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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이해불능, 공포불가!

아귀 맞지 않는 퍼즐로 가득 찬 영화 <해부학교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새 두뇌훈련하는 닌텐도 DS 게임기가 유행이라는 데 게임기 살 돈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두뇌훈련하는 데 적합한 방법을 찾아냈다. <해부학교실>을 보면서 생각난 건데 공포영화, 특히 한국 공포영화들의 DVD를 빌려다가 쌓아놓고 보는 것이다. 추리영화도 아니고 왜 공포영화인가. 한국에는 추리영화라고 할 만한 장르가 별로 없는데다 공포영화들이 사실상 추리영화의 형식을 띠고 있다. 형식이라기보다는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왜? 어떻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추리활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해부학교실>을 보면서도 그랬다. 중간 이후로 넘어가면서 ‘왜 갑자기 저 사람을 죽이지?’, ‘왜 지금 저기를 들어가는 거야?’, ‘저 사건과 그 사건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끊임없이 질문을 하다보니 두 시간 동안 나오는 질문 개수가 초등학교 들어가서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서 내가 했던 질문들을 합한 것보다 몇개 더 많아졌다. 그렇게 계속 생각을 하고 머리를 굴리며 퍼즐을 맞추려고 애를 쓰다보면 닌텐도 DS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도의 지적인 두뇌훈련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도 평소의 나답지 않게 왜? 왜? 왜? 라는 질문을 머리에 품고서 이 상태라면 통합논술에 도전해 나도 의대생이 되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약 3초간 했다.

하지만 흩어져 있는 퍼즐 조각들이 영화가 끝나고도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거나 억지로 끼워맞춘 아귀가 영 시원찮게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게 공포영화 관람을 통한 두뇌훈련의 가장 큰 난점이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좀처럼 맞추기 힘든 연결고리들을 맞추려고 애를 쓰다보면 이성을 관할한다는 좌뇌는 발전하지만 감정을 관할한다는 우뇌를 못 쓰게 돼서 성격이 포악해지거나 무기력증에 빠질 수도 있고 또 왼쪽 머리와 오른쪽 머리가 비대칭이 될지도 모른다는 게 이 훈련이 낳을 수 있는 부작용이다.

<해부학교실>을 보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 중의 하나는 선화의 과거와 모든 사건의 중심이 되는 카데바의 과거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였다. 만약 카데바의 원한이 선화에게 빙의돼서 그녀가 메스를 든 것이라면 죽어야 하는 건 카데바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간 의사들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먼저 죽는 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만약 이 모든 살해사건이 선화가 말한 대로 누군가가 그의 목을 짓누르는 무의식 속 기억의 호출이라면 카데바의 사연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카데바의 주인공이 혹시나 선화의 진짜 엄마가 아닐까 싶었는데 엉뚱한 진짜 아빠가 갑자기 나타났다. 나쁜 짓 한 놈 따로 있고, 징벌받는 사람 따로 있다는 건 너무 큰 틀에서 뭔가 어긋나는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의사가 되려는 아이들의 불순한 의도에 대한 징벌이라고 말했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전교 1등 소녀가 의사가 돼서 엄마를 편하게 해주겠다는 소망을 불순한 것으로 몰아세워 가장 먼저 죽이고, 사실상 가장 악질, 잔인한 생체 실험을 주도했던 명망있는 의사는 똑같이 나쁜 놈한테 죽다니 이건 윤리적 징벌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균형이 맞지 않아 보인다.

큰 가지에서 뻗어나간 이해불능의 잔가지들은 더 많다. 지저분한 작업실에 생뚱맞게 놓여 있던 카데바는 무엇이며(사실은 귀신?), 죽은 학생들의 시체에서 심장이 없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선화가 죽인 다음 한지우 교수가 냉큼 나타나서 심장을 떼어간 것일까? 그럼 부녀연쇄살인단?). 가장 안습은 외꾸눈 의사 정찬의 등장인데 도대체 그가 왜 등장하는 지, 마지막에는 왜 선화에게 하나 남은 친구의 살해를 북돋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하지만 더이상의 두뇌훈련은 중지하려고 한다. 내 성격은 소중하니까. 안 그래도 인간관계 앙상해지고 있는데 괜한 논리학습 시리즈에 빠져 그 메마른 성격 더 메말라지는 불행한 결과는 낳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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