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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7] - 실험영화
씨네21 취재팀 2006-09-29

고정관념을 흔드는 실험영화 4편

스타일과 상상력, 실험적 내러티브의 맛

<파프리카> Paprika 곤 사토시/ 2006년/ 일본/ 90분/ 애니아시아!

2004년 동시대 일본에서 PT라고 불리는 기계가 발명된다. 일명 ‘DC미니’라고도 하는 이 기계는 꿈을 통로로 인간의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의 산물이다. 젊은 여박사 치바는 자폐적인 천재 도키타와 함께 이 기술의 개발자. 그런데 정부로부터 정식 사용허가가 떨어지기 전에 기계가 도난되고 만다. 유력한 용의자는 개발에 참여했던 히무로라는 동료다. 치바는 이 기계를 테스트했던 고나가와 형사와 함께 히무로의 꿈에 들어가 도난범을 붙잡고자 한다. 문제는 DC미니의 결정적인 기술적 결함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 예상했던 대로 DC미니가 오작동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인간의 기술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다.

<파프리카>는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 <도쿄 갓파더스>로 이어지는 곤 사토시만의 환상적인 스토리텔링이 꿈이란 소재와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애니메이션이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 그리고 미디어와 현실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감독만의 상상력이 이 영화에서는 200% 영역을 확대한다. 꿈의 침투를 통해 트라우마로 짓눌린 인물들의 무의식을 의식 바깥으로 끌어내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절대 표현할 수 없겠다 싶을 만큼 방대하고 화려하다. 게다가 <파프리카>는, 인간을 구제할 기술이냐 구속할 기술이냐의 문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인간의 순수함과 시간의 테마까지 끌어안으면서 주제적으로도 이전 작품들에 비해 넓고 깊다. “음악감독의 음악을 먼저 듣고 이미지를 떠올린다”고 할 만큼 영상에 부합하는 사운드가 입혀지면서, <파프리카>는 시청각적으로 온전히 환상적인 여행이다. 이어지고 끊어졌다 합체하고 분할되는 수많은 꿈들처럼,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파프리카>는 다만 보는 이에 따라 상상력의 과잉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새해의 꿈> Do Over 쳉유치에/ 2006년/ 대만/ 113분/ 아시아영화의 창

한해가 바뀌는 순간, 사람들은 어떤 꿈을 꿀까. <새해의 꿈>은 12월31일부터 1월1일 사이에 놓인 얼마간의 순간에 얽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루기 힘든 것을 욕망한다. 촬영장에서 심부름이나 차량 통제 같은 잔일을 하고 있는 영화 제작부 막내는 주연 여배우를 흠모하고, 오로지 대만 주민증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타이에서 넘어와 5년째 폭력조직에서 일하고 있는 깡패는 톨게이트 직원을 내심 사랑한다. 여기에 마약에 취해 사는 젊은 커플, 가족사의 깊은 상처를 갖고 있는 영화감독, 영화에 돈을 대고 있는 조직의 보스, 그리고 정체 모를 일본 여성이 등장하면서 사람들 사이의 사슬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사슬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좀처럼 재구성되지 않는다. 인물별로 시점이 옮겨가면서 사건들은 도리어 흐트러진다. 대만의 젊은 감독 쳉유치에는 이 혼란스럽지만 절실한 소망의 순간을 뮤직비디오 스타일의 감각적인 영상으로 묘사한다.

<징후와 세기> Syndromes and a Century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2006년/ 타이, 프랑스/ 105분/ 아시아영화의 창

삶을 악보 위로 옮겨놓는다면, 아마도 반복과 변주를 거듭하는 소나타 형식을 취하지 않을까. 적어도 아핏차퐁의 세계 속에서는 그렇다. <징후와 세기>는 한 세기라는 시간차를 두고 여전히 같은 박자의 걸음을 걸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토아는 여의사 테이를 짝사랑하고, 테이는 난초를 파는 화원의 눔에게 끌린다. 치과의사 플레와 환자로 병원을 찾은 젊은 스님 사이에서는 묘한 감정의 기류가 흐른다. 시골마을의 작은 병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잔잔한 사랑 이야기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첨단의 현대식 병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사랑의 에피소드들은 조금씩 모양을 바꾸고, 인물들을 비추던 카메라의 시선은 종종 전반부와 정반대의 위치를 택하지만, 고요한 물결처럼 흘러가는 이야기는 하나의 후렴구처럼 닮은꼴을 형성한다. 또렷한 내러티브나 극적인 긴장감없이 지속되는 영화는 삶 그 자체를 하나의 소품처럼 구성한다. 일상의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음계를 이루고, 징후처럼 반복되는 사랑은 하모니가 되어 삶을 변주한다.

<파라과이식 그물침대> Paraguayan Hammock 파스 엔시나/ 2006년/ 파라과이, 프랑스, 아르헨티나,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78분/ 크리틱스 초이스

늙은 농부 라몬과 그의 아내 칸디다는 밭을 일구며 끝없이 무언가를 기다린다. 비가 오고, 개짖는 소리가 멈추고, 전쟁에 나갔던 아들이 돌아오기를. 그들의 아들은 소작농이 지주의 땅을 지키기 위해 동원되었던 차코 전쟁에 끌려나갔다. 라몬이 집을 비운 사이 전사통지서를 받은 칸디다는 아들이 죽었을 리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통지서를 들고온 아들의 전우에게 그가 편하게 죽었는지 묻는다. 라몬과 칸디다의 하루는 길고도 길어, 마치 평생처럼 그들을 짓누르고, 영원 같은 기다림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영화를 공부한 감독 파스 엔시나는 <파라과이식 그물침대>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를 건드리는, 침묵의 세계”라고 표현했다. 그 말처럼 <파라과이식 그물침대>는 침묵 사이를 부유하며 하루 중 어느 시간에 속해 있는지 모를 고요한 풍경을 응시한다. 파라과이에서 28년 만에 처음으로 제작된 극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