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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허물벗기, 당찬 날갯짓, <나비>의 강혜정

당돌하다. 조금의 주저함도 꺼림도 없다. 이 아이는, 이 소녀는, 아니 이 배우는 처음 다가온 순간부터 이랬다. “모두들 그러죠. ‘아, <은실이> 그 나쁜 년?’ 영채라는 이름으로 기억해주면 고맙다니깐요.” 세상과 쉽게 타협하지 않을 것처럼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과 호기심으로 빛나는 똘망똘망한 눈동자. 그동안 보아오던 말랑말랑한 스무살의 반대편에서 오히려 낯선 매력을 뿜어내는 강혜정은 82년생이라는 어린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속깊게 조숙하면서도 그 나이만큼 생기있게 반짝일 줄도 아는 배우다.

스크린 데뷔작으로 선택한 문승욱 감독의 디지털영화 <나비>에서 그가 맡은 역은 아픈 기억을 소멸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망각의 바이러스’로 안내하는 가이드 유키. “감독님은 처음에 시나리오를 보여주지도 않으셨어요. 그냥 만나는 순간부터 캠을 들고 절 찍기 시작했거든요. 유키라는 아이에 내가 맞춰 나간다기보다, 내 속에 있는 유키를 끄집어내고 발견해내려고 했어요. 으으, 우리 감독님 정말 집요해요.” <나비>를 보는 내내 아이 같은 순수함과 동시에 안나의 깊은 상처까지 안아내는 어머니의 품을 가진 유키가 배우 강혜정과 끊임없이 겹쳐지는 것도 이런 연유다.

부산에서의 첫 촬영. ‘화장실에서 나오는 유키’컷은 누가 보기에도 꽤나 고단한 신고식이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계속해서 “다시!” 사인이 떨어졌고, 강혜정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찍고 또 찍어나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안나 역의 김호정이 “무섭다”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나중에 ‘한 10번쯤 찍었어요?’ 물으니까 사람들이 ‘너 독하다, 서른번도 넘게 찍었어’ 하더라고요. 근데 그게 정말 독한 마음 가지고 찍었다기보다 거기에 빠져 있는 상태라 계산하고 뭐, 이런 정신이 없었던 것 뿐이에요.” 계절을 통과하는 촬영기간 내내 종일 그를 따르는 디지털카메라와 함께 “상황은 이러이러하다, 카메라는 숨어 있을 테니 자연스럽게 연기하라”는 쉽지 않은 주문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조각난 장면들이 하나의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기쁘고 뿌듯한 마음이야 왜 없었을까. 그렇지만 그는 지난 부천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에 대해서도 “정신없이 찍은 바닷가 출산장면은 몰라도, 정신‘있이’ 찍은 건 어색하기 짝이 없다”며 겸손을 떤다.

오디션을 통해 처음 만난 문승욱은 막 영화라는 미지의 세상에 눈을 뜬 서툰 배우에게 동작의 디테일 이전에 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을 알려준 좋은 스승이었다. “하하, 그게 문제였다니까요. 그렇게 인간적으로 친해지다보니 나중에 촬영하다가 도망도 못 가고… 하하하.” 그리고 그 인연은 화장실에서 낙태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짧은 영상물 <플러쉬>(Flush)를 준비하던 송일곤 감독과 이어졌다. 마스카라가 흘러내린 눈가, 초점 잃은 멍한 눈, 변기의 물을 내리는 피범벅된 손, 결국 세면대에서 손을 씻어낸 뒤에 파란 날개가 솟아나는 소녀의 모습은 납중독 상태에서도 뱃속의 아이를 ‘기적’이라 믿고 지우지 않는 <나비> 속 유키의 전신처럼 느껴진다.

어릴 때 <분노의 역류>를 보고 소방관이 되고 싶었고, 액션영화가 좋아 사건을 해결하는 CIA요원에 대한 동경도 품었다가 “김미화 아줌마보면 개그맨 하고 싶었다”는 그는 <은실이>의 얄밉고 심통스런 영채를 벗고,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한 뒤 <나비>를 찍어 나가면서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예전에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기라는 걸 알아갈수록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하지만 못할 건 없는 거 아니에요?” 어느 가을날, 날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애벌레 한 마리가 나비를 꿈꾸며 막 고치를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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