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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경계긋기의 어려움

출퇴근 인생을 접은 뒤에도 의식(衣食)까지 접을 수는 없어 한 출판사의 군식구가 된 게 두 해 전이다. 한 달에 한 번 출판사에 나가 기획회의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내 일이다. 이 출판사는 서평용 책을 조선일보에 보내지 않는다. 새 천년 앞뒤로 안티조선운동이라는 것이 본격화하기 전부터 그랬다. 안티조선이 시민적 양식의 상징이었던 시절엔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지 않는 출판사들이 더러 있었다. 그 운동이 시들해지면서(거기 두드러진 공훈을 세운 이들이 대통령과 소위 ‘노빠’들일 게다) 그런 출판사들이 하나둘 줄어들었고, 이젠 내가 한 다리 걸치고 있는 출판사가 거의 유일하게 조선일보와 데면데면 지내는 모양이다.

객식구라는 인연도 작용해,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나는 이 출판사에서 책을 낸다. 내 책은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도 보내지 않는다. 내가 그리 부탁했다. 안티조선운동이 시작될 무렵에는 이 두 신문이 조선일보와 어딘지 달라 보이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그 차이를 또렷이 짚어내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조중동’이 세쌍둥이라는 판단을 내린 이상, 조선일보는 무뚝뚝하게 대하면서 동아일보 중앙일보는 살갑게 대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지난해에 무슨 책을 내면서부터는 ‘면납(免納)’ 리스트에 문화일보를 새로 올렸다. <미디어 오늘>에 인용된 문화일보 기사들에 몇 번 눈길을 주다가, ‘살굿빛 조선일보’라는 이 신문의 명성이 허전(虛傳)이 아님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출판사로서는 마케팅의 적잖은 부분을 포기하는 셈이다.

다른 출판사에도 내가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와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하는 걸 이 출판사가 기왕 원칙으로 삼고 있으니, 그 원칙을 낳았으리라 짐작되는 기준에 맞춰 다른 신문 몇을 거기 보탰을 따름이다. 딴 출판사에서 책을 낼 땐, 조선일보에 책을 열 부 보내든 동아일보 기자에게 기사 로비를 하든 출판사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 물론 출판사 쪽에서도 내가 이 신문들의 취재 요청을 거절하는 걸 양해한다.

몇 년 전, 한 서적 전문 웹진 기자가 그 즈음 내가 낸 책을 읽고 전화를 걸어와 인터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퍼뜩 무슨 생각이 떠올라 출판사 편집장에게 그 웹진에 대해 물었다. 걱정했던 대로였다. 그 웹진은 어느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경영하는 대형출판사에 딸린 것이었다. 나는 그 웹진 기자에게 전화해 정중히 사과하고 인터뷰 약속을 취소했다.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갑자기 일이 생겨 서울을 꽤 오래 비우게 됐다고만 말했다. 나는 연좌제를 두둔하지 않는다. 정서 수준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1980년 5월을 피로 물들인 내란수괴에게는 적의가 있을지언정 그의 아들에게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 이런저런 추문으로 제 아버지의 낯을 깎은 다른 전직 대통령 아들들에 견주어,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사업에 매진하는 그 지혜로운 처신이 외려 보기 좋기까지 하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그의 출판 사업이 저리 번창한 것이 전적으로 그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 힘입은 것만은 아닐 테다. 적어도 그 사업의 시초에는, 경영자의 아버지가 국부에서 갈취한 피묻은 돈이 들어갔을 게다. 그가 운영하는 매체에 대고 내가 내 책을 홍보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 손에 죽고 상한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내 ‘윤리성’을 뽐내고 있는 게 아니라 논리 강박을 털어놓고 있다. 그런데 두 달쯤 전 그 강박적 논리가 한 순간에 허물어지는 일을 경험했다. 알고 지내는 한 출판인이 어느 술자리에서, 내가 아무리 애써봐야 내 한 몸조차 깨끗이 건사할 수 없음을 일깨워 준 것이다. “C씨(전직 대통령 아들)가 커다란 책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선생님 책들 상당부분도 그 도매상을 통해 독자들에게 갈 겁니다.” 머리가 어찔했다. 얼마 되지 않는 내 독자들의 일부는 내가 그리도 관련되지 않고 싶어 하는 특정 자본을 통해 내 책을 만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신문에 내 책을 보내지 않고 그 신문들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 내 ‘자기만족적’ 실천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더 침울해졌다. 삼성의 기업윤리는 조선일보의 기업윤리보다 나은가? 내가 바라는 세상에 대해 삼성은 조선일보보다 더 너그러운가? 그럴 거라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삼성 제품을 기꺼이 사서 쓰는 내가 조선일보를 지네 보듯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한 쪽은 그저 물질을 팔고 다른 쪽은 거기 사악한 정신을 끼워 파니 둘을 나란히 놓는 것은 어불성설인가? 분명히 그런가? 그 둘은 늘 또렷이 구분되는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윤리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소시민으로서 내가 넘어서는 안 될 경계가 정확히 어딘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지천명을 코앞에 둔 나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