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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코시즈의 작품세계 [2]

리메이크, 스코시즈식 삶의 조건과 인물관계로의 변형작업

자, 이제 현재로 돌아오자. 그리고 리메이크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오래전, 프랑스 영화감독 베르트랑 타베르니에가 당신이라면 줄스 다신의 필름누아르 <밤과 도시>를 리메이크해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부추겼을 때 스코시즈는 리메이크에는 흥미가 없다는 말로 일축했다. 다른 자리에서도 자신은 리메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디파티드>는 스코시즈의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리메이크 작품이다. 첫 번째는 <케이프 피어>다. 스코시즈와 미국의 언론들조차 이걸 말하는 데 소홀한 건 의아한 일이다. 어쨌거나 스코시즈가 <케이프 피어>를 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결국 스필버그가 완성하게 된 <쉰들러 리스트>를 애초 영화화하기로 결정했던 것은 스코시즈였다. 하지만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의 연출 의사를 밝히면서 그는 자신이 할 예정이었던 <케이프 피어> 프로젝트를 스코시즈에게 미뤘고, 로버트 드 니로가 그걸 같이 하자고 나서자, 스코시즈는 과거 자신이 <예수의 마지막 유혹>을 만들면서 심적, 재정적 부담을 안겼던 제작사 유니버설에 대한 미안함이 생각나 그냥 수락하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 스코시즈가 리메이크에 전혀 관심을 쏟지 않은 것은 아니다. <카지노>를 끝낸 직후 그의 머릿속에 있던 몇몇 프로젝트 중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 리메이크 작업이 있었고, 얼마 전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주인공으로 역시 구로사와 아키라의 <주정뱅이 천사>를 리메이크 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스코시즈의 91년작 <케이프 피어>가 J. 리 톰슨의 62년작 <케이프 피어>와 가장 다른 건 선과 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는 점이다. 선과 악이 결투를 벌여 선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악과 악이 싸워 더 질기게 살아남는 악이 주인이 된다는 것으로 스코시즈는 바꾸었다. <케이프 피어>도 그랬지만 서로 얽혀 있는 두 남자의 폐쇄회로 같은 관계, 즉 <무간도>의 주인공들의 삶의 조건이 스코시즈에게는 충분히 관심거리였을 것이다. 게다가 한발 더 나아가 서로의 동료이자 걸림돌인 두 사내라는 이자적 구도는 <비열한 거리>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스코시즈 인물 관계의 핵심 모형이다.

<무간도>의 의리를 치환한 <디파티드>의 운명의 조건

<디파티드>는 <무간도> 세편의 시리즈 중 거의 1편만을 참조한 듯하고, 장소를 홍콩에서 보스턴 남부(각본가 윌리엄 모나한이 이곳 출신이고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로 옮겼을 뿐 갱단이 키운 하수인이 경찰 간부가 되고, 정부가 투입한 잠입경찰이 갱이 되어 서로 정보를 캐낸다는 설정의 큰 틀은 유사하다. 양조위가 했던 진영인 역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하고, 유덕화가 했던 유 반장 역을 맷 데이먼이 한다. 디카프리오의 극중 이름은 빌리이고, 맷 데이먼의 이름은 콜린이다. 그리고 증지위가 했던 한침 역에 해당하는 코스텔로 역을 잭 니콜슨이 한다. 그렇지만 잭 니콜슨이 맡은 역할은 <무간도>의 한침보다 훨씬 악독할 뿐 아니라 관계에서도 더 큰 방점이다. 빌리도 콜린도 모두 그와 중요한 관계가 있다.

스코시즈는 윌리엄 모나한이 쓴 각본을 본 뒤에 이것이 원작과는 다른 영화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시작했다고 말한다. <디파티드>를 만들면서 원작과의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는 그의 말처럼 중요한 차이들이 꽤 있다. 그 차이들을 생각해보는 게 <디파티드>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표지판이 될 듯싶다.

<무간도>는 무엇보다 갱들의 에픽이다. 갱들의 에픽 중 가장 저명한 것은 <대부> 시리즈다. 심지어 마피아가 <대부> 시리즈를 보고 자기들 생활의 본보기로 삼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더 할 말이 없다. <대부>는 일종의 신화이고, <무간도>는 본격적으로 그 신화성을 참조했다. 여기에 비해 <디파티드>는 신화적 요소를 말끔히 제거한다. <무간도>가 무간 지옥에 관한 웅장한 설명으로 시작하는 대신, <디파티드>는 길거리 싸움과 갈등을 담은 다큐멘터리 화면, 그리고 코스텔로 역을 맡고 있는 잭 니콜슨의 보이스 오버로 날렵하게 오프닝을 연다. 스코시즈는 자신의 영화와 코폴라의 영화를 비교한 적이 있는데, <대부>보다 <대부2>를 더 좋아한다면서 “<대부2>는 마치 <아더 왕의 죽음> 같은 것에 비견할 만한 서사시다. 내 영화는 이에 비하면 일종의 길거리 다큐멘터리와 비슷하다”고 <좋은 친구들>을 설명했다. 그건 정확하게 <무간도>와 <디파티드>의 차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코스텔로는 “나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한다”고 (스코시즈 영화의 많은 인물들이 그렇듯 착각 속에) 말한다. 그는 쉼없이 교회와 자신의 위치를 비교하며 거리의 제왕인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강조한다. 코스텔로는 기껏해야 거리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갱이면서도, 자신을 신적인 존재 혹은 초인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그런 그의 모습을 그의 보이스 오버를 통해 한껏 부각한다.

그런데 코스텔로의 그 건방과 거드름이 <무간도>를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떤 지점을 푸는 열쇠가 된다. 그러니까 <무간도>를 보는 내내 이해하기 힘든 점이 한 가지 있다. 왜 유 반장은 한침과 다른 길을 갈 만한 힘을 지녔는데도 저토록 오래 끌려다니는가 하는 것이다. 유 반장이 한침을 제거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무간도>는 그 궁금증을 초반부 한침이 수하들을 모아놓고 하는 말에 따라 ‘영웅의식과 의리’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만든다. 그러나 스코시즈는 그것이 영웅의식이 아닌 삶의 비열한 절대조건에 따른 것이라고 바꿔 설정한다. 그 조건이란 양육에 대한 지원에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관계다.

<디파티드>, 기독교적 심판의 누아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코스텔로는 소년 콜린 설리반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주며 먹을 것을 사주고 돈을 쥐어주고 코믹북도 하나 얹어준다. 그러면서 돈을 벌고 싶으면 자기를 찾아오라고 한다. 그 순간 가난한 소년의 눈에는 코스텔로가 분명 신으로 보였을 것이다. (갱의 길을 걸은 스코시즈의 다른 영화 속 소년을 생각해보면) 그 뒤로도 코스텔로의 지원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소년은 갱이 ‘되기로’ 굳게 결심했을 것이다. 아니, 피할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린 콜린 설리반이 코스텔로에게 동전 몇개를 받아드는 순간이 바로 그의 삶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장면이 없지만 빌리도 사실 같은 조건에 놓여 있다. 가령 빌리가 경찰 신분을 속이고 보스턴 남부 거리로 들어갔을 때 하나같이 그를 두고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네 삼촌이 누구인지 알고, 네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면 영화가 흥미로워진다. 그건, 빌리가 잠복 경찰이 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무간도>에서 진영인이 잠복 경찰이 된 것은 그가 누구보다 뛰어나고 공직에 적합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경찰직에서 가장 훌륭한 요원이 할 수 있는 일을 그가 한다. 그러나 빌리의 상황은 다르다. 빌리는 경찰학교에서 싸움을 일으켜 퇴학당하는 인물이다. 필기시험 능력이 좋은 것이 근거가 되어 다시 경찰학교로 불려오지만, 빌리에게 임무를 맡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빌리의 ‘출신 성분’이 더 큰 요인이다. 빌리는 어쩔 수 없이 보스턴 남부 거리 출신이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곳에 간다. “네가 경찰이 되고 싶으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명령에 떠밀려가는 것이다. 빌리도 콜린처럼 이 거리에서 자랐지만 콜린이 코스텔로의 힘을 빌려 경찰 행세를 하게 되는 동안, 경찰이 되려던 그는 결국 갱의 행세를 하게 된다. 콜린이 아니라 빌리가 코스텔로를 만났으면 입장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경찰이 되고 싶은 콜린도 코스텔로의 협박에 못 이겨 끝내 되지 못한다. 빌리와 콜린은 그러므로 크게 다르지 않다. <무간도>도 사실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만, <디파티드>는 두 주인공 모두 코스텔로라는 하나의 유사 아버지를 갖게 함으로써 그 관계를 더 명확하게 만든다. 빌리는 코스텔로의 수하로 들어가고, 코스텔로의 수하인 콜린은 경찰 요직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들이 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다만 갱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스코시즈는 경찰을 그의 주인공으로 다룬 적이 없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디파티드>도 그 예에 속한다. 말하자면, <무간도>가 영웅의식과 의리를 겸비한 갱들의 신화라면, <디파티드>는 경찰이 되고 싶은 갱들이 그냥 갱으로 남는 이야기다. <디파티드>의 주인공들을 둘러싼 모든 것은 그저 비열하기만 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코스텔로는 그 끝을 보여주면서 이 영화의 성격을 <무간도>에서 멀리 떼어낸다. 영화는 <무간도>가 취했던 사각의 구조(유 반장에게는 한침, 진영인에게는 황 국장)를 끊어버리고 둘 모두 코스텔로라는 외압의 우산 아래 있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들의 마지막이 당연히 궁금해질 텐데, 당연히 <디파티드>는 다른 결말을 가져온다. 그 방식이 좀 심드렁하긴 하지만 어쨌든 스코시즈는 자기 식대로 끝낸다.

누아르, 이런 말이 <디파티드>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무간도>가 표방한 것이니 따르자면, <무간도>는 불교적 윤회의 누아르이고 <디파티드>는 기독교적 심판의 누아르다. 스코시즈는 일전에 예수뿐만 아니라 달라이 라마에 대한 전기영화 <쿤둔>을 만든 적이 있다. 그때 스코시즈의 태도는 외부자가 할 수 있는 어떤 존경이었다. 그는 불교를 육체와 영혼의 투쟁의 장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의 가톨릭적 종교 안으로 들어오면 그 화두는 곧장 치열한 길거리에서의 고뇌가 된다. 스코시즈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누아르영화 중 하나인 에이브러햄 폴란스키의 <악의 힘>에 관련되어 나온 책 서문에 “이 영화는 정치적일 뿐 아니라 실존적인 비전이다”라고 썼는데, 이 말을 바꿔 우리는 스코시즈의 <디파티드>에 관해 “이 영화는 종교적일 뿐 아니라 세속적인 비전이다”라고 맺는 것이 가능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영화의 길

그러고 나서 스코시즈의 고백을 듣는다. “사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당신은 위대한 감독입니다’라고 말할 때는 정말 난감합니다… 중략… 우리는(브라이언 드 팔마와 스코시즈) 다만 살아남으려 애를 쓸 뿐입니다. 수위가 높아지면 물에 빠지기도 하고 다시 수위가 내려가면 한숨 돌리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스코시즈는 언젠가 그런 말을 했다. 그리고 근래에 <디파티드>를 끝내고는 “(할리우드에) 더이상 나를 위한 자리가 있는지, 내가 만들고 싶어하는 영화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아마도 이 말이 스코시즈의 이야기에 대한 마지막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스코시즈는 최근 몇년간 뚜렷한 수작을 만들어낸 경우가 없다. 95년작 <카지노> 이후 그보다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에비에이터>와 <갱스 오브 뉴욕>은 대작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의 것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하고, 그의 야심에 비한다면 모자란 부분이 많다. 더러는 그 영화 속에 담긴 생각에 동의 못할 부분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할리우드 시스템의 안팎을 들락거리며,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번갈아가며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면 경이롭다. 다시 말해도 그가 미국영화의 살아 있는 한 페이지인 것만은 사실이다. 올해 그가 아카데미 단상에 오를지는 모를 일이다. 사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겠나. 아카데미가 감독상을 주거나 말거나 스코시즈는 종교와 바꾼 영화의 교당에서 영원히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스코시즈는 지금도 그렇게 끝나지 않을 영화의 길을 가고 있다. 끝없이 헤매거나, 곤두박질치면서. 그의 이야기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2006년 현재 발표된 마틴 스코시즈의 프로젝트는 다큐멘터리 2편, 극영화 2편이다. 그중 다큐멘터리는 롤링 스톤스에 대한 것과 <에어버스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는 성당 건립 및 제트 여객기 제작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편의 극영화 중 하나가 미국 대통령이 되기 전 청년 루스벨트에 대한 것이고, 그 나머지 하나는 스코시즈가 <갱스 오브 뉴욕>만큼이나 오랫동안 “나의 다음 차기작이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던 엔도 수사쿠의 소설 <사일런스>, 17세기 일본으로 들어간 포르투갈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다. 몇 십년간 묵혔던 소재를 거듭 다시 파내는 걸 보면 스코시즈의 강박도 그가 다루는 인물들의 그것에 못지않다.

스코시즈 감독의 두 페르소나, 드 니로 vs 디카프리오

자기 파멸적 인간형과 야누스적 인간형

마틴 스코시즈가 처음 자기의 페르소나로 점찍었던 건 로버트 드 니로가 아니라 하비 카이틀이었다. 첫 번째 장편 <내 문을 두드리는 자는 누구인가?>의 주인공이 그였다. 로버트 드 니로를 처음 발굴한 건 <그리팅스>와 <하이 맘>의 브라이언 드 팔마였다. 마틴 스코시즈와 로버트 드 니로가 1970년 크리스마스에 처음 만난 것도 브라이언 드 팔마의 소개 덕이었다. 하지만 이후 로버트 드 니로는 말 그대로 스코시즈 영화의 얼굴로 자리잡았다. <비열한 거리>에서 자니 보이로 등장한 이후, <택시 드라이버> <뉴욕, 뉴욕> <분노의 주먹> <코미디의 왕>까지 내리 4편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상연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끝점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90년에 다시 돌아와서는 <좋은 친구들> <케이프 피어> 그리고 <카지노>까지 출연하면서 그가 스코시즈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작품은 총 8편이나 되었다. 그는 스코시즈가 영화를 구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배우였다. 그래서 그를 두고 스코시즈는 “나와 같은 세계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며 지대한 동질감을 과시한다. 로버트 드 니로의 연출작 <더 굿 셰퍼드>의 일정이 아니었다면, <디파티드>에서 잭 니콜슨이 맡은 코스텔로 역은 드 니로가 했을 것이라고 한다.

스코시즈에게 제2의 로버트 드 니로가 된 것은 놀랍게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 <디스 보이스 라이프>에서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출연하면서 드 니로의 출연작을 섭렵했던 디카프리오가 스코시즈의 영화를 보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게 해서 스코시즈의 영화에 존경을 품게 된 소년은 <갱스 오브 뉴욕> <에비에이터> <디파티드>까지 연이어 세 작품째 같이하고 있다. 그는 명실상부한 스코시즈의 신세기 페르소나다. 젊은 시절의 드 니로가 자기 파멸적 인간형의 대가였다면, 디카프리오는 야성과 유약함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야누스적 인간형이다. 그래서 스코시즈는 디카프리오의 얼굴을 두고 “도덕적 투쟁의 싸움터”라고 부르면서, “그의 눈을 통해 나오는 그 고통. 그는 꼭 몽고메리 클리프트나 폴 뉴먼 같다”고 찬사를 보낸다. 디카프리오는 스코시즈의 차기작 중 하나인 <더 라이즈 오브 테오도르 루스벨트>에서도 청년 루스벨트 역을 맡아 네 번째 출연을 약속했다. 오래전 <비열한 거리>의 각본가 마딕 마틴은 하비 카이틀과 로버트 드 니로를 두고 “스코시즈의 양면”이라고 했는데, 지금에 이르고 보니 로버트 드 니로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그 말에 더 어울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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