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투덜군 투덜양
투덜양, <글래스톤베리>에서 모든 것이 허락된 해방구를 발견하다

이런 게 진짜 축제 아니겠어?

이십대 중반 처음 가봤던 유럽에서 만났던 첫 문화적 충격은 횡단보도였다. 파리의 콩코드 광장이었던가. 차들이 막 달리는 큰길에서 사람들이 서슴없이 불법횡단을 하는 것을 봤다. 보도블록 사이로 콕콕 박혀 있는 담배꽁초와 지하철의 지린내까지, 충격은 물수제비처럼 퐁퐁퐁 이어졌다. 이런이런. 신호등 무시하고, 길바닥에 휴지버리고, 줄 서 있을 때 새치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한 거 아니었어?

2002 월드컵 때 시청 앞 광장이 수만명의 자발적 응원군들로 꽉 차며 ‘한국에서도 축제 문화’ 운운할 때 시큰둥했다. 애국주의 등에 대한 비판적이고 지성적인 담론에 공감해서가 아니었다(그럴 리가 있나). ‘훌륭하다’ 편에 서 있는 기사나 글들에는 늘 그 많은 사람들이 혼란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나중에 앉은 자리까지 깨끗하게 정리했더라는 내용이 꼭 들어갔고 그게 거북했다. 반대로 ‘%%녀’ 계통의 튀는 응원자들을 향해 ‘옥에 티’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거슬렸다. 자기 자리 청소 잘하는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광란의 밤’과 ‘깔끔한 뒷정리’는 패키지로 묶이기에 좀 어색한 조합 아닌가.

이제 나도 서구 ‘선진문물’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문화적 충격을 받는 일은 별로 없지만 <글래스톤베리>를 보면서 처음 파리에 갔을 때 느꼈던, 당혹감 비스무리한 쾌감을 느꼈다. 아울러 월드컵 축제 때 느꼈던 불만에 대한 재확인. 이봐, 정돈된 질서의식과 깔끔한 뒷정리, 이건 아니라고!

<글래스톤베리>는 영화의 반을 ‘살아서 신화가 된’ 축제의 역사와 문화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데 할애하는 반면, 반은 너저분하고 한심하고 위험하기조차 한 축제의 관객을 보여준다. 대영제국 대표 축제의 화장실은 엉망이고 OECD 회원국가 국민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마구 노상방뇨를 하며 담장은 무단 입장하려는 관객으로 무너지고 축제가 끝난 뒤 광활한 농장은 쓰레기가 넘쳐난다. 아, 이 방종의 극한이라니. 여기는 국회의원도 없나. 이렇게 엉망진창인 축제를 30년 동안 방치하고 있는 영국의 정치인들과 관료, 교육계 인사들은 업무방기로 경질이라도 돼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영화 초반 매년 이곳에 텐트를 들고 와서 ‘개고생’을 하며 몸과 정신의 찌든 때를 벗기고 간다는 보험회사 직원이 잠깐 등장한다. 일상을 조이는 위계와 책임과 관습으로부터의 해방. 적어도 영화로 느낀 글래스톤베리의 가치, 그리고 축제의 의미는 이런 것으로 보였다. 남에게 물리적인 해를 입히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허락된 해방구라니, 너무 근사하잖아.

그런데 글래스톤베리에는 앞으로도 못갈 것 같다. 그래, 돈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이게 다 20년간 받은 선진시민교육이 내면화된 탓이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지저분한 화장실은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단 말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