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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욱의 현장기행] 스폰지 조성규 대표가 걷는 길 [2]

10.26 15:00 <아주 특별한 손님> 예고편 제작 회의

와인시장은 한국영화에서도 가능할까?

26일 오후 3시께 용이 감독이 도착하자 <아주 특별한 손님> 예고편 제작 회의가 소집된다. 다른 한쪽에선 막 촬영을 마친 황규덕 감독의 <별빛 속으로> 후반작업이 나직히 진행 중이다. 이튿날에는 또 다른 저예산 프로젝트 <열아홉 수아>의 캐스팅 회의가 기다리고 있다. 모두 스폰지가 투자하고 개봉을 책임진 한국영화들이다. ‘고개 숙인 업자’ 대열에서 탈출하기 위한 고육지책? 은근슬쩍 계산이 빠른 조 오빠가 이미지 때문에 한국영화 제작을, 그것도 아직 답이 나오지 않는 저예산영화에 덜컥 손을 댈 리 없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지만, 그 한 가지는 작고 예쁜 외화의 수익모델을 안착시킨 전례다.

“(스폰지가 수입·배급한 외화) 시장 자체가 좋아질 수밖에 없는 게 와인시장을 닮았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가 완전히 선진국이 된 것도 아니고 소득 수준이 계속 높아질 텐데, 5~10년 앞을 보면 답이 나오죠. (스폰지의 성공을) 전혀 예상 못한 현상으로 보는 게 오히려 난센스라고 봐요. 문제는 <귀향>을 보는 젊은 관객이 <길>을 절대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류 감독이 5~10억원으로 좀더 편하게 만들면 인디시장이 달라질 텐데….”

<아주 특별한 손님> 예고편 회의가 시작됐다. 워낙 저예산영화라 예고편에 삽입할 곡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부터 문제다. 일단, 예고편 소스를 새로 연출해 찍기로 결정했다.

“제가 새로운 기법을 개발한 게 있는데요. 초당 9프레임으로 연속촬영해서….”(용이 감독) “정말요? 부디 저희를 실험용으로 써주세요. 근데 하려면 빨리 해야 해요. 개봉이 얼마 안 남아서….”(조 오빠) “음악은 어떻게 하죠? 보통 최하 저작권료가 1천만원이던데. <파랑주의보> 때 <데스페라도>를 쓰려고 했더니 3억원 달라고 해서 포기한 적도 있어요.”(용이 감독) “최대한 저렴한 곡으로… 아니면 저랑 친한 음악가들이 있는데 OOO 혹은 OOOOO. 또 OO 밴드의 OOO가 솔로하려고 만든 음악 중에 괜찮은 것들이 꽤 많아요. 뭔가 울림이 있더라고요.”(조 오빠) “음악은 좀더 생각해보죠. 아무튼 예고편은 9천9백에(9900만원) 맞춰서 올게요. (웃음)” “9천9백요? 그냥 판권 드릴게요. (좌중 폭소) 수금은 제가 해드리고요.”

10.27 12:00 <열세살 수아> 제작 회의

속전속결 게릴라식 일 처리

다음날 정오, 민규동 감독의 동생 민진수가 대표로 있는 수필름 일행이 몰려왔다. 칸에서 신인감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혜택으로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세계 각국의 감독 지망생들과 반년 가까이 지내고 온 김희정 감독의 장편데뷔작 <열세살 수아>(가제) 제작 회의다. 용이 감독의 예고편 회의 때 음악 저작권료가 걸리더니 이번에는 캐스팅이다.

“어젯밤 꿈에 배우가 나타나 희망적인 말을 해주데요. 엄마 역할의 OOO는 이달 말까지 가부를 결정해준다고 합니다. 판타지 장면에서 가수 OOO 또는 가수 OOO의 특별출연을 고려 중인데 어때요?”(민 대표) “가수 OOO는 엄마 역도 좋을 듯한데요.”(조 오빠) “항상 뛰어넘으셔….”(민 대표) “여기 감독님 계시지만, 우리나라 관객은 감독이나 배우에 대한 충성도가 워낙 낮고, 좋아하는 이야기나 소재를 좇아가는 것 같아요. <별빛 속으로> 때 보니까 주연급은 배우들이 돈을 따지지 않더군요. 작품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조 오빠) “엄마 역도 그렇고 직접 만나보고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요. 엄마의 상대남자 역으로 다들 찬성하는 OOO 소속사 대표가 실은 제 친군데….”(김희정 감독) “그럼 빨리 만나셔야죠.”(민 대표)

회의 중간에 조 오빠가 약을 찾는다. 아스피린을 삼키며 “그냥 견디려고 했는데 도저히…” 하는 조 대표의 표정이 밝지 않다. 그렇지만 빠른 말투로 끊임없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 ‘버릇’은 숨을 죽이지 않았다.

“(거론된 후보자들 중에) OOO, OOO, OOO의 3자 구도로 가면 예산 다시 짜도 됩니다. 제작비를 더 높여도 된다는 거죠.”

민 대표의 표정이 환해진다. 조 오빠는 모든 판단이 속전속결이다. 이야기가 끝나자 서류 가져왔냐며 공동제작 조인식을 바로 해치워버린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 조 오빠는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하지만 늘 길게 늘어서 있는 스케줄을 보면 불가피해 보인다. 이날 저녁까지 해야 할 일정만 봐도, <아주 특별한 손님> 예고편 후속 제작회의, 인도영화제 기획회의, 연말연초의 스폰지영화제 회의, <다케시즈> 개봉 연기로 인한 대체 개봉작 회의, 높은 가격에 계약한 <바벨>의 국내 투자 파트너 미팅 등이 줄섰다.

11.1 16:00 AFM 점검 회의

신의성실의 말을 부탁해

11월1일 오후 4시, AFM 출국 하루 전의 최종 회의를 보러갔더니 뜻밖의 비보가 기다렸다. 조 오빠가 급속히 나빠진 건강 때문에 출장을 포기했다. 엊그제 피 검사를 했고 이날 아침 그 결과를 보러가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병원 가는 걸 빼먹어버린 상태였다. “괜찮아요. 그냥 스트레스 때문이에요.” ‘일과 노는 것 구분없이’라는 게 그의 사훈인데, 정작 자신에게는 노는 것조차 일이 돼버린 탓일까. 조 오빠가 빠지게 된 터라 샌타모니카에서 열리는 AFM 미팅이나 시사는 모두 송 대리 몫이 됐다. 일정표를 보니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정확히 30분 간격으로 약속이 잡혀 있다. 빈칸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무서운 일정이 아닐 수 없다. AFM 점검 회의가 시작됐다. 송 대리의 첫 질문이 뜻밖이다.

“공항에서 샌타모니카까지 택시를 탈까요? 버스를 탈까요?”

농담이 아니다. 경비를 최대한 줄이겠다는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실은 구매 목표가 8편으로 좁혀진데다 물밑작업도 할 만큼 해놓은 상태라 여유가 있는 거였다.

“사람들이 나 왜 안 왔냐고 물으면 아파서 그랬다고 하지 말고 다양성 펀드 지원 등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랬다고 해줘.”

구매 순위 6위에 올라 있는 <더 퀸>(감독 스티븐 프리어스)의 제안 가격을 본 조은운 대표가 폭소를 터뜨린다.

“<더 퀸>을 이 가격에 살 수 있겠어? 그리고 꼭 사야 해?” “일단 사는 쪽으로 해보자고. 구스 반 산트 것도 별다른 정보는 없지만 꼭 사는 쪽으로 하고. 알랭 레네 신작은 토론토에서 보긴 봤는데… 누군가 적극 나서면 그냥 양보하고. 그게 아니면 한번 타진해보고.”

송 대리 혼자 보내고 조 오빠가 푹 쉬겠다는 건 아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00000>의 매듭이 자꾸 지연되자 AFM 기간 중 조 오빠가 일본으로 1박2일 출장을 가서 결판짓고 오겠다는 계획을 잡아놓았다. 마지막으로 송 대리에게 전하는 말은 꼭 전하지 않아도 되나 ‘신의성실’의 관계를 위한 첨언이었다. 올해 칸에서 대담한 성적 이야기에다 완성도로 화제가 됐던 <숏버스>에 관한 것이었다. 내년 초 <숏버스> 개봉을 계획하고 있는데 제한상영가 등급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었다.

“포르티시모의 위니를 만나면 <숏버스>가 혹시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더라도(이럴 경우 계약금은 돌려받기로 한 모양이었지만) 삭제하거나 모자이크해서 개봉할 생각은 없고, 다른 방식의 개봉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해줘. 다만 DVD와 VHS는 모자이크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고.”

11.2 15:00 <아주 특별한 손님> 예고편 촬영장

노는 듯 일하는 조 오빠

다음날인 11월2일 오후 3시, <아주 특별한 손님>의 예고편 촬영장을 조 오빠가 찾아갔다. 용이 감독이 오후, 늦은 밤, 새벽까지 세 차례로 나눠 찍는 현장이었는데 조 오빠는 나들이 나온 듯 홀가분한 표정이다. 대부분의 촬영장이 그렇지만 현장에서의 제작자는 지켜볼 뿐 끼어들지 않는다. 이날도 병원을 건너뛰었다.

<아주 특별한 손님> 예고편 제작현장

“이번 주말에 친구 김C가 어렵게 휴가를 얻어 아내와 제주도로 놀러간다고 나보고 쉬러 오래요. 예전에도 같이 휴가간 적 있거든요. 비행기를 알아봤는데 목요일인데 벌써 좌석이 없네요, 글쎄.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좀 쉬고 싶긴 했는데….”

김C와는 정말 절친해 보였다. 배창호 감독과 뒤풀이를 가졌던 일본 주점의 한 모퉁이에 김C가 뒤따라왔던 게 떠올랐다. 더불어 김C와 친한 윤도현과 그의 아내까지. 조 오빠의 입이 한번 열리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제 신조가 노는 듯 일하는 거잖아요. 사람들 관계도 그래요. 용이 감독하고 친해서 예고편 제작을 함께하게 됐지, 예고편 제작에 그가 탁월하더라 그러니 해보자해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김태용, 민규동 감독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자꾸 한국영화 제작과 관련을 맺게 되고. 해외로 치면 이누도 잇신 감독이나 프랑수아 오종이 그래요. 친해져서 계속 만나지만 만날 술만 먹을 수 없으니까 일을 도모하게 되고… 제가 하는 방식이 이래요.”

10월26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두 번째 재개봉날, 그가 오정완 영화사 봄 대표와 함께 스폰지하우스를 찾아온 게 기억이 났다. 조 오빠야 조제 마니아들에게 인사말을 하기 위한 행보였고, 오 대표는 그저 스폰지 영화가 좋다며 요즘 잘 어울리는 조 오빠와 동행했던 거였다. 조 오빠는 <귀향>을 보러와준 오 대표를 영화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에필로그

11월8일 오후 5시 스폰지 회의실 탁자에 전리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AFM에서 돌아오자마자 회사부터 들른 송 대리가 팜플릿과 서류를 풀어놓고 보고를 막 마친 참이었다. 목표로 삼았던 8편 중에 7편은 구매를 끝냈고, 1편이 미지수였으며, 알쏭달쏭했던 알랭 레네의 신작을 추가로 샀다.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내니 다이어리>와 키라 나이틀리, 린제이 로한의 <우리 생애 최고의 시간>은 내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지켜봐야 할 영화로 숙제처럼 남겨두기로 했다. 그 사이 일본을 다녀온 조 대표는 문제의 <00000> 거래를 90% 매듭지었다고 했다. 더불어 일본의 신흥 메이저 가도카와쪽과 일본 소설 판권 구매(당연히 벌써 판권이 팔렸으리라 생각했던 작품이었다고) 및 한국에서의 리메이크에 관한 협의를 시작했고, 합작을 모색 중인 감독과도 만날 수 있었다며 뿌듯해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영화를 사들이고 1~2주 간격으로 개봉을 이어가는 건 스폰지의 숙명인 듯싶다. 한 작품이 망한다고 회사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지만, 한방의 대박도 없다. 보는 사람만 보는 시장이라 허공에 총질하듯 과다한 마케팅이 필요없다. 워낙 예쁜 얼굴이라 굳이 화장(마케팅)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런데 이렇게 쌓아온 150편의 라이브러리가 스폰지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올랐다. 올 한해 스폰지가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올린 매출만 20억원이다. 조 오빠는 이 규모라면 똑같은 돈을 들여 안정적으로 갈 수 있는 ‘스폰지 채널’을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스폰지하우스를 홍대에, 부산에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폰지 채널’을 만드는 게 더 시급하고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스폰지와 조성규는 확실히 이상한 나라다. 마이너가 사는 법으로 일궈낸 틈새시장의 그 틈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이 눈덩이는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또 무언가를 조각해내려고 한다. 그 규모의 경제가 놀라운 게 아니라 “모든 일의 90% 이상은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돌아간다”는 조 오빠의 방식이 빛을 보는 게 반갑다. 그에게 없는 보험과 적금을 대신하는 미래가 사람이라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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