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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풍속에 녹아든 비극과 멜로, <가을로>

삼풍백화점의 비극과 김대승표 멜로가 가을 단풍 속에 녹아든다.

“사라지는 게 아쉽지 않아요?” 우이도의 모래산 앞에서 생전의 민주(김지수)는 그렇게 말했다. 아직 몇 십년은 충분히 그 자리에 있을 자연을 두고 그녀는 조금은 오만하게, 벌써 그것의 사라짐을 슬퍼한다. 사라짐을 붙들기 위해 사진을 찍고 누군가와 함께 다시 돌아갈 것을 기약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모래 알갱이가 다 흩어지기 전에, 그녀의 삶이 먼저 흩어졌다.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에 이어 <가을로>에서도 김대승 감독의 화두는 여전히 사라짐 혹은 상실이다. 민주는 그 사라짐을 그저 미리 안타까워했을 뿐이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랑하는 이를 잃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상실감은 그저 안타까움으로 그치지 않는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인우(이병헌)는 죽음처럼 살다 결국 절벽에서 떨어지는 길을 택했고 <혈의 누>에서 인권(박용우)은 비통함을 잔혹한 복수심으로 메웠다. 그의 영화는 살아남은 자가 그 끔찍한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혹은 방식을 보여준다. 세 번째 작품인 <가을로>에서 김대승 감독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극단적인 상황을 껴안고 있지만, 상실을 마주하는 태도는 한결 여유로워진 듯하다. 그는 어렴풋이 희망을 말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것은 좋은 징조일까.

결혼 준비를 위해, 현우(유지태)와 민주는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한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현우는 일이 많았고, 하필이면, 민주는 백화점에 혼자 가기 싫다고 말했고, 하필이면, 그 백화점이 ‘삼풍백화점’이었다. 비극은 이처럼 우연의 완벽한 조합에서 탄생한다. 백화점은 무너졌고 현우는 그 순간을 목도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어느 날 현우 앞에 ‘민주와 현우의 신혼여행’이라는 제목의 다이어리가 도착한다. 다이어리 안에는 현우와 민주가 여행하게 될 한국 곳곳의 풍경들이 펼쳐져 있다. 민주는 너무 일찍 미래의 꿈에 부풀었고, 민주의 숨결이 담긴 다이어리는 너무 늦게 현우에게 도달한 것이다. 현우는 다이어리를 지도 삼아, 정확히 말하자면 민주의 목소리를 따라 홀로 여행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마다 한 여인이 보인다. 그녀는 세진(엄지원)이다. 세진은 하필이면, 10년 전 그 시간, 붕괴된 백화점 현장에서 민주와 함께 사투를 벌이던 그녀이다. 세진과 현우는 서로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린다. 현우는 세진에게서 민주를 보고 세진은 현우에게서 민주를 본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인우가 현빈(여현수)에게서 태희를 보았듯 상실한 대상은 이렇게 돌아온다. 이제 이 쓸쓸한 여정에 현우와 세진, 그리고 민주가 동행한다.

이 불가능한 동행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가을로>가 선택한 방식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고 공존시키는 것이다. 현우와 세진의 여정 위로 민주의 목소리가 흐르고 이따금씩 민주의 육체가 현우와 세진의 공간에 들어온다. 이 세 사람은 한 공간 안에 있지만, 민주의 시간은 나머지 둘의 시간과 어긋난다. 민주가 배를 놓치고 발걸음을 뗀 그 자리에 세진이 서서 떠나는 배를 하염없이 쳐다보는 식으로 민주의 몸은 언제나 한발 앞서 왔다가 떠나고, 그녀의 목소리(내레이션)는 이미 언제나 그곳에 존재한다. 세진의 입에서는 민주의 글귀가 마치 자기 것인 양 새어나오고 현우와 세진의 시선은 언제나 민주의 목소리가 이끈 지점, 딱 그 정도에서 멈춘다. 말하자면 이 여정의 목적은 민주와 자연 사이의 묻혀졌던 대화 혹은 기억을 복원하는 것이며 현우와 세진은 그 대화를 엿듣는 자들이다. 민주의 과도한 내레이션과 영혼의 무게는 이 영화를 민주의 이야기로 만든다. 삼풍백화점의 먼지를 뒤집어쓴 민주의 다이어리에 목소리를 주기, 이것이 <가을로>가 향하는 길로 보인다. 그만큼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에는 힘이 없다. 민주와 현우, 민주와 세진의 관계에 비해, 현우와 세진 사이에는 동일한 사태에 대한 상처와 죄의식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정서적 교류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카메라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는 세진의 뒷모습과 그녀를 바라보는 현우의 무력한 표정을 함께 비추는 순간에서조차, 둘의 내밀한 소통은 민주의 존재감에 묻힌다. 김대승 감독은 남겨진 자들의 삶을 다루고 싶었겠지만, 정작 그는 민주라는 유령에게 남은 두 인물의 행로와 영화의 서사를 너무 쉽게 맡겨버리고 있다.

<가을로>의 주인공은 “배우 3명과 자연”이다. 10개월이라는 촬영기간 동안, 실제 계절을 거스르며 찍어낸 한국 곳곳의 풍경들은 분명 아름답지만, 그 풍경들이 이 영화를 그리고 현우와 세진을 구원해주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가을로>는 오히려 문명세계의 처참한 비극을 자연의 빛나는 절경과 대치시키고 메우는 과정에서 서사의 부족함과 시대의 비극, 개인의 견딜 수 없는 상처를 미학화한다. 자연의 미학이, 혹은 자연과의 대화가 자신과의 대화, 상처와의 진정한 마주침을 지연시킨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방식이 위안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치유와 극복이 아닌지도 모른다. 여행이 끝나는 길 위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추억을 안고 희망으로 건너뛰는 법이 아니라, 비극의 흔적을 끝까지 안고 살아가는 법일지도 모른다. 멜로와 상실의 교차점을 포착해내는 김대승 감독의 감각은 여전히 유려하나, 상실의 슬픔을 받아들이는 가장 윤리적인 길에 대해, 그의 사유는 여전히 모자라거나 관심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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