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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햄릿>, <야연>
김수경 2006-09-19

펑샤오강의 날카로운 이야기와 원화평의 우아한 액션이 조우하는 중국판 햄릿

<야연>은 복수극으로 포장한 사랑 이야기다. 중원의 5대10국시대를 배경으로 <햄릿>을 재해석한 <야연>은 황제 리(갈우), 황후 완(장쯔이), 황태자 우(대니얼 우)의 삼각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아버지를 독살하고 어머니와 재혼한 숙부를 용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어머니가 원래 나의 연인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야연>은 황후 완이 황태자 우의 연인이었다는 설정으로 <햄릿>의 변주를 시작한다. 거트루드와 오필리아가 겹쳐지는 순간, <야연>은 주인공 우의 고뇌를 통해 한 인간의 솔직한 욕망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다시 말해 복수의 목적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완을 되찾기 위해, 황제가 되기 위해, 숙부의 부도덕함을 벌하기 위해서인가. <야연>은 대답을 관객에게 되돌리는 영리한 상업영화다.

시를 짓고 노래하며 살아가던 황태자 우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려는 숙부 리는 우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황후 완에게 결혼을 요구한다. 하지만 완은 사실 우의 연인이었다. 리는 우에게 자객을 보내지만 죽을 고비를 넘긴 우는 황궁으로 귀환한다. 약혼자 칭(저우신)은 눈물로 호소하지만 우는 리에 대한 분노와 완을 향한 욕망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리는 우를 거란족에 볼모로 보내지만 완은 중간에서 우를 빼돌린다.

<야연>은 대규모 관현악보다는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실내악 같다. <야연>은 궁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강력한 캐릭터의 구축을 통해 <연인>이나 <무극>이 범했던 스펙터클의 강박에서 벗어난다. <야연>은 ‘블랙코미디의 달인’으로 불리는 펑샤오강 감독이 처음 만든 비극이다. 일상의 소소함이나 유머 같은 그의 주특기를 발휘할 수 없는 무대임에도 펑샤오강은 드라마의 세부를 강화하는 정공법으로 힘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처음 리가 완에게 자신과의 결혼을 제안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거대한 황후의 방을 풀숏으로 보여주다가 시퀀스의 마지막에는 문틈 사이로 내민 리의 손을 클로즈업한다. 그리고 완의 손이 그것을 맞잡는 클로즈업이 이어진다. 이처럼 펑샤오강은 클로즈업과 인서트를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인물들의 감정선을 오롯이 이어간다. 그는 스펙터클을 위해 드라마나 감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리가 완을 마사지하는 대목이나 암살에 실패한 근위대를 다리 위에서 벌하는 장면의 컷 분할은 군더더기 없는 펑샤오강의 화면구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규모의 스펙터클에 집착하지 않아도 <야연>의 볼거리는 충분하다. 원화평이 만든 <야연>의 액션 시퀀스는 발레처럼 우아하고 아름답다. 완과 우가 벌이는 한밤의 검무는 피겨스케이팅을 연상시키는 날렵함을 보여준다. 반대로 우를 살해하려는 근위 무사들의 액션장면은 박진감이 넘친다. 투구가 쪼개지고 갑옷이 뭉개지며 피를 내뿜는 격투 중에 사람 사이를 물 흐르듯 피해다니는 인물들의 부드러운 몸놀림은 기묘한 대구를 이룬다. <야연>의 액션은 격투와 가무 사이를 오간다. 영화 초반 주인공 우가 <처녀사공의 노래>를 부르는 연극장면이나 칭이 황궁에서 벌이는 마지막 군무는 잘 만든 뮤지컬영화 한 대목처럼 극적 요소와 음악이 조화롭게 공존한다. <와호장룡>으로 아카데미 미술상을 수상한 팀 입의 세트와 의상도 매혹적이다. 우가 기거하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야외 극장과 황궁의 실내 세트는 어떤 무협대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근위 무사와 우를 보필하는 가신들에게 가면을 씌운 의상 컨셉이나 선왕의 투구와 갑옷으로 억울한 죽음을 묘사하는 판타지는 세익스피어의 풍취를 자아낸다.

<야연>의 백미는 배우들의 연기다. 펑샤오강의 오랜 페르소나 갈우는 섬세한 몸짓과 자로 잰 듯한 시선 처리를 통해 대륙을 대표하는 남자배우의 내공을 보여준다. 대화 도중에 급작스러운 감정 변화를 드러내는 갈우의 차가운 표정과 떨릴 듯 말 듯한 목소리의 조절은 인상적이다. 완을 연기하는 장쯔이의 열연도 눈부시다. <게이샤의 추억>에서 옅게 드러난 관능미는 이번 영화를 통해 만개했고, 리와 우 사이를 오가며 벌이는 표정 변화와 감정 처리도 한층 성숙한 모습이다. 순수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저우쉰이나 시대극에 처음 도전한 미남 대니얼 우의 패기있는 연기도 드라마에 긴장을 더해준다.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력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모호한 선과 악을 보여주는 바탕이 된다. <야연>은 선과 악을 확정하지 않는다. 영화 초반 리와 우로 대표되는 선과 악의 구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진다. 피도 눈물도 없던 리는 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순정남으로 변하고, 우는 오히려 완의 마음을 의심한다. 후반부 완이 권력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팜므파탈의 면모를 드러낼수록 그의 욕망에 리와 우가 놀아나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생긴다. 칭을 가혹하게 대하는 완의 모습에서 그러한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햄릿의 “약한 자여, 당신의 이름은 여자”라는 대사는 <야연>에 어울리지 않는다. <야연>의 여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낌없이 내던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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