴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