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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세대의 복고 판타지, <언니가 간다>
김도훈 2007-01-03

<페기 수 결혼하다> + <백 투 더 퓨쳐> + 고소영 & 듀스 = 6·29 세대의 복고 판타지.

시간을 거슬러 언니가 간다. 서른이 되도록 연애 한번 못 해본 나정주(고소영)는 모든 불행이 12년 전 고교 시절의 첫 남자인 록스타 조하늬(김정민)로부터 시작됐다 생각한다. 의욕상실의 나날을 보내던 정주는 심지어 자신을 쫓아다니던 모범생 오태훈(이범수)이 유망 IT기업의 CEO가 됐다는 사실마저 알게 된다. 논리적으로 따지면야 지금이라도 태훈을 꼬시는 게 말이 되겠지만, 정주는 갑자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페기 수 결혼하다>와 로버트 저메키스의 <백 투 더 퓨쳐>의 세계로 빠져든다.

타임머신은 ‘인생극장’식 옵션을 제공하는 정주의 노트북. 용감한 정주는 망설임없이 12년 전 1994년으로 돌아간다. 계획은 열여덟살 고교생인 자신(조안)을 젊은 하늬(이중문)로부터 떼어내 젊은 오태훈(유건)과 엮어주려는 것. 문제는 열여덟 정주가 질풍노도의 로맨스 사춘기 소녀라는 사실이다. “이공계의 장래가 밝다”한들 고딩 소녀의 눈동자는 음유시인 로커의 머릿결로 향하고, “착한 남자가 좋다”고 한들 고딩 소녀의 가슴은 나쁜 남자의 거친 목덜미로 향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가장 감정적으로 헤프고 멍청한 시기, 고교 시절이다.

<언니가 간다>는 <페기 수 결혼하다>와 똑 닮았다. 고교 시절로 돌아간 페기 수는 고교 동창생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 인생을 바꿔볼 심상이지만 또다시 남편과 사랑에 빠진다. 나정주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 정주의 마음을 돌려 팔자를 바꿔보려 용을 쓰지만 정주는 하늬를 선택한다. 결국 어른 나정주는 ‘시간은 스스로를 복구하기에 누구도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는 시간여행 SF의 법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깨닫는다. 어쩌면 “스물다섯이 되면 아이크림을 꼭 바르라”는 정주의 마지막 외침이야말로 가장 평범하고도 유용한 삶의 교훈일는지도 모른다.

<언니가 간다>의 시나리오는 사랑스러운 에피소드로 빼곡하지만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이용하는 데는 한없이 게으르다. 특히 난데없는 노트북 타임머신은 <페기 수 결혼하다>의 타임슬립(Time sleep)이나 박흥식의 <인어공주>가 시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에 비하면 TV 단막극용 장치처럼 허술하다. 대신 <언니가 간다>가 집중하는 것은 1994년이라는 그 옛날(!)의 향수다. 듀스의 <하늘 아래서>와 <나를 돌아봐>, 이은혜의 <블루>, 삐삐와 PC통신, 그리고 게스 청바지. 30대의 감성을 묘하게 건드리는 <언니가 간다>는 계엄령 세대가 아닌 6·29 세대의 소비자를 위한 복고-판타지 시대가 왔음을 보여준다. 다만 밑위가 그렇게나 길었던 게스 청바지는 절대로 다시 유행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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