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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영화평 ④ 공간의 축소, 시간의 탐색
천명관(소설가) 2007-04-17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시간>에 이은 ‘시간 3부작’

다시, <시간>이다. 그리고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다.

일찍이 기지촌과 매음굴, 군대와 절 등 한국사회의 주변부를 거침없이 내달리며 온갖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김기덕의 발걸음은 이제 물 한가운데 고립된 <섬>을 건너 <빈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급기야 그의 영화적 공간은 서너평 남짓한 좁은 감방 안으로 축소된다.

10년 전 가을, 단풍 든 설악산에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던 연은 사형수 장진을 찾아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시간을 연장해주는 대신 자신의 행복했던 시간을 되돌려받고자 한다. 그들의 과거와 미래가 이렇게 엇갈리는 바, 그들은 좁은 면회실 안에서 처절하고 절박하게 욕망과 기억의 무화된 시간들을 복원해내고자 애쓴다. 이렇게 확장된 시간은 그동안 김기덕이 꾸준히 공간을 축소하고 지워내는 가운데 발견한 새로운 길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의 열네 번째 영화 <>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그리고 바로 전작인 <시간>과 더불어 ‘시간 3부작’으로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김기덕 감독은 이미 스스로 괴물이 돼버린 충무로 거대자본의 음울하고 무자비한 욕망과 그를 규정하고 정리해서 가두고, 길들이고 거세해서 기어이 살해하려는 지식인의 불타는 복수심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그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전인미답의 길을 향해 점점 더 멀리 길을 내고 있다. 그는 이제 언론의 문화면을 뒤덮고 있는, 쉽고 착하며 안심할 만한 수많은 사이비 예술가들과는 정반대편에서 우리가 한번도 마주친 적 없는 낯설고 불편한 방식으로 이 세계를 투사하며, 매번 의미있는 텍스트를 생산해내는(단 한편의 예외도 없이!) 충무로의 유일한 감독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에 동의하든 안 하든 그동안 그가 보여준 열네편의 고행은 제작비 100억원대와 관객 1천만 시대에 만나는 낯선 진경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을 확장하는 대신 공간을 축소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은 살인적인 저예산의 압박을 극복해내기 위한 그만의 고육지책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필름에 담긴 정태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들고 개봉하는 그 모든 과정 진술까지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최근 들어 그의 영화에서 한국사회가 점점 더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충무로영화’ 딱지를 떼버린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한국사회가 지워지는 것과 동시에 창녀와 건달, 노숙자와 혼혈아 등 그의 영화 속 자아들 혹은 형제자매들까지도 함께 사라져 이젠 그의 영화를 ‘한국영화’로 규정할 근거조차 더욱 미약해졌다는 것이다. 이번 영화 <>에선 그 점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한국어가 아예 불가능한 중국 배우와 연극 무대처럼 비현실적인 공간, 그리고 거의 한 배우의 개런티에도 미치지 못하는 제작비의 출처까지….

언제나 이 사회의 하위 주체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언제부턴가 그 하위 주체의 최전선이 되어버린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각과 사회변혁에 대한 전망의 결여라는 원죄로 인해 한국의 좌파 지식인에게도 끝끝내 외면받았던 그의 외롭고 고단한 순례는 기독교적 구원과 죄의식 문제에 가닿음으로써 서구영화계로부터 어느 정도 위로를 얻었지만 그가 점점 더 한국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매우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혹 한국사회의 주변부적 삶을 다루면서 야기된 잔혹하고 소모적인 논쟁에 그가 이제 지쳐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한낱 우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는 여전히 선글라스를 쓰고 카메라 뒤에서 등장인물을 훔쳐보고 키득거리고 조종하고 금지하고 허용함으로써 그 자신이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음험한 보안과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음험한 시선으로 다시금 우리에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세계를 펼쳐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그는 지친 것이 아니라 지혜를 얻은 것이며,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게 아니라 시간의 탐색과 더불어 진정 새로운 길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구상을 끝마쳤을, 그의 열다섯 번째 영화를 즐거운 심정으로 기다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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