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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보리밭의 물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이종도 2006-10-31

당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보리밭의 물결. 그 물결 속에서 나는 자유의 피냄새.

“당신은 막 더블린 공항에 도착했다. 당나귀 마차에 오르면 감자술을 마시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운전사가 당신을 모실 것이다. 더블린 성에 들어서면 파이프 밴드의 ‘대니 보이’와 4리터들이 기네스 맥주로 환대를 받을 텐데 맥주는 3분 안에 비워야만 한다….”

영국 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아일랜드인에 관한 진실>(1999)에서 풍자한 아일랜드 인상은 IT 초강대국이 된 아일랜드와 거리가 있지만 왜곡된 아일랜드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른 새벽 내가 찾은 산골짜기 그곳으로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와 황금빛 보리를 흔들어놓았네”라는 로버트 조이스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일부 구절처럼 아일랜드 인상기는 푸른빛과 저개발, 전원 등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런데 로버트 조이스의 노래 가운데는 “우리를 묶은 침략의 족쇄는 견디기 어려웠네”라는 구절이 있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그 보리밭에 피냄새가 난다고 노래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1996년 <칼라 송>부터 켄 로치와 함께 작업한 시나리오 작가 폴 래버티, 1990년 <히든 아젠다>부터 함께한 프로듀서 레베카 오브라이언에게 아일랜드인의 피가 흐른다고 하더라도 감독 켄 로치는 800년간 이웃 아일랜드를 괴롭힌 영국의 후예다. 줄곧 그가 평등과 자유에 관해 골몰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날선 시각으로 조국을 비판하는 영화는 없었다.

로치는 이 작품이 영국을 반대하는 영화가 아니며 계급간의 연대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지만, 영국제국주의를 이렇게 냉정하게 비판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건 바로 자신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잔디를 깎는 무죄한 시민을 죽이고, 고문을 한 끝에 시민을 목매달고,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소년을 때려죽이는 영국제국주의에 대해 로치는 에누리없이 묘사하고 있다. 윈스턴 처칠은 노벨문학상을 탄 세계적인 정치가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끔찍한 전쟁’이란 말을 꺼내며 이웃나라의 민주화를 협박하는 부시의 선배다. 영국군은 녹슨 펜치로 손톱을 뽑는 고문을 저지르고 있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로치가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온건한 보수적 민족주의자 테디(패드레익 들레이니)가 아니라 과격한 진보주의자 다미안(킬리언 머피)이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영웅 마이클 콜린스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 제임스 코놀리를 지지하는 것이다(극중 대사. “우리가 당장 내일 영국군을 몰아 내고 더블린 성에 녹색기를 꽂는다 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모두 헛될 뿐이며 영국은 계속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지주와 자본가, 상권을 통해”).

이런 놀라운 사고의 기어 전환이 로치의 영화를 늘 푸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데 아일랜드에 관한 로치의 관심은 지식인 좌파의 허영에 그치지도 않고, 단순히 입장을 바꿔보는 데 그치지도 않는 것 같다. 1990년 <히든 아젠다>와 1995년 <랜드 앤 프리덤>에서 키워온 문제의식을 여기서 심화시키고 있다. 북아일랜드 사태를 다룬 <히든 아젠다>에서 영국 정보부의 살인과 공작에 대해 깊게 파들어갔던 켄 로치는 진실이 쉽사리 스스로 문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암울하면서도 현실적인 인식을 보여줬다. 스페인 내전 시기를 다룬 <랜드 앤 프리덤>에서는 적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어려운 과제임을 밝혔다. 오히려 적은 내부에 있는 스탈린주의였던 것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계급적으로 읽어야 하는 영화일 것이다. 영국의 지배계급과 아일랜드의 지배계급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순수한 젊은이가 어떻게 과격분자가 되어 형과 조국을 배반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거꾸로 뒤집는다면 이 영화는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인 전도유망한 아일랜드 유학도가 영국 제국주의의 만행에 치를 떨고 아일랜드의 자주독립을 위해 산화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켄 로치는 민족주의가 아닌 계급의 관점을 택하면서 1920년대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보편적인 이야기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1920년, 아일랜드.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진압하러 온 영국 해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노동자들이 게릴라를 조직한다. 런던으로 유학을 떠날 준비를 하던 의학도 다미안은 단지 영어로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엄마가 보는 앞에서 소년을 개패듯 죽이는 사건을 목격한 뒤 형 테디의 게릴라군에 참가한다. 게릴라들이 결사 항전하자 영국은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 지역의 자치권 이양이라는 타협안을 내놓는다. 아일랜드는 둘로 나뉜다. 협정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승리가 마치 손에 잡힐 듯한 국면에서 형제도 분열한다. 테디는 협정을 받아들인 자유국 군복을 입고, 과격파 다미안은 형의 적이 된다. 테디는 현실적이 되라고 충고하지만 다미안은 자신이야말로 현실적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켄 로치는 날카로운 정치적 주제를 정서에 강렬하게 호소하는 드라마로 운반한다. 캐릭터와 배우를 최대한 근접시켜온 로치답게, 아일랜드 코크 출생인 킬리언 머피를 주연으로 기용했다. 온순한 다미안을 극렬한 투쟁가로 만드는 과정처럼 우리도 아일랜드의 미풍에 따스하게 다가섰다가 심장이 급격하게 데워지는 체험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심약하고 섬세해 보이는 다미안이 공화국군의 위치를 영국군에 고자질한 크리스를 죽이는 순간이 우리의 마음의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이다. 다미안은 크리스를 죽이기 전에 이렇게 뇌까린다. “꼬마 때부터 녀석을 알고 지냈는데, 조국이란 게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거겠죠.”

한발 더 나아가 형제끼리 총을 겨눈다는 비극성이 이 영화가 내장한 뇌관인데 그러나 켄 로치는 편파적으로 다미안의 시선에 기울어 있다. “이 나라 상류층이 우리 형제들을 버리는 거야. 영국은 떠나는 게 아냐. 북으로 이동하는 거야.”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수많은 다미안들의 입장이 되어 블레어와 부시에게 보내는 편지다. 타국을 침입하여 통치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들의 마음을 누를 수는 없다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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