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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용서에 대한 오래된 정서를 길 위에서 배우다, <길>

인생과 용서에 대한 오래된 정서를 길 위에서 배우다.

배창호 감독은 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세련된 정서와 감각으로 동시대를 보여준 감독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의 새로운 작품 <>은 오랜만에 영화 크레딧을 통해 만나게 된 그의 이름만큼이나 반갑고 낯설게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황진이> <꿈> <> 같은 영화보다도 <기쁜 우리 젊은 날>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이 우리의 뇌리에 더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은, 자신은 언제나 전통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고 잊혀져가는 우리만의 어떤 것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 또 그는 한때는 자신도 선배 감독들이 옛것에 관심을 두는 것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날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대부분의 저예산영화들이 쉽게 선택하게 되는 디지털의 차가움 속에서는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고 느꼈는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은 필름제작 방식을 선택했다.

<>의 주인공 태석은 배창호 감독의 그런 고집스러움을 그대로 닮았다. 이 영화는 1950년대 후반과 1970년대를 살아가는 장돌뱅이 대장장이 태석의 삶을 다루고 있다. 무거운 모루를 등에 지고 이 장터 저 장터로 떠돌아다니는 태석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연장을 만든다. 점차 기계화, 대량생산화되는 세상에서 그의 태도는 고지식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전통적 기술에 대한 믿음이 그의 존재에 무게감을 더한다. 그가 연장을 대하는 방식은 인간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의 애정은 직접적이고 요란스럽기보다는 언제나 한결같고 은근하다. 아내를 등에 업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최고의 애정표현이며, 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의 손에 들린 깨엿이 아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죽마고우 득수가 사고를 칠 때도 그를 넓은 품에 안아주고, 허황된 꿈에 젖어 그에게 손을 벌릴 때도 자신 역시 넉넉한 형편이 아니면서 선뜻 집문서를 내준다.

그러나 사랑이 언제나 동일한 사랑으로 보답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런 믿음과 진심이 언제나 통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태석이 득수에게 베풀었던 우정은 얄팍한 배신으로 돌아오고, 그는 친구와 가족을 동시에 잃는다. 태석은 마치 김동인의 <배따라기>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오해 속에서 부인을 잃고 긴 세월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길을 떠돈다. 친구에 대한 미움과 아내에 대한 실망이 그의 마음속에서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태석은 우연찮게 득수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귀향한 득수의 딸 신영을 만난다. 신영의 마음속에도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아버지 득수에 대한 미움이 가득 차 있다. 둘은 눈으로 덮인 산길을 걸어가면서 자신들의 마음속에 맺힌 한의 실타래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한 인간이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그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떤 이는 길을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고, 어떤 이는 길가의 풍광을 즐기며 걸어가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긴다. 태석은 인생의 무게를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무거운 모루를 등에 짊어지고 터벅터벅 걸어간다. 모루는 투박하고 단단한 그의 정서인 동시에 그런 태도 때문에 그가 얻게 된 깊은 상처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무겁다고 투덜거리거나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법 없이 묵묵히 감내한다. 아직 어리고 철없는 소녀 신영은 눈길이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고 또각거리는 하이힐을 신고 걸어가려 한다. 그녀는 그런 순진한 태도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었고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작품에서는 70년대 산업화 시대의 시작과 함께 사라져가는 태석과 그 시대를 막 살아나가려는 신영이라는 두 인물의 삶이 교차한다.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자연 속의 길들을 담아낸다. 따라서 이 영화 속에서 ‘길’은 인생의 은유로서의 의미를 갖는 동시에 배창호 감독의 말처럼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자연 속의 아름다운 길’에 대한 추억이기도 하다.

<>은 2006년의 관객에게 두 가지 의미에서 너무 늦게 도착한 작품이다. 하나는 이 작품이 제작된 지 2년이 지나도록 관객을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이 작품이 환기하는 정서가 ‘오래된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5억여원의 예산과 20여명 규모의 스탭에 의해 일궈진 알찬 성과는 현실적인 여건상 관객과 만날 ‘길’을 찾지 못해 이제야 빛을 보게 되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배창호 감독은 작은 영화로 돌아왔지만, 이 영화가 개봉되기까지 걸린 지난한 시간은 작은 영화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현재의 시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또 빠른 전개와 강한 자극에 길들여진 현재의 관객에게 이 영화는 다소 낯선 화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날카로운 ‘스텡’적 정서를 잠시 쉬게 하고, 뭉툭하고 단단한 ‘쇠’의 정서에 귀를 기울인다면 오래된 소리의 울림을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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