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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판타지 <상어>

우연한 만남이 빚어낸 기적의 순간

김동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상어>는 판타지의 힘을 빌려 기적을 창조하고, 그 기적의 순간으로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작품이다. 영철(구성환)은 자신이 직접 잡은 백상어를 친구 준구(홍기준)에게 자랑하기 위해 대구로 향한다. 하지만 도박에 빠져 있는 준구는 영철의 전화가 귀찮기만 하다. 준구가 약속을 반복적으로 미루는 동안, 영철은 이제 막 감옥에서 출소한 유수(홍승일), 그리고 공원 주변을 하염없이 서성이는 미친 여자 은숙(김미야)과 조우하게 된다. 유수는 가족들이 기별도 없이 이사한 통에 정처없이 떠돌아야 하고, 은숙은 집단 강간을 당한 이후 정신을 놓아버린 상태다. 은숙은 영철이 친구를 위해 가져온 백상어가 썩어가면서 풍기는 악취를 자신이 사산한 아기의 냄새라고 착각하고, 영철와 유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은숙을 피해 대구의 골목길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영철은 그녀에게 썩은 백상어를 건네주고 또다시 준구를 찾아 길을 나선다. <상어>는 영철이 정작 만나야 할 준구와 엇갈리는 반면에, 만날 이유가 없었던 그들과 우연한 관계를 맺어나가게 함으로써, 그 조그마한 관계들이 빚어낸 기적 같은 순간을 영화의 정점으로 삼는다.

<상어>는 미니멀하게 대상을 관찰하려는 자세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과감한 생략 속에서 이야기를 전진시켜나가려 한다. 가령, 영화는 관객에게 이제 막 출소한 유수를 보여주지만, 왜 그가 감옥에 갔는지, 그리고 가족들은 왜 아무 연락없이 거처를 옮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제시하지 않는다. <상어>의 목적은 일반적인 대중영화처럼 인과율에 의해 구성되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연이 원인에 개입할 때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창출되는 모호한 세계이다. 어쩌면 <상어>가 원하는 기적 같은 순간은 바로 이러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이명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우연이 모여 창출되는 기적 같은 순간이 드러나는 짧은 장면은 두 시간 가까이 전개되는 영화 전체를 빨아들일 만큼 인상적이다. 은숙은 숨을 턱턱 막히게 하던 폭염의 공기를 식혀주는 단비 속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끔찍했던 악몽에서 벗어나 드디어 귀향길에 오른다. <상어>는 이 순간을 은숙을 태운 기차가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나 저 멀리 희미하게 반짝이던 불빛으로 향해 나아가는 시네마틱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 짧은 순간의 이미지 속에 <상어>는 지옥의 하계(下界)를 헤매던 은숙이 다시 지상으로 되돌아오는 귀향의 오디세이, 혹은 신화적 세계의 변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상어>가 망신창이된 삶 속에서 건져올린 희망의 빛을 소중하게 간직하려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현실이 아름답다고 옹호하지는 않는다. 특히 김동현 감독이 바라보는 눈앞의 현실은 바다 위를 활개쳤을 백상어가 대도시의 폭염에 의해 부패하면서 악취를 풍기는 상황과 유사하다. 실제로 친구를 찾아 대도시에 도착한 영철은 부패해가는 상어의 악취보다 더 지독한 경험을 반복하다, 이내 자신의 길을 잃고 만다. 또한 김동현 감독은 유수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되어 그 앞에 나타났을 때, 이러한 아이러니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임을 직시하고 있다. 아버지를 만나 ‘해피’하지만, 또한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의 모습이 비극으로 겹쳐질 때 느껴지는 아이러니 말이다. <상어>가 그려내는 영화 속 현실은, 부패하거나 혹은 아이러니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부패의 악취로 둔갑시키는 현실과 기적의 판타지, 이 둘의 갈림길에서 김동현 감독은 언제나 판타지쪽에 판돈을 걸고자 한다. 그의 전작으로 2004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단편영화 <배고픈 하루>에서 쩔뚝이던 아버지가 멀쩡하게 뛰어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그에게 기적 같은 판타지는 이러한 불완전한 삶을 치유하고자 하는 그의 소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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