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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탐구하는 일본만화의 거장, 우라사와 나오키의 세계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를 보았다면 아마도 동의할 것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를 능가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을. 일단 보면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여간해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주지 못하는 진한 여운까지 남겨준다. <해피!> <마스터 키튼> <20세기 소년> 등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어떤 장르의 걸작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 최근 또 하나의 걸작 <플루토>의 단행본이 나오면서 우라사와 나오키가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 최고의 ‘초일류 스토리텔러’인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세계로 들어가보자.

일본 만화세대의 결정체, 우라사와 나오키

1960년에 태어난 우라사와 나오키는 일본 만화의 세례를 한껏 받고 자라난 세대다. 어린 시절에는 <철완 아톰>의 데즈카 오사무와 <사이보그 009>의 이시노모리 쇼타로에 푹 빠져들었고, <야구짱! 도카벤>과 <터치>로 대표되는 스포츠 만화와 <도레미 하우스>(메종일각) 등 러브코미디의 전성시대도 만끽했고, <아키라>의 오토모 가쓰히로가 이끈 새로운 만화의 물결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대학 시절 내내 만화서클에서 습작을 했던 우라사와 나오키는, 졸업 뒤에는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할 생각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출판사 소학관에 취직할 생각으로 면접에 나갔던 우라사와는 자신이 그렸던 만화를 가져갔다. 혹시 취직에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만화를 본 편집자가 공모를 제안했고, 우라사와는 82년 소학관 신인 코믹대상에서 수상하면서 만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우라사와 나오키를 메이저 작가로 끌어올린 작품은 86년에 발표한 <야와라!>였다. 반드시 그려보고 싶었던 ‘의사’ 이야기가 거부된 뒤, 편집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언뜻 떠오른 ‘여자 유도’의 아이디어가 바로 채택되어 연재에 들어갔다. 여자 유도 선수가 국민적인 아이돌 스타가 되고, 라이벌과 승부를 겨루면서도 결국은 ‘협동하는 인간’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야와라!>는 일본 서민의 정서를 탁월하게 잡아낸 작품이었다. 여자 테니스 선수를 다룬 <해피!> 역시 <야와라!>의 맥을 잇는 걸작이었다. <야와라!>와 <해피!>는 누구나 즐겁게 볼 수 있고, 누구나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보편적인 작품이다.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의 세계 <마스터 키튼>

<야와라!>와 <해피!>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정한 작품이라면, <마스터 키튼>과 <몬스터>는 휴머니즘을 주장하면서도 잔인한 세상을 고발하는 선이 굵은 만화다. 가쓰시카 호쿠세이가 스토리를 쓴 <마스터 키튼>은 고고학자이며 보험조사관인 마스터 키튼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연구에 전념하고 싶지만 생계 때문에 보험조사관으로 일하는 마스터 키튼은 발굴된 단서를 분석하여 가설을 만들고, 다시 증거를 찾아 가설을 증명하는 고고학의 방법론과 지식 그리고 SAS 교관을 지내며 익힌 전투기술을 활용하여 갖가지 범죄를 해결한다. 키튼은 탐욕으로 빚어진 범죄를 증오하지만, 어쩔 수 없이 범죄에 빠져든 인간들에게는 한없는 연민을 보낸다. <마스터 키튼>은 휴머니즘적인 시선으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를 응시한다. 다시 보면 <마스터 키튼>은 <몬스터>와 <20세기 소년>을 예고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몬스터>의 덴마가 꿈꾸는 모든 이에게 평등한 휴머니즘이 담겨 있고, <20세기 소년>의 켄지처럼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인정하면서 강해지는 키튼이 있다. 또한 키튼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접하는 이국적인 풍경과 풍물이 아주 세세하게 그려져 있는 <마스터 키튼>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이 확립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독일의 어떤 소설 이상으로 독일의 풍경을 자세히 그려놓았다고 평가받는 <몬스터>의 성실한 ‘리얼리즘’은 <마스터 키튼>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다.

<몬스터>로 향하는 길은, 우라사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우라사와는 <몬스터>가 ‘원래 나 자신의 세계’였다고 말한다. 섬세하고 복잡한 매력을 지닌 <몬스터>는 참혹한 인간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비관적인 <다중인격탐정 사이코>나 <지뢰진>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우라사와는 강단있는 모범생이다. 우라사와가 ‘데뷔할 때부터 가슴에 품고 있었던’ <몬스터>에 대한 일본 독자들의 반응은 ‘미스터리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묘하다. 요한이라는 살인마는, 자신의 손으로 살인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는 타인의 마음을 조작하여 살인을 저지르게 한다. 그것은 이미 인류가 수없이 해왔던 방식이다. 불안을 조장하고, 가공의 적을 설정하여 증오하게 만드는 것.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방식도 바로 그것이었다. 요한은 사람들 누구나에게 존재하는 ‘악’을 끌어내고, 덴마는 그 악을 치유하려 한다.

인간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질문 <몬스터>

<몬스터>에는 심오한 세계가 있다. 요한의 정체를 파고들어가면 동독에서 진행되었던 ‘인간 개조’ 실험이 밝혀진다.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진지하고, 끈질긴 질문이 시작된다. 심오한 철학적 질문과 함께 다양한 사람들의 소중한 세계가 펼쳐진다. 여러 사람들의 드라마가 동시 진행되고, 동시 다발적으로 사건이 벌어지며 중층적으로 사건들이 포개진다. 한 사람이 움직이면 거기에 연루된 전원의 정신적 상태와 정황이 함께 흘러간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단지 요한의 행적과 그를 쫓는 한 남자의 치열한 싸움만을 그리지 않는다. <몬스터>는 덴마가 추적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전개한다. 주연 이상으로 가슴을 울리는 조연들의 구슬픈 이력과 적재적소에 딱 들어맞는 역할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아주 사소한 조연들, 때로는 못된 인간들에게까지 친절하게 손을 내밀어준다. 그들이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준다. <몬스터>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녀노소의 다성적인 드라마’, 다르게 말하자면 ‘대하’ 만화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굳건한 휴머니즘을 담고 있는 수일한 인간 드라마를 그려내는 작가다. 단지 기발한 상상력과 압도적인 필력, 현란한 사건을 뛰어넘어 우라사와의 작품에는 머리와 가슴을 함께 울리는 ‘만화적 지성’이 있다.

꿈과 삶의 궤적을 그린 대작 <20세기 소년>

<20세기 소년>은 사이비 종교집단이 세계를 장악하는 과정과 그 비밀을 파헤치려는 ‘보통 사람’들의 싸움을 그린 SF만화다. <20세기 소년>은 어린 시절의 꿈이 악몽으로 재현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소년의 꿈과 어른들의 추억, 현실과 미래 그리고 가상세계를 세밀하게 엮어낸다. <20세기 소년>에서도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미스터리 이상으로 등장인물들의 구구한 삶의 궤적이다. 누가 누구를 배신하고,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믿고, 누구를 죽이고 등등. <20세기 소년>은 너무나 대작이어서 이야기가 흔들거리는 경향도 있고 끝을 맺기도 힘들겠지만, 우라사와 나오키는 일본 내에서도 대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로 꼽힌다. ‘대장편을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고, 발군의 능력’을 현재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과 적절한 템포를 유지하고 끌어가는 센스에 찬탄하게 된다. 우라사와의 작품은 일본 만화의 한 경지를 보여준다.

<철완 아톰>의 나오키식 변주 <플루토>

이번에 출간된 <플루토>

우라사와는 자기 자신을 “과거의 작품에 트리뷰트를 바치며, 과거의 유산을 조작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DJ”라고 평한다. 우라사와는 일본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처럼 인간에 대한 희망의 시선을 절대로 거두지 않는다. 그러나 우라사와의 시대는, 데즈카의 시대와 다르다. 이미 변혁의 꿈은 사라졌고, 세상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라사와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신념이 <플루토>로 이어진다. <플루토>는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의 한 에피소드인 ‘지상최대의 로봇’을 변주한 만화다. 자신의 말처럼, 전설적인 거장의 세계관을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연주한 만화인 것이다. 야심차게 시작된 <플루토>는 ‘얼핏 명랑해 보이는 <철완 아톰>의 내면에 흐르고 있던 문제의식과 비장함을 끌어낸 작품’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먼 미래가 배경인 <플루토>는 로봇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만화다. 인공지능을 통해 로봇이 점점 인간이 되어가는 시대. 심지어 잠재의식이 존재하고 꿈까지 꾸는 로봇들은 도대체 인간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로봇은 인간을 살해할 수 없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하지만 8년 전 인간을 살해한 로봇은 딱 한번 등장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의 인공지능은 완벽했다. 그런데 완벽한 인공지능이라면, 결국 인간과 동일해진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을 살해하는 인간처럼, 완벽한 로봇은 인간을 살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인간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게릴라

그것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모든 작품에서 공통된 질문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모든 작품은 인간애를 지향한다. 단순히 인간은 선한 존재이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단선적인 휴머니즘이 아니다. ‘그래도 게릴라 정신은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우라사와 나오키는 현실의 악몽을 끔찍하게 보여주면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한다. 그런 치열함과 성실함이 우라사와 나오키를 초일류 작가로 만든 힘이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지금까지 계속 전진해왔다. 순수했던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했던 <마스터 키튼>의 휴머니즘이 <몬스터>에서 더욱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다면, <20세기 소년>과 <플루토>에서는 미래를 예견하면서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한때 우리사와 나오키의 만화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 단정하다는 점이었다. 일탈이나 광기가 없이 지나치게 숙련되어 있다는 것. 하지만 우라사와 나오키는 일탈 없이도 자신의 세계를 더욱 장대하고 심오한 영역으로 끌어가고 있다. 우라사와는 자신의 세계에 만족하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이 던진 질문을 끊임없이 추적하는 거장이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과거와 미래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맑고 건강한 눈으로 참혹한 세계를 지켜보는 거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