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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의 윤리를 보여달라, <타짜>

<타짜>가 보여주는 허상의 미장센에 대한 비판

2년 전 나는 <범죄의 재구성>에 관한 글(<씨네21> 제450호, ‘<범죄의 재구성>의 반짝이는 공허함을 보는 방법’)에서 “우리는 이제 갓 첫 영화를 만들었을 뿐인 최동훈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속단할 수는 없다”고 쓴 바 있다. 그럼 최동훈의 두 번째 영화 <타짜>를 보고 난 지금, 우리는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을까? 적어도 최동훈이 계속해서 잘 가공된 상업영화들을 내놓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감독이라는 점은 수긍할 수 있겠지만 그가 과연 자신의 영화들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만의 세계의 이미지를 펼쳐 보일 의지를 지니고 있는 감독인지는 심히 미심쩍다. 각자의 욕망과 간지로 경쟁하는 야수들이 등장하는 무대야말로 최동훈의 세계라고 생각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의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허상의 미장센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범죄의 재구성>의 반짝이는 공허함은 <타짜>에서도 여전하다.

<타짜>

게다가 최동훈은 자신의 인물들에게 여전히 별로 애착이 없어 보인다. <타짜>가 무엇보다 캐릭터의 영화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말은 매우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최동훈의 관심은 그의 인물들이 아니라 그들의 패션과 제스처, 그리고 말투 자체에 있다. 이것들이야말로 캐릭터를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 아니냐고? 물론 그건 사실이지만 패션, 제스처, 말투 등은 캐릭터 구축의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이 아니다. 과잉이 두드러지는 영화일수록 그 과잉이 장식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독의 신념을 반영하는 세계의 이미지와 그 안을 살아가는 인물 사이의 조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인물을 향한 감독 자신의 강박적 매혹에 다름 아니다. 우리 시대 과잉의 대가들인 마이클 만과 왕가위의 영화들은 이러한 조응과 매혹의 최상의 예를 보여준다. 그러나 최동훈은 두 가지 모두를 결여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세계의 이미지도 제공하지 않으며 자신의 인물들을 사실상 그저 인형처럼 다룬다.

그런 까닭에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의 인물 대부분은 기껏해야 ‘쿨한 야수’로 남을 뿐이며 그들의 특징은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서라도 ‘가오’를 지키려 노력한다는 데 있다. <범죄의 재구성>의 최창혁, 김 선생, ‘구로동 샤론 스톤’, <타짜>의 평경장, 정 마담, 아귀, 짝귀가 모두 그런 인물들이다. 인생이라는 도박판(혹은 사기판)에서 각자 나름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살기. 어쩌면 이게 최동훈이 세상을 보는 방식일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정말이지 그건 (미숙한 중·고딩들을 현혹시키는 수준의) 만화에서나 가능한 세상이다. 진심으로 그런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면 최동훈은 사기극이나 도박판에 관한 누아르가 아니라 한국의 정치인들에 관한 블랙코미디를 찍었어야 했다(임상수가 백윤식을 <그때 그사람들>에 캐스팅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세계의 이미지와 인물에 대한 강박적 매혹의 결여

그런데 이쯤에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이토록 허황하고 공허한 영화들, 세상의 질서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겉도는 영화들, 만화보다 더 만화적인 인물들이 날뛰는 영화들, 그런데도 짐짓 고전적 비극인 양 가장함으로써 비평가의 입을 간지럽게 만드는 영화들(“이건 단순한 상업영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데 비단 최동훈의 영화만이 그런 것일까? 박찬욱의 영화들도, 김지운의 영화들도, 류승완의 영화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혹은 올해 개봉되었던 최호의 <사생결단>이나 원신연의 <구타유발자들>도 같은 범주에 속하는 영화들이 아닐까? 박찬욱을 기수로 하는 게임형 망가-누아르 세대의 풍경?

이상의 감독들을 동시대 한국영화의 스타일리스트들이라고 부르는 건 타당하지만 어쩐지 스타일리스트 영화의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마이클 만과 왕가위의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이들의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의 이미지는 의미없는 기호들의 세계, 부유하는 기표들의 세계, 그 의미없음과 떠돎의 흔적을 감추기 위한 필사적인 과잉의 세계이다. 한마디로 안토니오니적 비전의 스타일리스트적 변용인 셈이다. 이때 그들의 인물들이 이처럼 현란한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은 놀랄 만큼 단순하다. 비극적 인물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기보다는 믿을 수 없는 순정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에 그냥 빠져든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그림자들을 춤추게 하기. 그리고 마이클 만과 왕가위는 이들의 행위가 그저 영화적인 제스처가 아니라 우리 세기의 절망과 희망의 표상이라고 강변한다. 예컨대 <마이애미 바이스>의 일견 장황해 보이는 로맨스는 마이클 만이 그의 인물들에게 진정으로 매혹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그 매혹을 드러내기 위해 그는 서사적 균형까지도 포기해버린 것이다. 다소 기이하긴 하지만 정말이지 보는 이에게 신선한 감동을 선사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런 포기에서 나는 스타일리스트의 윤리를 발견한다.

반면 <타짜>에서 목욕탕에 홀로 주저앉아 “정말 먹고살기 힘들다”고 중얼거리는 정 마담의 모습은 그저 CF의 한 장면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고니의 가방에서 빠져나와 공중에 흩날리는 돈다발은 우리에게 아무런 카타르시스도 안겨주지 않는다. 이유인즉 최동훈은 자신의 인물들의 욕망은 그들의 것일 뿐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태연하게 바라보는 데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설계자와 기술자들의 설계자’의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꽃 중의 꽃은 바로 그 자신이다.

치환 가능한 인공적 캐릭터들의 향연

나는 <타짜>가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영화라고 보는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보인다면 우리가 근자의 한국영화들을 통해 인공적인 얼굴들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탓일 게다. 제법 솜씨 좋게 가공된 이 인공적인 얼굴들은 영화들을 넘나들고 서로 교차된다. 특히 여배우들의 경우 그 인공성은 더욱 강화된다. <장화, 홍련>과 <범죄의 재구성>의 염정아는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와 뒤섞인다. <타짜>의 김혜수가 그 뒤를 따른다. 얼마든지 상호 치환이 가능한 인공성의 표상들.

<타짜>에서 그나마 예외가 있다면 그건 조승우가 연기한 고니 정도일 게다. 여기서 조승우는 데뷔 이래 최상의 연기를 보여준다. 또한 그가 연기한 고니는 <타짜>에서 유일하게 만화적이지 않은 인물인 동시에 허영만의 인물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인물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타짜>는 인공적인 얼굴들의 향연에 불청객으로 찾아든 고니라는 인물이 모든 가면들을 벗겨버리고 홀연 사라져버리는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다. 고니가 기어이 정 마담의 입에서 “돈은 놓고 가!”라는 말이 터져나오게 만들고 아귀로 하여금 “이게 왜 사쿠라야!”라고 말하게 만드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인물들의 ‘가오’, 인공적인 얼굴은 여지없이 무너져내린다. 한편 고니의 얼굴은 또 다른 인공적인 얼굴- 건달 곽철용의 부하의 얼굴- 에 의해 오인된다. 정 마담이 경찰들 앞에서 곽철용 부하의 시신을 고니의 시신이라고 증언할 때, 그건 인공성이 스스로의 패배를 완전히 시인하는 순간이 된다. 동시에 정 마담의 증언이 비인공적인 것에의 사형선고이자 추방명령이기도 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고니는 돌아올 것이다. <타짜>는 고니가 이국의 어느 해변가 카지노 근처의 공중전화에서 수화기를 드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최동훈은 <타짜>의 속편을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다음 영화가 (<타짜>의 속편이건 아니건 간에) ‘고니적인 것들’의 귀환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여담을 덧붙이자면 올해 추석 한국영화들 가운데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준익의 <라디오 스타>뿐이다. 여전히 이준익은 영화를 ‘잘’ 만드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올해 가장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 가운데 한편이자 그의 가장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우연히도 <라디오 스타>에서 박중훈이 맡은 퇴락한 가수의 이름 또한 ‘곤’이다. 영화 속에서 곤은 입만 열면 ‘가오’를 떠벌리는 인물이지만 박중훈의 연기에 인공적인 것이 깃들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이준익은 여기서 배우들을 가공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한 판을 마련하는 정도에 만족한다. 박중훈-안성기 커플은 요사이의 한국 대중영화가 잊고 있었던 자연스러움의 미덕을 솜씨 좋게 되살려낸다. 영화는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 함께 들썩거리며 흥겨워하고 슬퍼한다. 인공성의 낙원 혹은 지옥에서 땅(坤)의 세계로, 고니에서 곤으로. <라디오 스타>는 <타짜>가 멈춘 곳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나는 <타짜>의 현란함보다는 <라디오 스타>의 소박함을 응원하는 쪽을 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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