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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위험한 평화

<커맨더 인 치프>

미국 잠수함이 북한 영해에서 조난당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북한군은 조난당한 잠수함을 포위하고, 백악관엔 비상이 걸린다. 잠수함에 탄 군인들을 구하는 길은 둘 중 하나다. 전쟁을 할 것인가? 협상을 할 것인가? 지난 9월17일 방영된 미니시리즈 <커맨더 인 치프>의 내용이다. 지나 데이비스가 연기하는 미국 대통령 앨런이 힐러리 클린턴을 닮았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커맨더 인 치프>는 <웨스트윙>과 마찬가지로 백악관을 무대로 삼은 정치드라마다. 우연히 틀었다가 채널을 고정시키고 보게 된 건 신문에서 무척이나 알기 어렵게 표현하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역학이 한눈에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맞먹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한 대통령 앨런은 관계자들의 자문을 구한다. 북한엔 핵무기와 정규군만 100만명이 있다며 전쟁을 반대하는 온건파와 북한군 100만명은 독재자의 압제에 신음하는 배고픈 국민들일 뿐이라며 본때를 보이자는 강경파가 맞서는 가운데 앨런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묻는다. “서울과 평양을 합쳐서 3200만명이 죽습니다.” 그러자 앨런이 말한다. “그럼 그들(미국 잠수함 선원)을 포기하란 말인가요? 최초로 자기 부하를 죽이는 대통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인 3200만명과 미국 군인 수십명을 맞바꿀 수 있다는 미국 대통령의 입장은 무척 섬뜩하지만 지나친 과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짐작대로 드라마는 미국의 자존심도 지키고 전쟁도 피하는 해피엔딩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결말과 무관하게 흥미로웠던 건 전쟁을 해선 안 되는 이유로 오직 일본 총리와의 대화장면만이 부각된다는 점이었다. 대통령 앨런이 일본 총리에게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말하자 일본 총리는 북한의 미사일이 미국까진 못 가도 일본엔 떨어진다며 전쟁에 반대한다. 한국인 3200만명이 죽는다는 얘기에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던 앨런도 그 상황만은 피하려 한다. 드라마니까 생략이 많아서 오해의 소지가 있겠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드라마라서 핵심만 잘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이 드라마에서 일본 총리의 반응 대신 한국 대통령의 반응이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도쿄가 불바다가 된다는 상상과 서울이 불바다가 된다는 상상은 미국 시청자에게 상당히 다른 느낌일 것 같다. 드라마 제작진도 미국 시청자에게 북한과 전쟁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득하는 데 있어서 한국인이 죽는다는 것보다는 일본과 중국이 피해를 입고 3차 세계대전으로 커질 수 있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되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면 지금 이 땅의 평화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것일까.

KBS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니 몇몇 시청자는 이런 에피소드를 방영한 KBS를 맹렬히 비난했다. 화가 날 만한 내용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한반도 정세를 제대로 알려준 유익한 프로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태가 해결되자 앨런은 “나였기에 전쟁을 막았다”고 말한다. 공화당 출신이 대통령이었다면 전쟁이 났을 것이란 얘기다(이라크전을 수행한 부시에 대한 비판이겠으나 앨런의 태도를 보면 민주당이라고 상황인식이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이 미국에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심지어 이번 에피소드가 방영된 날 <커맨더 인 치프> 게시판에 우익청년모임이라는 단체가 전작권 환수 반대 서명운동에 참여하자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참으로 생각없는 단체다. 문득 궁금하다. 한국에서 우익운동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머리가 나쁜 것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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