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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복제 시대의 예의 고찰 <블루프린트>
강병진 2007-03-28

가족드라마로 풀어낸 인간복제 시대의 예의

천재 피아니스트 이리스(프란카 포텐테)는 불치병을 선고받고 고민에 빠진다. 서서히 다가올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마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재능을 수혈하고 영구히 지속시킬 존재를 강구하던 이리스는 체세포 복제학 권위자인 피셔 박사와 공모하여 딸이자, 쌍둥이이자, 자신의 사본인 시리(프란카 포텐테 1인2역)를 낳기에 이른다. 두 사람은 어머니와 딸로서 즐거운 생활을 영위하지만 시리가 자신에 버금가는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라는 이리스의 엄격한 양육은 종종 갈등을 빚어낸다. 설령 시리가 어떤 이에게 ‘괴물’로 비쳐질 수 있다면 그것마저도 이리스가 원하던 바일 정도. 하지만 피셔 박사의 야욕으로 시리의 존재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어머니와 딸에서 원본과 사본의 관계로 순식간에 돌변한다. 본격적인 갈등은 시리가 피부의 주름과 머리 색깔만 다를 뿐 이리스와 똑같은 여성으로 성장하면서부터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존심과 한 남자의 애정을 놓고 경쟁하던 그들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글루미 썬데이>로 전쟁에 처한 인간의 존엄성을 다룬 롤프 슈벨 감독의 신작 <블루프린트>는 인간복제 시대의 예의를 고찰하는 이야기다. 영화가 제시하는 원본과 사본의 관계는 <아일랜드>나 <6번째 날>등 인간복제를 다룬 여타의 영화들에서 나타난 것처럼 단순히 적대적인 양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원본과 사본이면서 엄마와 딸인 이들은 함께 거울을 바라보며 서로의 닮은 얼굴에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구별이 어려워지는 서로의 모습에 애증을 품기도 한다. <블루프린트>는 이들의 갈등을 어느 모녀의 가족드라마이자 어느 딸의 성장드라마로 묘사하면서 이들을 화해시키는 데까지 영역을 확장한다. 야욕에 불타던 의학자의 말로 또한 처참한 죽음이 아닌 자식과 화해하지 못한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질 뿐이다. 좀더 간결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이야기를 밀도있게 농축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인간복제 기술로 나타날 원본과 사본의 관계에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 것은 <블루프린트>의 분명한 성취다. 다소 헐거운 이야기의 구석을 빼곡히 채워넣는 것은 영화 <롤라 런>에서 애인을 위해 질주하던 프란카 포텐테의 1인2역 연기. 포텐테는 원본과 사본, 엄마와 딸 등 4가지 입장을 각기 섬세한 차이로 묘사해낸다. 독일 작가 샤를로테 케르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며 감독을 비롯해 촬영, 편집, 음악 모두 <글루미 썬데이>의 제작진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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