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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류승완 감독, 쓸쓸한 얼굴로 돌아보다

<짝패>를 통해 본 한국영화 주류와 비주류의 운동

<포지티브> 특별호, <카이에 뒤 시네마> 특집, 400쪽 분량의 중요한 책 한권, 텔레비전과 파리의 한 극장에서의 회고전 등…. 1970년대 미국영화가 유행이다. 아마도 이 현상은 부시의 두 번째 임기의 보수주의와 일부 할리우드영화의 무기력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반대로, 1970년대의 위기는 미국 영화사에서 가장 성숙한 영화들을 탄생시켰다. <이지 라이더>(1969)가 거둔 의외의 성공에 이어 스튜디오들의 주류는 반문화와 청년문화의 비주류에 문을 열었다. 할리우드는 코폴라, 스코시즈, 알트먼, 드 팔마, 스필버그, 루카스와 그 밖의 많은 감독들이 만개하는 것을 보게 됐다. 이 시기는 1975년 <죠스>와 함께 쇠락하기 시작했다. 작품의 장점이 어떠했든 간에 영화는 <씨네21> 독자들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새로운 배급방식을 구축했다. 일반 작품이 125~200개 스크린에서 개봉하던 당시, <죠스>의 상어는 단번에 500개관을 점령했으며, 1980년대를 지배하게 됐던 ‘블록버스터’라는 모델의 서장을 열었다. 1977년 <스타워즈>가 나왔고, 1978년엔 <슈퍼맨>이 나왔고… 비주류는 추방됐고, 주류가 자신의 권리를 되찾았다. 또는 비주류가 결국 새로운 주류를 만든 것이라 하겠다. 물론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이런 왔다갔다하는 현상은 미국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다.

<짝패>

<짝패>를 보고 난 뒤 생각하게 됐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도시로 되돌아와, 청소년기 패싸움의 사심없는 폭력이, 냉소적인 성인이 된 옛 친구에 의해 조직된 범죄에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을 목격한다. 복수 이외에도 다분히 고전적인 영화의 주제는, 결론적으로 말해 순수함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감독 자신이 자기 영화의 근원을 찾으며, 극중 인물의 여정과 공명하는 것이다. <짝패>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열정적인 영감을 되찾으려는 절망적인 시도나 마찬가지다. 결국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따라서 영화는 영원히 잃어버린 순수에 대한 향수 속에서 끝을 맺는다. 류승완 감독은 비주류 출신으로 주류에 새로운 스타일을 불어 넣었던 작가군에 속한다. 기존 주류의 내부에서, 그는 매우 개인적인 자신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둥지를 트는 힘이 있었다. 그렇지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같은 작품을 분출시켰던 정돈되지 않은 원동력은 성숙함이 생기면서 떨어졌다. 이것이 주류 속에서 살아남는 데 치르는 대가다.

최근에 <엽기적인 그녀>를 다시 봤는데, 이 작품은 대략 <스타워즈>가 새로운 할리우드에서 그랬듯이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에 속한다. 기존 규범으로의 회귀는 이 작품의 구체적인 한 장면에서 드러난다. 처음에 농구화를 신은 여주인공은 지하철 역사 끄트머리, 노란선 가장자리 훨씬 너머 자리잡고 있었다. 완전히 변두리 비주류 속에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지하철 역사에 있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는데, 이번에는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있다. 감독은 전지연의 발 클로즈업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뒤로 한발 물러선다. 노란선 너머로 자리를 옮기고, 더이상 위험과 불균형이 없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서 있는 규범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즉, 주류 속으로 말이다. 그녀와 함께 모든 한국영화는 가장자리 비주류의 텅 빈 공간을 과거 향수에 젖은 이들에게 남겨둔 채 자신의 한계를 다시금 그린다. 지금도 용기있는 몇몇 독립영화감독들은 그들의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며 주변부가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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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