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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당신의 채널은 몇번입니까?

당신이 무엇을 보느냐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당신의 몸이 당신이 먹은 것으로 만들어진다면, 당신의 정신은 당신이 보는 채널로 구성된다. “국민의 방송~ 케베스~”에는 미안한 소리지만, 최소한 방송에서는 국민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유선방송과 위성방송 시청가구가 1600만, 시청가구의 90%를 넘는단다. 바야흐로 같은 채널을 본다는 것은 같은 취향의 증거가 되었다. 같은 채널의 같은 프로그램을 보는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이(언어의 장벽만 없다면), 다른 채널을 보는 한국인과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시대다. 어떤 ‘언니’와 “런 어웨이가 어쩌고, 오프라가 저쩌고” 한참을 떠들다가 옆의 ‘오빠’가 “무슨 얘기야”라고 짜증 섞인 말을 뱉는 당혹스럽고 송구스러운 순간,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당신이 어느 당에 투표하느냐는 침묵의 강에 묻어둘 수 있지만, 당신이 어느 채널을 보느냐는 도저히 묻어두기 힘들다. 이렇게 국민은 채널에 따라 분할됐고, 같은 채널을 보는 사람은 정신의 동지가 되었다. 잦은 가정불화도 채널 탓에 생긴다. 어머니와 갈등이 가장 심각해지는 순간은, 모처럼의 주말에 나는 프로농구 중계를 ‘봐야’ 하는데, 어머니가 <열아홉 순정> 재방송을 보자고 ‘우길’ 때다. 농담 반 진담 반, 채널권은 생존권만큼 중요한 권리가 되었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지 않아.’ 리모컨을 잡고 채널을 돌리다, 문득 정신을 차리는 ‘돈오돈수’의 순간이 찾아온다. 손가락에 입력된 번호를 정해진 순서대로 돌리는 자신을 보면서, ‘정말로 사이보그 같군’ 한심한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우리집은 여차저차해서 위성방송을 보는데, 나는 리모컨을 잡으면 자동으로 505번(MBC-ESPN)을 누르게 입력된 사이보그다. 그리고 채널을 하나씩 내리며 스포츠 채널들을 확인한다. ‘땡기는 프로’가 없으면 555번을 누른다(아, 살갑고도 닭살스러운 “온 스따~일!”). 나의 ‘보고 또 보고’는 MBC가 아니라 “온 스따~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섹스 & 시티> 재방송을 ‘보고 또 보고’ 하다가, 혹시나 불안해 리모컨을 살짝 눌러서 554번 동아TV에서 <프렌즈>를 하나 살핀다(동아TV의 <프렌즈> 심야재방이 끝났을 때, 슬펐다). 그러다 문득 ‘그래도 기잔데 지상파를 봐야지’ 의무감이 밀려와 어렵게 211번(MBC)을 누른다. MBC에 이어 KBS, SBS를 주마간산으로 살피다 알리바이를 챙기고 다시 채널 여행을 시작한다. 이렇게 당신에게도 리모컨 놀이의 정해진 순서가 있지 않은가? 날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채널을 돌리다보면, 인생이 정말로 뻔하군, 가슴이 먹먹해지지는 않는가?

다채널 시대의 다언어 방송을 학습의 도구로 활용해보겠다는 ‘야심만만’이 내게라고 없었겠는가. 방콕에서 더욱 즐거운 생활을 위한 나의 미션은 ‘ME’. 이름하여 ‘Muscle&English’ 프로젝트. 참고 보아야 하느니라, 하면서 523번(CNN), 528번(BBC World)에 도전해보았다. 시집살이도 아닌데, 벙어리 삼십년에 귀머거리 삼년이 지났건만 영어는 들리지 않았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기초로 돌아가자. 심지어 어린이 영어채널 ‘키즈 톡톡’에 ‘The Disney Channel’까지 견디며 보았다. 하지만 영어 사용자로 거듭나기 위한 마늘과 쑥의 나날은 오래지 못했다. 남몰래 보던 ‘키즈 톡톡’은 아무래도 18살 이하는 시청이 불가능한 ‘18금(禁)’ 방송인 것 같아 시청을 접었다. 물론 여전히 나의 영어는 주머니만큼 가난하다(Poor).

영어공부의 부작용으로 전 지구적 근심마저 생겼다. KBS <9시 뉴스> 진행자는 몰라도, <CNN> 앵커가 바뀌면 ‘그 아저씨 어디 갔지?’ 궁금해지는 형편이니, 한국의 결식아동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소말리아의 모슬렘 반군이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한 사실은 알게 됐다. 게다가 가끔은 한국의 이금희씨보다 미국의 오프라가 이웃집 아줌마처럼 느껴진다. 최근 두어해 동안 이금희의 <아침마당>을 본 기억은 거의 없지만, <오프라 윈프리 쇼>는 매주 보았기 때문이다. 2004년 미국 대선에서 케리가 부시보다 좋았던 결정적 이유는, <CNN>을 통해 들은 케리의 영어가 부시의 영어보다 잘 들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안방에서 지역을 잊고, 나라를 벗어나는 공간 이동의 착각에 빠진다. 취향의 국적도 지워진다.

이제는 저마다 ‘황금 시간대’도 다르다. ‘본방’ 보다 ‘재방’이 흔한 시대인 탓이다. 재방을 알뜰하게 챙기면 저마다의 프라임 타임이 생긴다. 나의 프라임 타임은 월요일에서 화요일로 넘어가는 자정 시간대다. 허겁지겁 집에 들어가면 대개는 자정 즈음인데, 211번 MBC <개그야>, 271번 KBS 드라마 <개그콘서트>, 273번 MBC 드라마넷 <무한도전>, 275번 SBS 드라마플러스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어진다. 여기를 보다가 저기로 돌리다 행복에 빠진다. 무엇보다 즐거움은 기대하지 않고 채널을 돌리다 ‘유럽축구 골스’ 혹은 ‘챔피언스리그 하이라이트’를 만날 때다. 신나서 “유레카!” 바보상자에 일희일비하는 바보가 된다. 그래도 사이보그는 다음날 또다시 입력된 프로그램을 반복한다. 사이보그니까 괜찮아?! 사이보그, 당신의 채널은 몇번입니까? 당신 정신의 주소는 몇번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