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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버린 이미지의 성찬 <천년을 흐르는 사랑>

너무 넘쳐버린 이미지의 성찬

*글 속에 스포일러가 들어 있지만 영화의 감상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저예산영화였던 <파이>(π, 1998)와 <레퀴엠>(Requiem for a Dream, 2000)을 통해 악몽 같은 인물 내면의 세계를 독특한 비주얼로 그려낸 바 있는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세 번째 작품이다.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전작에서 일관되게 그려냈던 편집증적인 인물의 내면이나 그의 비주얼에 대한 창조적 역량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세 번째 작품이 천년의 시간을 오가는 판타지 장르라는 사실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어떠한 면에서는 그의 영화 모두를 판타지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16세기의 스페인, 21세기의 미국, 그리고 26세기의 어느 행성, 이렇게 세 층위의 시공간을 오가는 <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비주얼에 대한 애로노프스키의 야심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작품이긴 하지만, 그것이 ‘너무 넘쳐’ 오히려 무중력의 시공간 속에서 길을 잃고 해매는 듯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파운틴>(The Fountain)이라는 원제가 <천년을 흐르는 사랑>이라는 좀더 설명적인 제목으로 변경됐지만, 영화는 천년에 걸친 사랑보다는 죽음과 영생에 대한 애로노프스키식 선문답에 가깝다. 영화의 시작은 16세기이다. 신대륙에 발을 디딘 스페인의 마야 원정대가 불멸의 삶을 약속하는 생명의 나무를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펼쳐질 무렵, 영화는 미래의 어느 행성에서 죽어가는 고목(영생의 나무)을 되살려 영생의 삶을 얻으려는 우주탐험가(휴 잭맨)의 모습으로 갑자기 비약해버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화는 다시 한번 21세기 미국의 한 부부의 삶으로 초점을 이동하는데, 이후 영화는 이 부부의 삶을 서사의 무게 중심에 두면서 천년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몽롱한 이야기를 펼쳐나가게 된다. 애로노프스키는 이미 영화 전체를 교차 편집으로 구성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도 훌륭한 방식으로 <레퀴엠>에서 보여준 바 있긴 하지만, <천년을 흐르는 사랑>의 세 에피소드는 전작처럼 서로가 서로를 상승시키기보다는, ‘영생’이라는 화두와 21세기 에피소드의 이지(레이첼 바이스)가 집필 중이던 소설을 통해 아주 느슨하게 묶여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이는 영화의 후반부 이 세 에피소드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미지의 폭발을 위한 사전 포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휴 잭맨’과 ‘레이첼 바이스’가 모두 연기하는 세 에피소드의 남녀주인공들은 인간의 유한성의 증거인 죽음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21세기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에피소드에서 암에 걸린 이지는 감각이 마비된 채로 점점 죽어가고, 그녀의 남편이자 의사인 톰(휴 잭맨)은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톰은 실험용 원숭이의 뇌 속에 신비한 나무 조각을 삽입하면서까지 조금씩 아내를 치유할 수 있는 성과를 얻어가지만, 아내 이지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톰의 마지막 성공까지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톰은 인간에게 부여된 절대적인 한계를 뛰어넘기를 욕망하는, 즉 인간의 유한적 운명을 거부하는 ‘금단의 지식’을 갈망하는 신화적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벗어나기를 갈망하면서도 이내 자신의 좁은 세계에 갇혀버린 인물의 모습은 애로노프스키의 전작에서 반복되는 특징이다. 하지만 이러한 톰의 모습에서 수학적 수의 체계 속에 빠져 있는 <파이>의 주인공이나, 약물과 TV에 중독되다 이내 지옥의 삶에 갇혀버린 <레퀴엠>의 네 주인공들만큼 벼랑 끝까지 내몰린 듯한 절박함이 전달됐는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죽음을 예감한 이지는 자신이 창작 중이던 소설을 남편 톰에게 전하는데, 그 소설 속에는 이미 영화에서 시간을 교차하며 보여주었던 16세기의 마야 원정대의 내용이 담겨 있다. 너무도 아름다운 왕비 이사벨(레이첼 바이스)은 기사 토마스(휴 잭맨)에게 영생의 나무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토마스는 위기에 처한 왕비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그녀와의 영원한 사랑을 얻기 위해 영생의 나무를 찾아 원정대의 길에 오른다(이지가 쓰던 소설의 제목이 영화의 원제인 ‘파운틴’이다). 하지만 소설 <파운틴>의 엔딩은 백지로 남아 있고, 이제 그 엔딩을 채우는 몫은 남편 톰에게 남겨진다. 아내는 죽고 톰은 그 백지를 무언가로 채워나가면서 죽어가는 영생의 나무를 살리려는 자신의 모습을 26세기 어느 행성에서 발견한다. 영화 속에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하더라도, 애로노프스키는 아내 이지가 서술한 과거와 그들이 살았던 현재, 그리고 남편 톰이 채워야 할 미래라는 서사를 구성하려 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연결고리가 너무도 모호한 탓에 그들간의 상호연관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면에서 영화의 원제이자 아내가 쓴 소설의 제목인 파운틴, 즉 ‘샘물’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쓰이지 않은 결말, 그 불확실함은 마치 죽음 이후의 삶과도 닮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는 그녀를 기억해야만 하고, 그럼으로써 쓰이지 않았던 결말은 조금씩 실체를 드러낸다. 애로노프스키는 인간의 유한적 삶의 증거인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또 다른 창조의 샘물이라고, 그리고 그러한 창조가 유한을 넘어선 불멸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유한적 삶이 샘물이 되어 무한의 삶을 잉태하는 아이러니 말이다.

영화 후반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적 간극이 한꺼번에 초월되는 극단적인 이미지의 몽타주, 즉 죽음과 영생, 유한과 무한,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버리는 이미지의 성찬은 죽음 이후의 삶만큼이나 너무도 모호하다. 마치 애로노프스키는 인간의 유한성에 맞서 영생의 삶이라는 불가능을 꿈꾸는 인물들처럼, 이미지의 연쇄만으로 영화적 표현의 극한까지 나아가려는 실험적 영상을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서 시간을 비약해버리는 엔딩 시퀀스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장면들은, 이미지의 연쇄만으로 지옥의 형상을 너무도 훌륭하게 그려냈던 <레퀴엠>의 엔딩 시퀀스와 굳이 비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란한 이미지의 성찬으로 충분히 배를 채웠건만, 여전히 공복감은 가시지 않으니. <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애로노프스키의 전작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다소 실망스러운 작품으로 느껴질 테지만, 그가 할리우드 시스템에 안일하게 안주하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위안을 준다. 그것만으로도 애로노프스키의 차기작은 충분히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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