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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퀴어영화 <후회하지 않아> [2]
오정연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6-11-14
<후회하지 않아>는 독립장편영화?

적어도 2005년 12월 초 방문한 촬영현장의 상황으로는 그랬다. 애초의 제목이었던 <야만의 밤>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처절함이 거기 있었다. 연일 최저기온을 경신하던 겨울의 혹독한 초입이었고, 해가 지고 나면 사방에 불빛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야산에서 배우며 스탭들이 주섬주섬 땔감을 찾아 피워올린 모닥불이 유일한 난방도구였다. 늦여름 혹은 초가을의 태풍을 배경으로 하는 그날의 촬영분량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었지만, 수십명의 ‘강풍기 후원단’의 모금으로 마련한 강풍기는 드넓은 프레임에 광기어린 바람을 불어넣기엔 역부족이었다. 일주일은 족히 찍어야 하는 장면을 이틀 만에 마쳐야 했는데, 마지막 날에는 거짓말 같은 폭설이 온 산을 뒤덮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치우던 끝에 결국은 전날 찍은 장면을 다시 찍어야 했다. 정상적인 사고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컷 수를 줄이고 악천후를 극복하느라 고심하던 제작진은 아래 위로 대여섯겹씩 중무장을 하고도 정신적·육체적 한기에 시달렸고, 가을 옷차림으로 이리저리 굴러야 했던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끝내 떠오르는 야속한 태양을 바라보며 모든 촬영을 접어야 했던 이송희일 감독은 “정말 울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야만의 밤>이라는 제목은, 단신 기사로 실린 ‘충격 실화’를 끌어들여 장르의 반전과 극단의 통속성을 한꺼번에 끌어들인 그 결말을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편집을 거치면서 영화 제목은 <후회하지 않아>로 바뀌었다. 애초 구상한 대로 찍어내지 못한 화면은 어디로 보나 ‘야만의 밤’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상과 여건이 충돌하는 그런 상황이 촬영 내내 반복됐다는 점이다.

눈과 강풍의 야만의 밤

장편독립영화가 개봉하는 것은 이제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제작부터 개봉까지 전체적인 공정은 여전히 열악하다. DV로 촬영하여 디지털로 영사하는 탓에 많은 개봉관에서 관객을 만나지 못하는 <후회하지 않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송희일 감독이 청년필름에서 준비하던 장편영화 준비가 무한정 늦춰지면서 김조광수 대표는 “놀면 뭐 하나, 영화나 찍지”라며 저예산 디지털영화의 연출을 제안했고, (옴니버스 장편 <동백꽃>을 제외하면) 꽤나 오랫동안 영화를 찍지 못한 감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미 충무로에서 <분홍신> 등 3편의 상업 장편영화를 만든 제작사였지만 본격 퀴어멜로를 진지하게 표방하는 영화의 제작비를 구하는 것이 쉬웠을 리 없다. 게다가 제작자가 나서서 “시나리오가 너무 대중적인 타협 아니냐”고 딴죽를 거는 상황이니, 독립영화의 낙인을 애써 자청한 격이다. ‘러닝 개런티’를 조건으로 감독 이하 모든 스탭들에게 똑같은 금액이 지급된 개런티는 가히 파격적이었지만, 케이블 방영권 판매를 시작으로 마련된 제작비는 언제나 아쉬웠다.

제작비 마련부터 캐스팅까지, 산 넘어 산

계급 차이로 갈등하는 동성 커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강도 높은 섹스신까지 포함하고 있는 탓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던 캐스팅도 암담하긴 마찬가지였다. <굿 로맨스>에서 열다섯살 연상의 연인을 평범하게 사랑하는 모습이 그저 풋풋했던 배우 이영훈의 출연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수민 역할로 염두에 둔 탓에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공장 노동자에서 호스트바 ‘선수’로 전락하는 수민을 사랑하게 되는 재벌 2세 재민의 캐스팅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웬만한 배우들이 모두 손을 내젓는 상황에서 <굳세어라 금순아> 등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한이 수민 역을 탐내며 관심을 보였다. 공장에서 뛰쳐나온 수민이 향하게 되는 호스트바의 마담(정승길), 수민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가람(김동욱),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남자에게 몸을 파는 정태(조현철) 등 주연급 조연들은 재민을 염두에 둔 오디션, 감독의 전작의 인연 등으로 캐스팅이 성사됐다. 그나마 이성애자여서 캐스팅이 쉬울 줄 알았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정태 역의 조현철은 언제나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감독에게 특별 ‘욕 교습’을 받은 끝에 촬영에 임했고, 다소 음울한 영화 속에 활력을 집어넣을 만한 캐릭터이자 감독의 술취한 모습을 적극 반영한 정 마담을 연기한 정승길은 빛나는 애드리브로 보는 이를 즐겁게 했다.

영화광 혹은 동인녀, ‘후회폐인’은 누구?

지난 10월21일 청년필름 사무실에 화환이 배달됐다. 차이밍량 등의 영화를 배급한 포르티시모와 <후회하지 않아>의 해외배급을 맡게 되었음을 축하하기 위해 영화의 팬카페 회원들이 보내온 선물이었다. 이들은 부산 팬미팅을 성사시켰고 서울과 대구 팬미팅을 앞두고 있다. 참가비 일만원. 개봉을 앞두고 각종 인터뷰에 임하느라 바쁜 주연배우나 감독은 불참했고, 김조광수 대표만이 참가한 조촐한 이 모임은 규모와 성격 면에서 일반적인 팬미팅과는 사뭇 다르다. 부산영화제 기간 중 영화를 관람한 관객이 직접 만든 팬카페 회원은 11월1일 현재 569명. 수치상으로는 부산에서 영화를 미리 본 관객 600명 거의 전부가 카페에 가입한 셈이지만, 영화를 미처 보지 않고 입소문을 통해 팬이 된 이들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대대적인 마케팅이 불가능한 현실을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들은 현재 자비를 들여 휴대폰 고리 및 캐릭터 버튼을 제작 중이다.

퀴어영화의 새로운 주체, 동인녀

사실 개봉을 코앞에 둔 <후회하지 않아>를 둘러싼 가장 놀라움 중 하나는 일반 관객, 심지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예비 관객이 보여준 반응이다. 절대적으로 많은 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예상 밖의 뜨거운 반응인 것은 분명하다. 부산영화제에서 돌아온 이송희일 감독은 “아직도 그 열렬한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당황하기도 했다. ‘야오이’(꽃미남 게이를 소재로 한 소설, 만화 등을 즐기는 동인) 문화가 동성애를 소비하는 것에 그친다는 생각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게이멜로에 열광하는 이른바 ‘동인녀’에 대해서 좀더 깊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억압된 여성 포르노의 복수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도 내 영화를 해석하는 적극적인 주체가 생겼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각종 뉴스를 통해 팬이 되었고, 온라인상에서 정보들을 수집하며 영화를 기다렸다는 문하늬(20)씨는 지난 10월31일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본 뒤 “<토탈 이클립스> <해피 투게더> <로드무비> 등 그동안 선보였던 퀴어무비들이 심오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이야기했다면, 이 영화는 대담하고 직설적이고 솔직하다”며 들뜬 애정을 고백했다. 만화를 통해 동인녀 생활을 시작했고, “가족의 지지와 인정하에” 당당하게 퀴어물을 접한다는 그는 영화가 개봉하면 주위 사람들과 함께 기꺼이 극장을 찾을 계획이다.

왕남폐인 부럽지 않은 후회폐인

그러나 개봉을 앞둔 저예산영화를 향한 그러한 생생한 관심을 단지 취향과 취미에 국한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예전에 제작했던 <질투는 나의 힘>도 좋아해주시는 분이 많았지만 다들 개인적으로 그 애정을 고백했다면, <후회하지 않아>는 다르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렇게 반응해주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다”는 김조광수 대표에 따르면 팬미팅에 참가하고 팬카페에서 활동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마이 제너레이션> 등의 독립장편영화를 지지했거나 작은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평범한 영화광이기도 하다. 평소 <메종 드 히미코> 등의 영화를 즐겨본다는 팬카페 시솝 이주랑(23)씨는 우연히 이송희일 감독의 홈페이지를 알게 된 뒤 <후회하지 않아>를 보기 위해 부산영화제를 찾았다며 진지하게 덧붙인다. “감독님은 계속 편집이 서툴렀다고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작품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운 게 없다. 가장 우려가 되는 것은 오히려 배급 상황이다. CGV 관계자분께 꼭 전해달라. 우리가 반드시 돈 벌게 해드릴 테니까 개봉관 넓혀달라고.” 매일매일 배급이며 홍보를 생각한다는 그는 걱정스러운 한편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1천만 관객의 주역인 ‘왕남폐인’이 부럽지 않은 ‘후회폐인’이다.

포털사이트 영화검색 1위

지난 11월1일. 김광수 대표는 <후회하지 않아>가 포털사이트 영화검색 1위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한편의 영화 속 서로 다른 장면을 주목하고 그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이들, 그러나 이전까지 이송희일 감독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 덕이다. “나도 저런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성애 멜로라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사랑 말이다.”(이주랑) “평소 즐겨보는 동인만화의 스토리처럼 이 영화도 사실 흔하디 흔한 이야기지만 굉장히 솔직하기 때문에 좋아한다. 원래 내가 은근슬쩍 넘어가는 건 싫어한다. (웃음) 아름다운 젊은 두 남자가 서로 사랑하는 장면들도 너무 좋다. 솔직히 못생긴 배불뚝이 아저씨들이 나왔다면 이 정도로 좋아하진 않았을 거다. (웃음)”(문하늬) 고향을 떠나며, 사랑하는 이와 관계를 나눈 직후, 혹은 자신을 외면한 사랑하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홀로 눈물을 글썽이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남자들에 열광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분명한 것은 그 대상이 한국 상업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강한 척하는 마초들이 아니며, 제대로 바라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사회적 소수자라는 점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것만으로도 새롭다. 개봉을 앞둔 영화를 둘러싼 기이한 열광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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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