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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류승범 형제의 `버라이어티 토크쇼` [1]
이영진 황혜림 2001-10-26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을 때 영화가 있었어”

처음에는 난항이었다. 단편 4부작을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낸 16mm 저예산 독립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극장에 개봉시키는 `사건`을 일으키며 지난해 각종 영화상에 오르내렸던 감독 류승완과 배우 류승범. 이들 류 브러더스가 지난 1년 동안 벌인 영화기행에 관한 `쾌도난담`을 목격하리란 즐거움에 자못 들뜨기까지 했지만, 둘의 신작 <피도 눈물도 없이> 촬영장으로 향하는 8인승 차 안에서 우선 형제의 예상치 못한 `협공`부터 막아내야 했다."우리도 다른 형제들이랑 다를 게 없다니까요.""형제라 뭐 다르지 않냐고 많이 질문하는데, 꼭 외계인이 된 것 같아요."쉽게 속내을 드러내지 않는 형제들과 쉬이 수다스러워지지 않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1시간은 잠깐, 이버에는 자청한 길고 긴 인내력 테스트를 견뎌야 했다. 톱밥 날리는 인천의 한 공단지역에 도착하자마자 다수 수다를 꾀했다가 작전 변경, 밤샘 활영이 지나고 1시간을 더 내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결과였다.수은주가 뚝뚝 떨어지는 차디찬 새벽을 얇은 옷가지로 견뎌야 했지만, 열심히 형의 주문에 귀기울이며 몸을 던지는 동생이나 동생의 연기에 키득거리며 즐거워하는 형. 추위에 움츠리면서도 혈기가 도는 얼굴의 스탭들로 쉬지 않고 들썩이는 현장을 지켜보는 동안 슬쩍 옷을 여미던 손길이 쑥스러워지곤 했다. 마침내 기다리던 해가 떠오르고 촬영은 끝났으나, 이번에는 노곤해진 육체가이들의 입담을 방해했다. 밤새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류승완으리 눈은 충혈된 지 오래였고, 밤새 스탭들과 어울리며 액션 연기를 펼쳤던 류승법의 팔다리는 탈진한 상태였다. 그날 저녁 늦게, 또 한번의 만남이 마련된 건 그러한 연유에서였고, 뒤늦게 발동걸린 류 형제의 두 번째 수다는 3시간을 훌쩍 넘겨 계속됐다.

떠도는 풍문, 우리는 거부한다.

류승범(이하 범) | 형한테 묻고 싶은 거는…잘 모르겠는데. 원래 가족이 더 얘기 안 하고 그런 거 아닌가.

류승완(이하 완) | 그렇지. 기복도 있고. 둘이 서로 기분 좋을 땐, 막 레슬링하고 그러고. 누워 있는데 괜히 와서 엉덩이를 발로 차고 그러고. 뭐 수다도 떨긴 하지만.

범 | 다른 형제랑 틀릴 것도 없는데 내가 배우고 형이 감독이라서 가끔 뭔가 다른 걸 기대하는 질문을 받으면 무슨 외계인이 되는 것 같아. 다 똑같은데. 그냥 기분 좋으면 형이고, 아니면 남이고. 사람 사는 게 뭐 다를까. 그런 시선들 자체가 우리를 뭔가 동떨어지게 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을 텐데 왜 그런 걸 묻지? 그러면 또 일부러 생각해서 끄집어내야 되잖아. 우리가 어땠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오히려 많이 알지 못하지만, 지금 고민하는 영화나 연기에 대한 문제, 그런 걸 질문하면 내 생각들이 좀 정리가 되는데, 사적인 것들은 대답을 하면서도, 혼자 이럴 때가 많아. 내가 좀 틀리게 사나? 사람들은 이렇게 안 살고 있나…?

완 | 나도 언제부턴가 아, 사적인 얘기 많이 하지 말아야겠다, 한 게 어떤 인터뷰에서 헤드 카피가 뭐 고학력 아내 만났고, 영화 반응도 좋고, 요즘 행복합니다, 이렇더라구. 돌아버리는 줄 알았잖아.

범 | 인터뷰라는 게 처음에는 굉장히 즐거웠는데. 아, 이런 것도 있구나 싶고. 셋 이상만 아니면 괜찮거든.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니까. 근데 하다보니 왜 인터뷰를 기피하는지를 알 거 같아. 기본적인 정보들은 아니까, 또다른 정보를 얻으려고 하다보면 사적인 얘기로 가잖아. 사적인 걸 숨길 필요는 없고, 신비주의를 컨셉으로 잡고 있고 그런 건 아니지만. 거기다 항상 사진을 웃고 찍고 하다보니까 나도 다친다는 건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아. 어떨 땐 정말 화가 날 때가 있는데, 정말 싸움은 못하지만 진짜 싸우고 싶을 때도 있어.

완 | 그렇게 하면, 류승범, 또 폭행? 연예계가 들썩, 이게 웬일? 그런 거 가지고 한달은 가잖아. (웃음) 아, 우린 그런 건 없지. 다른 형제들같이, 재산상속 가지고 그러진 않지. 가진 게 없으니까.

범 | 내가 입을 청바지를 형이 입고 나갔다고 화내고 그런 것도 없지.

우리는 이렇게 카메라 앞과 뒤에 섰다

완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건 승범이가 DJ 생활하면서 가졌던 연예계에 대한 환상을 스스로 깨보라고 출연시킨 건데. 결국 직업배우를 하나 더 낳은 셈이 됐어.

범 | 그때는 무지 혼란스러웠어. 내가 좋아하던 일을 손에서 놓고서 미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던 때였으니까. 방황기였지. 그러면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자는 이야기를 들은 거고, ‘영화’를 하겠다기보다 뭔가를 ‘한다’는 게 더 절실했고, 영화는 형이랑 같이할 수 있는 일이어서 끌렸죠.

완 | 유일한 혈육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컸을 거야. 나도 그땐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이제 세상에 둘뿐이구나 했으니까.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가나 싶었는데…. 그땐 정말 영화고 뭐고 다 포기해도 좋다, 공사장 ‘노가다’를 뛰든 아니면 막말로 어디서 2인조 소매치기를 하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뭐 그랬지. 다행히 ‘영화’가 있었어.

범 | 둘 다 꿈이 있긴 했는데, ‘긴가 민가’ 하던 시기였던 것 같아.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DJ가 되겠다는 꿈만 꾸던 나도 현실을 보게 됐으니까. 나한테는 꿈인데, 사람들한텐 그게 현실이더라구.

완 | 그래도 동네 학원 끝나고 집에 가던 애들 상대로 삐끼하면서 고구마 팔던 시절이 재밌었어. 그게 아마 둘이 똘똘 뭉쳐 처음 한 일이었지. <현대인>이 부산단편영화제 본선에 올랐다는 전화를 배달 주문 전화로 잘못 알고 좋아할 정도였으니. 그걸로 영화를 계속 찍을 만한 상황이 돼서 다행이었어. 아니었으면 인생 정말로 칙칙했을 텐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들어가긴 했는데, 처음 하루이틀은 남들 앞에서, 카메라 앞에서 뭘 꾸며서 한다는 걸 힘들어하는 게 보이던데. 물론 나중에는 스탭들이 억 소리가 날 정도로 놀아댔지만.

범 | 나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상환이랑은 많이 비슷해. 카메라 앞에서 배우와 류승범 사이에서 괴로워하면서 찍은 흔적까지 남아 있으니까. 앞으로 뭘 해도 나랑 가장 비슷한 역할일 거야. 물론 무슨 다큐멘터리를 본 것처럼 나랑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 좀 황당하지만. <다찌마와 리>는 자유로워서 좋았던 것 같아. 장난치는 느낌이랄까. 그런 것 있잖아. 카메라에 대고 ‘메롱’ 하고, ‘이건 몰랐지’ 하며 꼭 놀리고, 놀림당하는 심정으로 했으니까.

완 | 그 뜨거운 여름에 벌한테 쏘여가며 하루에 40컷씩 진행하느라 힘들긴 했지만, 원희 형도 그렇고 이윤성, 안길강, 한승희 같은 다른 배우들도 호흡이 너무 좋았어. 감독은 배우보고 상황은 이렇고 톤은 저렇다는 이야기만 하고서 빠지면 배우들이 잔 동작까지 다 만들어서 놀았고, 스탭들은 어차피 후시니까 맘놓고 낄낄대고…. 다들 무슨 쇼 보러 온 구경꾼 같았지. 아마 메이킹이 공개되면 초대박이 될 거야.

범 | 그때 원희 형 보면 백만불짜리 표정이잖아. 처음엔 배우는 저래야 하는구나 무조건 따라하려고 했어. 근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더라고. 내 방식대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난 너무 테이크를 많이 가면, 갈수록 감을 잃어버리거든. 그땐 정말 내가 미워지는데. 앞 테이크의 실수가 그대로 옮아오는 거야. 넘어서질 못하는 거지. 그처럼 감정이 반복되고 무뎌지면 속상하지.

완 |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어땠는데. 테이크가 많았나.

범 | 아니, 임순례 감독님은 형처럼 안 그러셔. 그냥 조용히 ‘한번 더 가죠’ 하시니까. 그런데 가끔 배우 입장에선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줬으면 할 때가 있어. 그러니까 테이크를 다시 갈 때 기술적인 포커스가 문제인지, 아니면 배우 때문인지 말 안 하고 그냥 가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많은 계산이 오고가. 내가 뭘 잘못한 거지, 한다니까. 배우는 그대로 가면 됩니다. 연기 좋습니다 하면 다른 걸 고민할 시간을 버는데, 그게 아니면 복잡해지지. 감독과 배우 사이에 사전에 완벽한 교감을 나눴으면 해결되는 문제이지만.

완 | <피도 눈물도 없이> 현장하고 틀리네. 컷 하고 나서 “혹시 모르니까 빨리 한번 더”, 그러잖아. 그런 생각할 시간도 없이 들어가는 거니까. 그래도 난 그런 말 많이 해주는 편 아니냐?

범 | 그런 셈이지.

완 | 다 내가 연기자 출신이어서 그렇지…. (웃음)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세번 만에 오케이 받았다니까.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너한테 권한 건, 나하곤 완전히 성향이 다른 감독님이고, <우중산책>이나 <세친구>를 재밌게 본 데다 이 사람이면 배우한테 장난치는 감독은 아니라는 ‘믿음’ 같은 게 들어서였어. 영화 보면 알잖아. 임 감독님 같은 연출자랑 한번 작업을 해보면서, 네 자신이 배우가 될 수 있는지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범 | 임 감독님은 나에게 평생 풀어야 할 숙제를 던져준 분이지. 내 에너지만 쭉 빼가는 감독님은 아니야. 그랬더라면 내 연기가 만족스럽더라도 발전이 없는 셈이니까. 배우로서의 무게감이나 진지한 자세 등을 돌아보게끔 했어. 스스럼없이 전화하는 사이까지는 못 됐지만, 내게 고민을 하게끔 만들었으니까.

완 | 류승범이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는 건 굉장한 변화지. (웃음)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연극배우 출신 배우들을 따라다니더니 “형, 나 무대에 서보고 싶어” 하질 않나, 여러 번 날 뜨악하게 만들었으니까. 설렁설렁 간다면 결국은 사상누각이거든. 처음엔 손이 갈라지더라도 땅을 든든하게 해야 해. 하여튼 임 감독님이 많은 걸 가져다줬네. 범/ 현장에 발을 디뎠을 때 덮치는 낯설음 같은 건 아무래도 좋고, 카메라 앞에서 놀 수 있는 건 상대배우에게 집중하면 되는데, 가끔 상대배우가 없어서 사각렌즈와 대면할 때는 카메라가 낯설어. 자주 내 시선 좀 잡아달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고.

완 | 알 파치노도 시선 잡아달라는 건 마찬가지일 거야.

범 | 카메라가 못 잡는 걸 보는 배우들도 있잖아.

완 | 사실 영화는 카메라가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 같아. 난 아직도 노출이 몇일 때 조리개를 얼마에 놔야 하는지 몰라. 동료들이 없었으면 영화 찍는 건 불가능했어. 촬영만 하더라도 내 첫 단편을 맡아줬던 장준환 감독, 그리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조용규 기사가 없었다면, 글쎄. 어쨌든 그 사람들하고 같은 그림을 그릴 줄 알면 돼. 젊다고 해서 고집 내세우지 않고, 대신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면 되니까. 그게 힘이 되는 거지. 지금 <피도 눈물도 없이>의 최영환 기사만 하더라도 미리 앵글부터 잡아놓고서 묻는다고. 그럼 내가 “좀더 들어가면…” 하고 받는 거지. 그러면 또 최 기사가 다시 조언해주고. 사실 내가 다 할 수 있다면 원맨 시스템으로 가야지. 그런데 또 그게 고민을 안기는데,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이 연출뿐 아니라 사람을 설득할 줄 아는 정치가여야 하긴 해. 근데 지금 현장에선 난 파쇼일 뿐이지. 새벽까지 촬영할 때면 소리지르고, 좋은 장소 보면 걸어가다가도 저기서 찍어야 하는데 하면서 섭외하라고 시키고. 한편 만들 때마다 주변에 상처를 많이 주는 것 같고. 이기적이 돼가는 것 같아.

범 | 스탭들 배려하고 빨리 찍고 그래도 결과가 안 좋으면 좋던 현장분위기는 금세 없어진다고 했었잖아. 나중에 아 그 새끼, 이런다고. 근데, 정말 저 감독하곤 다신 안 한다고 할 정도로 ‘빡세게’ 찍어도 영화가 좋으면 선물 들고 찾아간다고. 감독이 주관이 있고, 그것에 대해서 밀어붙이면 배우도 현장에서 그 에너지를 느끼는 것 같아. 매 테이크마다 자신을 질책하게 되는 거지. 교감이란 그런 게 아닐까. 물론 지금 내 입장에서는 저 연출자가 원하는 걸 아는데, 머리나 가슴으론 알겠는데, 내 몸뚱이에서 안 나올 때는 굉장히, 가슴이 아파. 막 울고 싶고.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의 기분 같은 거.

완 | 저번에 <피도 눈물도 없이> 카체이스를 찍는데, 정두홍 감독이 탄 차가 붕 떠서 전복되는 장면이었어. 난 전복되는 순간 바퀴가 윙윙 도는 장면을 오래 잡고 싶어서 컷을 늦게 불렀거든. 고작해야 2∼3초 차이지만, 나중에 보니 다들 배우가 안전한지 어떤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거야. 근데 필름에 어디까지 이미지가 맺혔나만 난 생각하고 있었어. 컷 하니까 ‘와’ 하고 달려드는데, 그때서야 감독이란 직업이 지랄 같은 것이구나, 정신이 들더라.

범 | 근데 솔직히 배우를 배려하는 건 좋은 의자와 마실 것이 아니야. 매니저도 내가 뭘 먹고 싶어하나보다는 다음 장면에서 내가 뭐가 필요한지를 알아주는 게 좋아. 적어도 콘티 정도는 손에 들고 미술팀에 가서 다음 장면 소품을 챙겨주는 게 배우한테 필요한 매니저인 것 같아.

완 | <피도 눈물도 없이>처럼 숏이 많고, 클로즈업 많고 이동이 많으면 내가 연기자들 위치를 정확히 맞춰줘야 하잖아. 근데 그게 쉽지가 않지. 나도 해봐서 알지만 (웃음) 배우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상처를 잘 받냐. 감정 몰입도 벅찬데, 감독은 여기서 3분의 2 걸음만 옮겨주시고, 고개 각도는 위로 45도로 들어주시고, 포커스는 왼쪽 눈에 맞게 됩니다, 하면 얼마나 힘들겠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마지막 장면 찍을 때도 배우들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했다잖아. 이동차 타고 태권브이 포즈 취하고 그러니까. 특히 이혜영 선배 같은 경우는 오랜만에 현장에 오셔서 연기를 하는데 당황스러워할만 해. 애들이 “각 안 나와?” “그러면 들고 찍어” 하고 설쳐대니. 무슨 대학생들 실습영화도 아니고. 한 장면 끝내고 말 좀 붙일라치면, “자 넘어질 준비 됐죠” 묻고서는 “의상팀, 청테이프로 아대 좀 채워줘” 그러니 나처럼 배우에게 불친절한 감독도 없을 거야. 다행히 전도연씨나 이혜영씨가 잘 적응해줘서 이렇게 살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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