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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열혈남아>의 설경구
김수경 사진 오계옥 2006-11-03

<역도산>은 외로웠다. <공공의 적2>에서 강철중이 내지르는 교훈적 대사들은 공허했다. <사랑을 놓치다>의 우재의 눈빛은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중무장한 설경구가 돌아왔다. “<열혈남아>를 기점으로 내가 잃었던 뭔가를 붙들어보려고 한다”던 설경구가 연기한 <열혈남아>의 재문은 제목처럼 ‘더운 피’로 그득하다. “직업은 조폭인데 별로 싸움도 안 해. 눈에 힘도 많이 안 주고. 그런데 좀 묘해”라고 눈앞의 설경구가 말한다. <역도산> <공공의 적2>를 마무리한 그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8개월 동안 푹 쉬고 있을 때 <사랑을 놓치다>보다 <열혈남아>가 그를 먼저 찾아왔다. “아무 관계도 없는 세 사람의 관계가 일주일 만에 모두 변해버린다는 이야기야. 가슴에 뚫렸던 구멍이 메워지는 영화라고 할까. 죽이려는 상대를 바로 만났다면 후다닥 해치우면 그만인데, 죽일 놈 엄마가 중간에 딱 끼어들어서 사람도 이야기도 묘해지는 거야. 한국영화에서 그동안 못 봤던 책이더라고. 굉장히 잘 썼어”라고 설경구는 <열혈남아>와의 첫 대면을 회상했다. <사랑을 놓치다>를 작업하며 그가 몸을 추스르는 동안, 싸이더스FNH 차승재 대표와 이정범 감독은 배경을 여름에서 겨울로 바꾸면서 설경구를 고집했다. “책을 봤는데 너무 센 이야기라 바로 들어가긴 부담스러웠다. 눈에 힘을 좀 풀고 하겠다고 했는데 그들이 기다려줬다”고 그는 부연했다.

<열혈남아>의 재문은 기묘하다. 재문의 쓸쓸한 뒷모습에는 <파이란>의 강재, 무표정한 얼굴에는 <소나티네>의 무라카와(기타노 다케시)가 어른거린다. 노려보다가 피식 웃고, 그렇게 웃다가도 순식간에 살벌함이 얼굴에 번진다. 10년 만에 복수를 하기 위해 벌교로 내려가는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다. 하지만 그 운명도 오래된 원한을 떨치려는 그의 발길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형님도 건달이기 전에 사람 아닙니까?”라는 치국(조한선)의 윤리 따위는 발로 걷어차버린다. 오히려 “날씨도 쌀쌀한데 손들 다 트겠구먼”이라며 바다를 바라보는 김점심(나문희)의 무심한 일상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설경구는 “나문희 엄마가 그 느닷없는 대사를 하시는데. 어후, 그 대사가”라고 지금도 감탄한다. 설경구는 그 대사를 <열혈남아>의 백미로 꼽았다. 전날 밤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했던 남자와 갯벌을 향한 “어머니의 복잡한 심경이 대사 한줄로 집약된다”는 게 그의 설명.

배우 나문희와 극중에서 가장 많은 장면을 소화하는 설경구는 “멍하니 앉으신 모습이 그냥 그림이야. 아무것도 안 해도 슬픔이 있고, 소녀 같은 부분도 보이고, 그러면서 연기는 무섭게 하시는데 평소 모습이 묻어나”라고 전한다. 설경구의 배우관은 그렇게 일상의 자신에서 출발한다. “나문희 선생님이 없던 김점심 여사를 완벽히 창조한 게 아니야. 그건 나문희 엄마 현실에서 가져온 자기 모습이지. <주먹이 운다> <너는 내 운명>의 투박하고 툭툭 던지는 말투의 어머니랑 <열혈남아>의 김점심 여사도 겹치잖아. 김점심이 어딨어? 김점심의 실체가 어딨는데? 나문희 엄마가 현실의 자신을 갈고닦아 만든 게 김점심이야. 이를테면 감독이 현실의 누군가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재문이니까 똑같이 연기해줘’라고 한다 쳐. 그럼 나 대신 걔 데리고 영화 찍으면 되지. (웃음) 어차피 캐릭터는 배우가 자신을 바탕으로 만드는 거야. 자기 모습을 바탕으로 시작은 배우가 하는 거야. 진짜 변신한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그래.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다음에는 다른 건 연기할 게 없을 걸. 세월이 지나가면서 사람마다 조금이나마 깊이가 생기는 것뿐이겠지. 나문희 엄마라고 젊었을 때 애송이 같은 모습이 없었을까”라고 설경구는 반문한다. 그는 <박하사탕>을 찍고 극심한 콤플렉스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오죽하면 지금도 이렇게 말한다.

“불변인 게 있어. 내 대표작과 가장 고생한 영화는 <박하사탕>. 불변이야. <역도산>도 몸고생을 많이 했는데 <박하사탕>의 마음고생보다는 덜 했어. <박하사탕>은 카메라 경험도 없는데 영화를 혼자 끌고 가야 하니 죽을 맛이지. 내가 그때 배우의 에너지 같은 게 있기나 했어? 만성위염이 걸려서 난생처음 위 내시경까지 받았어. 의사가 촬영 끝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하는 말이 ‘솔직히 위암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 <박하사탕>에서 못되고, 순하고, 살벌하고 거의 모든 감정을 소화하고 나니 그 다음 영화마다 그때 모습이 계속 떠오르고 거치적거리는 거야. 한때는 그것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제는 신경 안 써. 영화마다 이야기가 새롭고, 캐릭터가 달라지는 것뿐이니까.”

설경구는 첫 테이크가 강한 배우다. 하지만 설경구가 대본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속설은 오해다. “초반 테이크, 두세 테이크가 끝나면 내 경우에는 감정이 대부분 소진되는 편이야. 그걸로 대사나 대본을 안 본다고 오해하면 안 돼. 단지 그 상황의 감정에 익숙해지는 게 싫은 거지. 자꾸 아홉, 열 테이크를 가도 다들 나중에는 초반 테이크를 쓰더라. 뭐 더 나올 줄 알고 그러는 것 같은데. (웃음)” 그가 현장에서 대본을 뒤적거리지 않는 건 계산이 끝났을 경우다. 역도산에서 일본어 대사를 원신 원컷으로 4분 넘게 하면서도 그는 현장에 대본을 갖고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만난 배우 중 가장 멋지고 오랫동안 잊지 못할 상대역”이라는 일본의 대배우 후지 다쓰야에게 “설경구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는 격찬을 끌어냈다. 설경구는 “<박하사탕>의 마지막 원신 원컷은 열 테이크를 갔지만 편집에서 붙은 건 첫 번째다. ‘워커에 물이 찍걱거려요’라고 말하는 장면도 두 번째에서 오케이였다. 내가 한번 더 가자고 해서 정리했던 장비를 다시 풀긴 했지만. <오아시스>에서 방울새 이야기 롱테이크도 첫 번째 테이크에서 끝. 테이크가 늘어나면 나는 늘어져”라고 말하는 예리한 기억력을 가졌다. 촬영방식으로 그는 원신 원컷을 선호한다. 감정 때문이다. “나는 원신 원컷이 참 재밌어. 잘라서 가는 거 너무 버거워. 감정을 다시 끌어올려야 하는 게 너무 싫고 힘들어. 감정이라는 게 빌드업이 되어야 하는데, 그걸 매번 다시 맞춰가는 게 너무 부담스러워. 슛 한다고 감정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잖아”라고 설경구는 말했다.

설경구는 종종 시나리오도 받지 않고 출연을 결정했다. 그것은 연출자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한다. “이정범 감독의 다음 작품도 그럴지 몰라” 하고 그가 거든다. <오아시스> <실미도> <공공의 적>, 지금 막바지 촬영 중인 <그 놈 목소리>가 그랬다. <그 놈 목소리>의 출연배경을 설경구는 이렇게 설명했다.

“박진표 감독에 대한 기대와 신뢰 때문이지. <죽어도 좋아!> 시사회 술자리였는데 내가 ‘하자!’ 그러니까 진표 형이 ‘진짜?’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하지, 그럼 안 해?’라고 했지. 다른 사람들은 믿지도 않지만 그게 전부야. 내가 책을 안 보고 같이 가는 경우는 두 가지야. 흥행과 상관없이 같이 작업했던 감독이나 내 입이 쩍 벌어지는 전작을 만든 감독. <죽어도 좋아!>가 그랬지. 배우 아닌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3천만원으로 5∼6명이 어울려서 저걸 찍다니 ‘이 사람 진짜 끝내준다’ 싶더라고. 같이 촬영하면서 더 좋아졌어. 일상에서는 그렇게 아기 같고 순한 사람이 현장에서 순발력은 끝내줘. 비가 와도 2∼3분 이상 당황하거나 고민 안 해. ‘그럼 비신으로 가자’고 바로 결단을 내려. 디렉션도 그래. 진표 형은 내가 ‘이거 해?’ 이러면 ‘니 맘이지, 내 맘이냐?’라고 맡겨. 그 장면의 정확한 설정만 계산하고는 배우가 편안히 놀 무대를 열어주는 거지. 카메라도 배우가 어디로 움직일지 모르니까 언제나 풀어놓은 상태야. 배우는 신나지만 녹음기사는 불안하지.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 (웃음)”

늘 “취미가 무취미”라는 설경구는 요즘 테니스에 빠졌다. “좁은 공간을 몰려다니니까 땀이 장난 아니게 흘러. 그런데 우리는 땀을 더 흘리려고 땀복을 입고 해. 프로야구 선수들이 입는 바람 안 통하는 그거. 그렇게 입고 뛰면 반바지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고 반바지가 다 젖어. 그때 기분이 최고야, 최고”라는 설경구가 보여준 ‘괴물’ 같은 연기는 그렇게 땀으로 새겨졌다. 십수킬로그램을 늘렸다 줄이기를 반복하고, 작품마다 올림픽에 나갈 듯 반년씩 훈련을 받으면서도 “내가 영화를 안 했으면 운동도 안 했을 테고, 그럼 지금쯤 돼지처럼 살쪘을 거야”라고 여기는 설경구는 <열혈남아>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넘나드는 건달 재문 역으로 예전의 기세를 되찾았다. <그 놈 목소리>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찾아 헤매는 앵커 한경배는 그의 진면목을 보여줄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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