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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욱의 현장기행] 이준익의 음악 3부작 2부는 이렇게 시작했다

<즐거운 인생> 프리 프로덕션부터 촬영현장까지

타깃_ 이준익 감독의 신작 <즐거운 인생> 취재기간_ 3월6일~4월18일 현장_ 동국대학교, 영화사 아침 감독 방, 충무로, 압구정 헤어숍, 신사동 서울현상소, 홍대 브라운사운드스튜디오, 안산의 실용음악학원 등 취재 중에 만난 사람_ 이준익 감독, 정진영, 김윤석, 김상호, 장근석, 고아성, 키노포스트의 김봉수 대표, 영화사 아침 정승혜 대표, 음악감독 이병훈·방준석 등

새끼는 어미를 닮게 마련이다. 그 영화가 그 감독을 빼다박는 게 이준익 감독뿐이랴. <왕의 남자>에서 장생(감우성)의 마지막 대사는 이 감독과 어울린 술자리에서 듣는 환청 같았다. “징한 놈의 이 세상, 한판 신나게 놀고 가면 그뿐.”

어떨 땐 말투까지 닮았다. “광대가 천출이면 어떻고, 정승이면 뭐할 거야. 배부르게 먹으면 그만이지. 배고파 디지는 줄 알았네.”

<황산벌>에서 처자식부터 죽이고 전장에 나가겠다는 계백(박중훈)의 결기를 향해 아내(김선아)가 비수처럼 찌르던 말의 본새도 그의 입과 머리를 닮았다. “아가리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호랑이는 가죽 땜시 디지고, 인간은 이름 땜시 디지는 거여. 인간아.”

그에게는 가오가 없다. ‘이름’의 겉치레를 걷어내고 신명나게 놀아보자는데 가오가 있겠나. 그의 영화도 가오가 없다. <왕의 남자> 후속타였음에도 <라디오 스타>는 느끼한 기름기가 없다. 휴머니스트의 쌍권총으로 휴머니즘적 똥침을 술술 쏘아댔다.

흥미로운 건, 남성적 역사, 남근적 권위에 똥침을 날리는 인물 역시 늘 남자들이란 점이다. 정치에 짓눌린 전쟁을 수행하는 장군이기도 하고, 시벌놈이란 욕을 달고 태어난 무지렁이 농사꾼이기도 하며, 몸과 입이 깃털처럼 가벼운 광대이기도 하고, 제 가족을 내팽개치고 한물간 로커를 죽자사자 사랑하는 매니저이기도 하다. 이준익의 남자들은 동시대 한국영화의 남자들과 다르다. 가오를 부려도, 엄살을 떨어도 사랑스럽다. 그의 남자들은 우정과 애정 사이를 가로지르며 유사가족을 만들어 ‘이렇게 더불어 살아봐봐’라고 애교 부린다. <즐거운 인생> 역시 딱 그렇게 가고 있다. 아버지뻘과 아들뻘 사내들이 유사가족을 만들어 한판 신나게 놀아젖힌다.

지난 2월 초 아주 센 멜로 <매혹>의 제작이 보류되던 날, 이준익 감독의 집에 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 조철현 이글픽쳐스 대표 등 ‘이준익 3인방’과 최석환 작가 등이 모였다. ‘대신 뭐 찍을 건지 만들어낼 때까지 집에서 못 나가’라는 분위기. 이 감독은 엉뚱하게도 <풀 몬티>와 <코요테 어글리>를 섞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상어 상반신과 말 하반신을 붙였다고 생각해봐. 낄낄. 난 이런 거 잘해. 초현실주의 같은 거지. 현실에 있는 걸 재조합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거. 마그리트 그림도 각각의 객체는 일상에 흩어져 있는 리얼리티잖아. 모이니까 이상한 거지.”

상어의 상반신이 <풀 몬티>의 삶의 고단함과 비루함이라면 말의 하반신은 <코요테 어글리>의 성공 스토리다. ‘철없는 아저씨들의 유쾌한 록밴드 이야기’가 그렇게 3일 만에 시나리오로 탄생했다. 캐스팅을 완료하고 크랭크인 날짜를 잡기까지 한달. 길게 끌지 않고 첫 번째 테이크 혹은 두 번째 테이크에 시원스레 오케이를 외치는 이 감독의 촬영현장을 닮은 초스피드다.

80년대 초, 밴드를 결성해 가열차게 달렸으나 대학가요제 본선에도 나가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어느덧 중년의 가장이 된 세 사내 기영(정진영), 성욱(김윤석), 혁수(김상호). 옛 멤버였던 상우가 어이없이 죽어버리자 그 이상의 상실감에 시달리던 세 남자가 다시 밴드를 결성하고 인생 스타일을 뒤집기 시작한다. 빛을 보지 못했던 자작곡 <언젠가 터질 거야>를 터질 듯 불러젖히며.

3월6일 오전 동국대

비가 아니고 눈이 흩날린다. 3월의 낮기온을 영하 7도까지 끌어내린 꽃샘추위가 에워싼 정문 앞. 84년 대학가요제 예선 플래카드 밑에 치렁치렁 머리를 기른 대학생 록밴드 활화산 멤버들이 반팔 차림으로 부들부들 떨며 섰다. 대단한 촌스러움! 회상신에 삽입할 20년 전 사진을 미리 찍어두려는 참이다. 추위 탓인지 촌스러움 탓인지 등교하는 학생들이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몸을 웅크린 채 총총걸음으로 강의실로 향한다. 배우들도 정문에서 캠퍼스 게시판으로, 그리고 학생회관의 록동아리방으로 동선을 옮긴다.

“신기하네. 나 옛날 밴드할 때도 옆방이 탈춤반이었는데.”

일찍 죽어버린 상우의 20년 전으로 변신한 이는 배우가 아니라 진짜 밴드의 리드기타 출신의 스탭이었다. 믹싱을 맡은 키노포스트의 김봉수 대표가 기타에 이어 드럼 스틱을 잡아본다. 두타닥두… 엇박자 리듬이 근사하다. 한달 가까이 연습해온 김상호의 투닥투닥 소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와~, 이거 어려운 리듬인데. 역시 다르네. 상호야 너두 어떻게 안 되겠니?”(이준익) “상우 대신 혁수가 죽는 걸로 하죠. 하하.”(정진영) 넉살 좋은 김상호지만 짓궂은 농담에 입이 열리지 않는다. 리드기타 김봉수 대표의 카리스마가 좀더 이어졌다. “원래 로커들은 내성적이에요. 기타가 좀 날카롭지만 드럼은 의외로 섬세하고 합리적인 성격이 많아요. 베이스가 좀 거칠고. 학점도 드럼이 가장 높았던 걸로 기억하는데.”(김 대표) “음악으로 내면을 발산하니까. 뭔가에 꽂힐 수 있는 사람은 포악하지 않아.”(이준익) “맞아요. 전 폭주족도 해봤지만, 다 발산해버리니까.”(김 대표) “<스쿨 오브 락>이 그렇잖아요. 그 영화 아주 좋죠?”(이준익)

사진 촬영을 위해 실제로 합주에 들어간다.

“지플랫?” “아니, 디 마이너!… (드럼을 시작으로) 한동안 뜸했었지. 한동안 못 만났지. 혹시 맘이 변했을까. 너무 답답했었지….” <한동안 뜸했었지>를 실제로 연주해보는 배우들, 어설픔을 감출 수 없지만 그럴듯하다.

이날 김윤석의 차를 잠시 얻어탔다. 송골매의 <불놀이야>가 흘러나왔다. “요즘 24시간 이거 들어요. (지겨워) 죽겠어요.” 매니저의 가벼운 불평이었다.

같은 날 오후, 영화사 아침의 이준익 감독 방

배우들이 거실 나들이 하듯 하나둘 들어와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수다를 떠는가 싶더니 정진영은 리드기타를, 김윤석은 베이스기타를 잡고 각자 연습에 들어간다. 곧 학습 도우미를 하나둘씩 꺼낸다. 휴대폰 동영상으로 코드 잡는 손을 찍어놓은 것이며, 솔로연주의 감을 잡을 수 있게 ‘딥디디딥’ 하며 입으로 기타소리를 따놓은 것 등. 각자의 음악코치가 만들어준 도우미들이다.

“요즘에 밴드를 보면 베이스를 유심히 보는데 멋있더라. 그거 말고 두드리면서 치던데.”(정승혜 대표) “슬랩이라고 하죠. <불놀이야>에 있는데 이렇게~.”(김윤석) “와! 멋지다.”(정승혜)

TV로 방영된 <라디오 스타>의 시청률이 20%가 넘었다는 소식에 이준익 감독이 흐뭇해한다.

“600만이 본 거네. 시대적 니즈가 있었던 거지. 올해 가기 전에 베트남 가서 여자 록밴드가 나오는 <님을 먼 곳에> 찍을 거야. 아예 음악 3부작을 만들려고.” 농담처럼 들린 진담이었다. <즐거운 인생>을 올 추석에 개봉하고, 11월쯤 <님을 먼 곳에> 촬영에 들어갈 계획을 잡고 있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남편을 꼭 만나 완수해야 할 ‘사적 임무’를 위해 록밴드 위문단에 뛰어든 여자 이야기. “할리우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나이 많은 관객을 위한 영화가 나와주니까 잘 굴러가는 거지. 젊은 애들 영화만 내놓으면 그 시스템이 그렇게 안 되지.” 투자와 제작이 차갑게 식어버린 충무로의 긴장감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보였다.

이준익 감독이 리드기타의 솔로를 연습하던 정진영을 보다가 부러운 듯 한마디 한다.

“그나마 통기타라도 두들겨봤으니까 그만큼 하지, 난 못해.” “다 해요. 번호 매겨서 천번씩 반복하면.” “정말?” “그럼요. <달마야 놀자> 때도 염불을 그렇게 익혔잖아요.”

김윤석이 거든다.

“감옥이 따로 없다니까. 홍대 부근 연습실에서 세명이 각자 칸막이로 나뉜 방에 처박혀서 등만 보며 하루 종일 연습한다니까요. 캐릭터 연구가 따로 필요없어. 버벅대다가 될 때의 그 희열이 캐릭터 그대로라니까.”

정승혜 대표가 제작자로서 쐐기를 박는다.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출연시켜서 최소한 네곡은 연주하게 만들 거니까 더 열심히 해요.”(물론 아직 섭외도 안 됐다.)

이날, <즐거운 인생>의 시나리오를 읽었다. <라디오 스타>보다 인물도, 노래도 훨씬 많다. 남자들의 고뇌는 IMF 사태와 FTA 격변 사이에 끼어 양극화의 아랫구멍으로 흘러내리는 쪽의 초상 같다. 아직 감은 안 온다. 이게 재밌을까. 아니 감동적일까. 내일로 예정된 리딩(대본 읽기)에서 배우들의 입을 통하면 그 색깔이 잡힐까.

3월7일 오후 충무로의 한 사무실

다섯신 이상 출연하는 배우들이 모여든다. <괴물>의 가족을 격분시켰던 소녀 고아성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딸이다. 아빠 기영(정진영)이 주식으로 스스로를 말아먹고 빈둥거리고 있는데 꼭 이 때문은 아니더라도 사춘기답게 아빠에게 시큰둥하고 무심한 연기를 해야 한다. “어디 보자….” 정진영이 아성양의 손을 잡고 빤히 쳐다본다.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모르는 소녀.

“엄마(김호정이 맡은 극중 배역) 닮았네. 진짜로. 몇 학년이야?” “중3이요.” “이따 밥먹고 갈 거지?” “인터뷰가 있어서….” “아성 아빠가 기타 치셔?” “예전에….” “시나리오 보고 아빠 얘기라고 했다며?” “예? 예….”

아성양을 가까이 보기는 처음인데 앳된 카리스마가 스며 있는 표정이다. 이준익 감독이 서두를 연다.

“이렇게 다 모이긴 처음이죠? 리딩은 대충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의 70% 정도만 담아주세요. 저는 시나리오 그대로 따라가면 영화가 죽는다고 봅니다. 연기자도 마찬가지. 시나리오 가지고 놀아야지. 그럼, 한신 끝날 때마다 자기 의견을 기탄없이 말해주시길. 시나리오작가가 여기 있는데, ‘아~ 이런 대사 어떻게 해요?’ 같은 항의, 환영합니다.”

신1이 끝나자 감독의 단출한 한마디가 이어졌다. “첫신은 타다닥 스피디하게 갈 생각입니다.” 신2의 매듭도 감독이 맡았다. “안산에 헌팅해놓은 장소에서 찍을 건데 크게 중요한 신은 아닌 것 같고.” 신5에 이르자 감독의 말투가 무거워진다. “다섯신까지 오면서 40대가 가진 대책없는 천진함이 기영의 캐릭터를 통해 표현됩니다. 현대인의 철없음이랄까. 그게 나중에 밴드까지 가는 열정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관객이 함께 따라오게 해줘야 합니다.”

신6에서 죽은 상우의 아들 현준(장근석)이 등장한다. 감독이 배우의 대사 처리에 처음 이의를 제기한 게 이때다. “현준은 더 건조하게. 기영의 감정이 어느 정도 올라왔는데 그것과 대조가 돼야 해.” 신7, 8, 9에서 주문이 좀더 정교해진다. “신7, 8, 9가 작은 시퀀스를 이루고 있는데 낙차가 컸으면 좋겠어. 신7에서 기영, 성욱, 혁수가 감정을 뭉텅이로 담고, 신8에선 시간이 흐르며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고, 신9에선 현준이 이것과 반대의 감정톤을 실어야 해. 아주 쿨하게. 마치 남의 일처럼. 혹은 깡패처럼. 관객이 ‘저거 상우 아들 맞아?’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

리딩을 대충하자는 말은 새빨간 빈말이었다. 감독은 신이 흐를수록 감정선의 디테일을 어떻게 살려갈 것이냐에 성큼성큼 몰입해갔다. 그걸 배우들과 토론하고 공유하는 것이 양보할 수 없는 오늘의 목표처럼 보였다. 신12에선 2주 뒤에 시작될 촬영을 어떤 식으로 전개할지 예고했다. “이건 무지하게 위험하지만 잘 맞으면 무지하게 좋은 신이야. 기영의 연기가 어려운 게, 뻔히 보이는 닭살을 끌고가야 하거든. 앞신까지의 차분한 디테일이 <나 어떡해>를 부르는 돌발상황과 이어져야 하니까. 하긴 이 책 자체가 판타지인데 그걸 리얼리티 안에서 펼쳐야 하는 게 숙제지. 일단 앞신 찍어보고 그 현실적 조건 안에서 확 바꿀 수 있는 신이야.”

배우들도 호흡이 가빠진다. 대사가 입에 잘 붙느냐 아니냐는 아주 부차적인 것이었다. 주어진 신 안에서 캐릭터들이 보이는 행동과 대사와 태도가 사실성과 일관성의 디테일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지 집중적으로 점검해갔다. 예컨대 검은 양복을 입고 어딘가 다녀온 남편(정진영)의 손에 기타가 들려 있는데 아내(김호정)가 기타의 정체만 추궁하고 검은 양복에 대해선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왜 그런지, 그것이 상징하는 이들 부부의 소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배우들은 정확히 짚고 넘어가려 했다. 감독과 배우와 제작자 사이에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논쟁이 신67에서 벌어졌다. 기러기 아빠 혁수(김상호)가 캐나다에서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만나려고 출국하려 했다가 공항에서 발길을 돌리는 장면이었다. 문제는 혁수가 혁수처에게 던지는 단 한줄의 대사였다. 누구는 너무 직접적이라고 우려하고, 누구는 적당한 순간에 적당한 정보를 담고 있어 좋다고 하고, 누구는 앞뒤 신을 모두 흔들어 재배치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이 분분했다. 감정의 절정부를 구축하는 주요 장면이라 누구도 쉽게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대사 하나를 놓고 평행선을 긋기 시작한 지 20분이 넘었을 무렵, 창밖에 거짓말처럼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어제보다 더 거센 눈. “와아~ 눈 온다. 세트장에서 뿌리는 눈 같다.”

누군가가 던진 감탄사를 또 누군가가 받는다. “오늘 술맛 나겠네.”

논쟁의 마무리는 결국 감독 몫이다. 작가와 함께 더 고민해보겠다는 것으로 일단락. 10분 정도 쉰 시간을 빼면 벌써 3시간이 흘렀다. 뻑뻑해진 눈과 머리가 힘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감독이 최종 마무리에 들어갔다.

“21일 크랭크인하면 가급적 첫신부터 순서대로 촬영을 할 겁니다. 촬영 전날 직전까지의 현장 편집본을 보여줄 거고, 그러면 지금보다 더 정확하게 문제점들을 잡아낼 수 있을 겁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더 많은 신들이 저절로 바뀔 테니 여러분도 여기에 집중해주세요.”

물론 신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이 감독은 뺄 수 있는 건 모조리 빼면서 갈 것이라고 했다. 대사건 숏이건 걷어낼 수 있는 건 최대한. 관객이 감정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신과 신을 잇는 원칙처럼 보였다. 의외다. 이준익의 영화들은 감정이 폴폴 날아다니는 것 같았는데(한달 반 뒤 촬영 13회차 때 가보니, 신을 제법 들어내 촬영회차를 3회나 줄여놓았다. 그만큼 제작비가 절감될 테니 투자사인 CJ엔터테인먼트 입장에서는 놀라우면서도 반색할 일이었다). 리딩 전후 이 감독의 숙제는 뭘까? “캐스팅 다음에 배우들을 보면 캐릭터가 더 선명해진다. 시나리오 쓸 때의 그림과 변하는 순간인데 리딩 과정에서 드러나는 성격들에 의해 신과 캐릭터의 색깔이 또 조금씩 바뀐다. 이걸 놓고 시나리오를 계속 수정하는 건데 남은 골칫거리는 라스트다.” 시나리오로 본 라스트는 명쾌했는데 감독의 말은 알쏭달쏭했다. “(라스트를 이루는) 두개의 시퀀스에서 닫아주기를 잘해야 하거든. 1장과 2장은 계속 열어줄 것이고, 3장에서 닫아주기 시작해야 하는데 그게 선명하지 않아….”

3월14일 정오 강남 압구정 헤어숍

헤어와 의상을 테스트하는 날이다. 극중 인물의 스타일을 어떻게 가져갈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씩 체크하며 감독의 ‘확인 도장’을 받아야 한다.

분장팀은 경쟁 프레젠테이션 때 만들었던 캐릭터별 도판을 놓고 배우의 머리부터 장신구, 문신까지 하나씩 손보는 중이다. 헤어숍 2층 카페에선 밤을 꼬박 새운 의상팀이 수북이 걸린 옷들을 신별로 점검 중이다. 4명의 배우에게 신 순서대로 입혀봐야 할 옷이 100벌, 신발이 16켤레다. “2주 동안 구제시장을 포함해 살 수 있는 곳은 다 돌아다니며 구입한” 물건들이다. 약 1500만원이 소요됐다.

극 중반에 밴드에 합류하는 20대 반항아 현준 역의 장근석이 헤어숍에 들어서자 김윤석이 군기반장처럼 나선다. “이리 와봐. 손 줘봐.” 손 앞뒤를 만져보면서 “(기타)연습 열심히 하고 있냐”고 다짐하듯 묻는다. <타짜>의 악질 아귀와 <천하장사 마돈나>의 주정뱅이 아비가 잠시 떠올랐으나 실제의 김윤석은 근사한 수다쟁이였다. 근사하다는 건 두 가지 의미다. 어디서건 구수한 말발로 분위기를 알맞게 들어올렸고, 순간 틈날 때마다 감독을 붙잡고 (연구하고 취재했을) 캐릭터에 대한 갖가지 자세를 선보였다. ‘프로의 냄새란 저런 거군’ 하는 체취랄까.

오후 5시에 끝나는 스케줄을 보고 ‘뭐 그리 오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실제 끝난 시각은 반나절 꼬박 잡아먹은 오후 7시 무렵. 뜻밖의 지난한 과정이었는데, 배우들의 대본읽기 때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던 희뿌연 무엇이 선명해졌다. 그저 신 순서대로 바뀌는 헤어와 의상을 본 것뿐인데 마치 영화 한편을 다 본 것 같은 희한한 착시감이 들었다. 정진영이 단정하나 평범한 중년에서 딱 ‘믹 재거’로 변신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의 마디마디가 쏙쏙 입력됐다. 스타일 하나가 길고 복잡한 대사들을 말없이 웅변해준 셈이다(‘뿌려라, 뿌린 만큼 거둘 것이다’란 명제는 냉정한 현실이다. 앞문장에 ‘돈’을, 뒷문장에 ‘스타일’을 넣으면 딱 떨어지는).

이날 두번의 ‘반전’이 벌어졌다. 첫 번째 희생자는 의상팀이었다. 정진영이 첫 외출복을 입고 나타나자 브레이크가 세게 걸린다. “너무 더워 보이는데.”(감독) “너무 공식적이지 않아요? 이 톤으로 가면 셔츠는 흰색으로 가야 해.”(정진영) 의상팀이 부랴부랴 셔츠부터 재킷까지 다른 것으로 갈아입힌다. “의상팀장, 마이가 골덴쪽인데 면 스타일 없을까. 너무 무거워.”(감독) 또 갈아입는다. “이것도 아닌데. 더 칙칙해. 바지도 고동색이라서 좀 그래.”(감독) 바지도 교체, 재킷도 다시 교체. “뭐 좋은 아이디어 없을까.”(감독) 이쯤 되니 의상팀의 당혹스러움이 전체로 번진다. 어쨌든 또 한번의 의상 교체 뒤에야 “이제 좀 낫네”라는 감독의 말이 떨어진다. “그러면 뒤로 가면서 밝아지는 선택의 폭이 없어지는데”라는 의상팀장의 작은 항변이 마치 마무리 멘트처럼 이어진다. 첫 고비를 넘기자 비교적 순탄하게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다. 3시간 뒤, 홍대 클럽 공연에서 찍을 장면에 이르러 배우들의 변신이 확연해지자 감독이 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완전히 청춘으로 돌아왔네. (정진영을 보면서) 구강 구조나 헤어가 제대로 믹 재거야. 처음하고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어? <황산벌> 때 다르고, <왕의 남자> 때 다르고, 이번에 또 달라. 빼먹어도 빼먹어도 계속 있어. 내가 바닥까지 빼먹을 거야. 김윤석도 그런 과야. 아귀랑 또 다르잖아? (웃음)”

4시간 뒤, 라스트신을 장식할 공연 의상을 입고 나타나자 감독의 감탄사가 또 떨어진다. “어허, 이번에는 프린스네. 저 눈의 아이라인 좀 봐.” 블랙과 레드로 강한 콘트라스트를 준 로커의 이미지가 강렬했다. 그런데 감독이 토론을 좀 하자고 한다. “상상했던 것과 달리 직접 보니까 영화의 완결성을 위해 평상복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어. ‘저 사람들 저렇게 끝도 없이 어디로 가는 걸까’ 하는 느낌을 주려면 세련된 의미의 일상복으로 가는 게 어떨까. 어떻게들 생각해?” 배우들의 지지가 이어지자 감독이 애초 의상팀과 합의했던 마지막 무대공연의 컨셉을 뒤집는다.

“그럼 결정! 이건 일단 캔슬. 현준만 지금 그대로 그냥 가보는 걸로 하고.”

두 번째 반전의 희생자는 장근석의 머리카락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가 로커의 트레이드마크 같긴 하지만 감독은 너무 미소년스럽다고 봤다. “너무 귀여워. 아예 머리를 확 잘라버리면 어떨까.”

장근석이 머리를 쥐고 바짝 올려본다. “훨씬 낫네. 남자답고. 일단 머리 깎자고. 모자를 쓸지 말지는 그 다음에 보자.” 순식간에 고이 기른 머리와 작별하게 된 젊은 배우의 심정이 어땠을까?(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건 촬영현장에서 증명된다.)

같은 날 오후 8시, 신사동 서울현상소

오후 내내 느꼈지만 일주일 만에 만난 이준익 감독은 어딘가 초췌해 보였다. 그의 몸은 미니미 종합병동이었다. 뒷목에는 담걸렸다고 파스를 길게 붙였고, 집 마당 공사장에서 발목을 삐긋했으며, 아침에는 병원에서 (스트레스성) 위염 진단을 받았다. 입에서 삐뚤어지고 있는 이빨을 바로잡기 위한 교정기를 빼면서 웃는다. “예전에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스트레스를 이겨냈는데, 요즘에는 좀 풀어져서 그런지 힘들어. 풀어지지 않고 팽팽하게 살아온 게 10년이 넘는데 이젠 지쳤는지….” 빨리 촬영을 시작해야 편해질 거라고, 촬영하면서는 노는 거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라스트가 계속 고민이야. 라스트에 도달하는 영화적 방점이 아직 선명치 않아. 초·중반까지는 선명하게 보이는데 말이지. 그리고 심리적, 물리적으로 헌팅의 불안정성이 스트레스야. 물론 헌팅을 다 해놨지만 현장에서 촬영에 들어갔을 때 대처해야 할 변수들, 그러니까 콘티의 문제 같은 거 말야.”

필름테스트를 위해 현상소에 도착하자 다시 눈빛을 반짝이며 강의모드로 바뀐다. <즐거운 인생>은 코닥을 선택하는 관행 대신 후지필름을 골랐다. “지난 10여년간 수치를 보면 후지의 점유율이 10% 정도야. 현상소가 갖고 있는 데이터가 상대적으로 적은 거고, 반면에 코닥은 관용도가 넓으니까 많이 쓰는 거지. 코닥은 따뜻한 느낌의 색감에서 선택의 폭이 풍부해. 후지는 블루톤이 강한 섬세함이 있고.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차이인데 말이지….”

강의가 끊겼다. 헤어·의상 테스트가 늦어지면서 오래 기다린 촬영, 조명 등의 스탭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곧바로 필름테스트가 시작됐다. 한강변, 명동 밤거리, 대낮 골목길, 실내 세트, 건물 내부 등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조명으로 다양한 필터를 사용해 촬영한 장면이 영사기로 쏟아져나왔다. 저렇게 수십 가지의 선택사양이 생겨나는구나. 필름을 후지의 데이라이트 500T로, 필터를 코랄1과 골드1으로 결정할 때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알아듣기 힘든 전문용어로 넘쳐났다. 다만, 일부 신에서 블리치 바이 패스로 거친 느낌을 주도록 하자는 의견에 대해 이 감독이 제동을 거는 상황은 감이 잡혔다. “대놓고 ‘멋이다’라고 관객에게 고백하며 가는 건데, 고속촬영에다 블리치 바이 패스에다 DI에다…. 닭살 아닐까? 그러잖아도 영화가 감정적인데?” 좀더 테스트해보고 판단하는 것으로 유보시켰다. 현상소를 나오면서 끊겼던 강의가 이어졌다.

“코닥과 후지의 차이는 사실 무의미해. 극장 스크린에 낀 먼지 하나만으로도 그 차이를 다 잡아먹으니까. 후지가 좀 저렴한 이점이 있는데….”

3월16일 저녁 홍대 브라운사운드스튜디오

깜박했다. 이건 록이 주인공인 음악영화 아니던가. <언젠가 터질 거야>가 80년대 록스타일의 버전1에서 하드록의 버전2로, 다시 펑크록의 버전3으로 변신할 때마다 강렬한 비트가 가슴으로 파고든다. 한 계단씩 수위를 높이며 드라마에 불을 질러대던 <왕의 남자>의 광대극이 이번에는 록이었다. 세개 버전의 <언젠가 터질 거야>를 포함해 7곡을 연주하는 혁수의 드럼이, 성욱의 베이스가, 기영의 리드기타가 정교해질수록, 제2의 공길 탄생을 예고하는 현준이 고운 얼굴과 딴판인 터프한 보컬을 내지를수록 막연한 느낌이 예사롭지 않은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크랭크인을 일주일도 채 남기지 않은 이날, 마지막 ‘중간평가’가 벌어졌다. 배우들이 갈고닦은 합주를 차례로 들어보고, 이 연주를 영화에 얼마나 어떻게 활용할지 판단하는 자리다. 밴드 러스티즈의 멤버들이 2월 초부터 영화 속 밴드 활화산의 음악코치로 활약 중이었다. 러스티즈의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는 이호준 대표는 배우들의 프로다움이 좋다며 좋은 소리만 한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식사도 거르며 고되게 연습하면서 프로답게 어려움을 잘 헤쳐나가더라. 저들을 보면서 내가 많이 배웠다. 보통은 지금 저 정도까지 연주할 수 없다. 합주가 가능하다는 것부터 놀라운데, 특히 드럼이 가장 하드하게 해냈다. 드럼 스틱을 네댓개 부러뜨렸을 정도다.”

드럼(김상호)의 비트는 열흘 전과 확연히 달랐다. 첫곡 <불놀이야>의 연주가 끝나자 감독과 프로듀서의 얼굴이 ‘좋아죽겠다’로 바뀌어 있다. “완전히 달라졌네. 상호는 이제 박자도 안 틀리고.” 이 감독은 어찌나 신나는지 두 번째 곡 <한동안 뜸했었지>의 보컬을 직접 맡아버렸다. 갑자기 현준 역의 장근석을 툭 치며 “이제 너만 잘하면 된다”는 당부를 잊지 않은 채.

4월17~18일 안산의 실용음악학원, 뉴월드나이트클럽

홍콩영화제 취재 때문에 크랭크인 현장을 놓쳤지만, 밴드의 연주신이 있는 날을 일부러 골라 1박2일 일정으로 촬영장을 찾았다. 배우 김윤석이 “아니, 중요할 땐 안 오고…. 홍콩 놀러갔었다며”라고 면박을 주긴 했지만 한달의 건너뛰기 취재가 결과적으로 더 만족스러웠다. 이준익 감독의 낯빛은 변해 있었다. 풀리지 않던 라스트에 대한 고민이 어찌 됐는지 묻자 “내가 그랬나?” 하며 씩 웃는다. “뭐 더 물어볼 거 없어?”라고 채근하던 그의 입이 더 열리지 않는 걸 보니 은밀한 묘책을 손에 쥔 모양이다. 괴롭히던 위염도 잘 다스리고 있었다. 스트레스 인생에서 즐거운 인생으로 모드 전환이 된 걸까.

이틀에 걸쳐 활화산의 세 가지 연주를 지켜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죽은 상우가 밴드 일을 하던 업소에서 첫 오디션을 보고 망신당하는 연주와 상우 아들 현준이 가세해 업그레이드한 활화산으로 다시 오디션을 보는 연주는 아마추어의 눈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밴드의 연주장면을 곡 처음부터 끝까지 풀숏으로 촬영하는데 첫 번째 테이크에서 바로 오케이가 났다. 두 신 모두! 바짝 머리를 깎아올린 장근석은 그냥 꽃미남에서 카리스마 로커로 변신해 있었다. 툭 뛰어나와버린 그의 캐릭터 현준이 다른 세 중년의 곡절 드라마를 압도해버리지 않을까 오히려 걱정됐다.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 테이크에서 오케이를 외치는 이준익 감독의 속도감은 신기했다. 홍콩에서 잠깐 딴청피운 사이 벌써 40% 가까이 촬영을 끝내버렸다. 나이트클럽에서의 두 연주장면에 앞서 20대 로커 현준이 40대 밴드 활화산에 끼게 된 사연부터 보게 됐다. 현준을 앞에 놓고 세 중년 사내가 신나게 연주를 시작한다. 그걸 보는 현준의 얼굴은 무표정이다. 이 감독은 현준에게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관객은 몰라야 돼”라고 주문했던 터였다. 현장편집기로 두숏을 붙여놓으니 나도 모르게 ‘킥’ 웃음이 삐져나온다. 액션과 리액션의 엇박에서 나오는 코믹인데 이준익 감독은 이를 ‘벗센스’(butsense)의 미학으로 높이 샀다.

“대부분의 한국영화는 andsense지. <총알탄 사나이> 같은 nonsense나 과잉전달의 oversense는 잘 없으니까. 내 영화는 벗센스를 추구해. 그런데 벗센스를 잘못 쓰면 분절감 때문에 굉장히 산만해져. 그래서 신과 신 사이의 주파수를 잘 맞춰야 해.”

어려운 얘기였다. 신과 신 사이는 이중의미를 담는 비약이 있어야 하고 그 비약을 관객이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게 주파수 맞추기라고 했다. 연출력 여부는 이 솜씨로 논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왕의 남자>가 지닌 신과 신 사이의 점프 각도가 70도였다면, <라디오 스타>는 30도에 맞췄다고 했다. <즐거운 인생>은? “그 중간인 50도.”

연출의 신경이 신과 신의 ‘주파수 맞추기’에 몰려 있어서 그런지 숏과 숏 사이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이어갔다. 두 번째 테이크를 넘지 않고 한숏을 찍는 데에는, 하루 8~10시간 동안 수십숏으로 구성된 서너신을 넉넉히 찍는 데에는 현장편집기를 특별히 애용하는 수완이 엿보였다. 찍는 숏마다 바로바로 붙여보며 한개 신 내부의 흐름이 튀지 않게 딱 필요한 것만 효율적으로 촬영해갔다. 재밌는 건 O·S숏(over the shoulder shot: 인물 어깨 뒤에서 촬영)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최소 두 인물이 등장한다 싶으면 반드시 O·S를 걸었다. O·S숏이 너무 많으면 화면이 관습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컷과 컷으로 연결해가는 건 재미가 없어. O·S는 관객의 참여를 끌어내는 숏이라서 좋아.”

<즐거운 인생>의 촬영장에는 중요한 오케이 사인을 내는 감독이 두명 더 있다. 삽입곡의 작곡, 편곡부터 배우들의 연주까지 음악에 관한 한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음악감독 이병훈, 방준석. <라디오 스타> 때에는 방준석 음악감독 한명뿐이었지만 음악의 비중을 고려해 이병훈 음악감독까지 끌어왔다. 모두 프로젝트 그룹 복숭아 멤버다. 이병훈이 <언젠가 터질 거야>의 세 가지 버전을, 방준석이 엔딩곡 <즐거운 인생>을 만들었다. 장근석이 “방 감독님이 직접 부른 <즐거운 인생> 들어봤어요? 완전 U2예요. 죽음이에요.” 방 감독이 부끄러워하자 김윤석이 장근석에게 귓속말로 속삭인다. “90년대에 유앤미 블루라는 그룹으로 잠시 활동한 적이 있는데 신화 같은 음반을 남긴 거 모르지?”

그 방준석 감독도 <즐거운 인생>의 매력에 젖어 있었다. “대사 중에 이런 거 있잖아요. ‘세상에 좀더 개겼어야 하는데 너무 일찍 꺾었어’라고. 살면서 치이고 인생을 어느 정도 아는 시점에서 다시 개겨보겠다는 로커 정신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나한테는 아주 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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