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사랑의 균열과 실패에 관한 이야기 <행복>
김혜리 2007-10-03

허진호 연가 작품번호 4번.‘사랑을 잃고 우리는 우네.’

해묵은 유행가 한 소절을 아무거나 읊조려보라. 열에 일곱은 <행복>과 공명하는 대목이 있을 것이다. <행복>은 스스럼없이 통속적인 이야기다. 무책임한 남자가 헌신적인 여인과 사랑을 나누다 배반한다. 게다가 그녀는 치명적 병마의 포로다. 허진호 감독은 이번에도 흔한 연애담의 그릇에 울림을 담으려 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그리고 ‘4월의 눈’이라는 해외 개봉 제목을 가진 <외출>에서, 계절은 줄곧 중요한 요소였다. 네 번째 영화 <행복>은 여기 덧붙여 허진호 영화의 사계(四季)를 헤아려 보게 만든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미처 시작도 못하고 접은 사랑의 꿈을 그렸고, <봄날은 간다>는 한여름 녹음처럼 영원할 것만 같던 젊은 날의 연애담이다. <외출>의 사랑은 배우자에게 배신당한 기혼 남녀에게 쓸쓸한 얼굴로 찾아왔다. 새 영화 <행복>에서, 사랑의 시제는 과거완료다. 인물의 여정이 끝났을 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정서는 겨울 바람처럼 살을 에는 회한(悔恨)이다.

방탕한 서울 남자 영수(황정민)는 간경변이 악화되고 경영하던 바까지 도산하자 시골 요양소‘희망의 집’에 몸을 의탁한다. 적응이 느린 영수에게 다가서는 사람은 요양소에서 8년을 기거한 폐농양 환자 은희(임수정). 평생 죽음을 벗삼아 살아온 그녀는 강인하다. 용기를 내 사랑에 빠진 영수와 은희는 요양소를 나와 빈집을 보금자리로 삼고, 서로를 간호하며 행복해진다. 그러나 먼저 병에서 회복한 영수는 바깥 세계를 곁눈질하기 시작한다. 도시에 두고 온 화려한 생활과 옛 애인 수연(공효진)이 손짓하고, 별안간 길어진 미래는 그를 압박한다. 비겁한 남자는 술의 힘을 빌려 애원한다. “니가 날 떠나주면 안 되겠니?” 소꿉놀이는 끝났다. 누군가가 그를 부르자 남자는 훌쩍 놀이터를 뜬다. 그러나 남겨진 여자에겐 불러줄 이가 없다. 동병상련의 착각은 <행복>이 지닌 슬픔의 뿌리다. 처음 만났을 때, 영수가 고아라서 방문객이 없다고 둘러대자 자기도 고아라고 털어놓았던 은희는 가벼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영수의 사랑도 영수의 병도 은희의 병과 사랑만큼 무겁지 않았다.

<봄날은 간다>의 김형구 감독이 다시 잡은 <행복>의 카메라는 멈추어 서는 대신 무릎걸음으로 인물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허진호 감독은 여전히 영화적 기교에 대해 결벽하다. 플래시백은커녕 아주 소박한 기교도 아껴쓰며 장면을 열거한다. <외출>에서 잠깐 숨죽였던 감독의 장기- 연애의 시시덕거림과 소소한 감정을 잡아내는 촉각은, 배우들의 능동적 연기와 맞물려 되살아났다. <행복>의 쓰라린 순간 중 하나는 말없는 시선의 엇갈림에서 나온다. 영수가 환멸을 드러낼 즈음 둘은 해변에 놀러 간다. 은희는 뒷걸음질까지 치며 영수와 눈을 맞추려 하는데, 영수의 시선은 그녀의 어깨 너머 바다를 향한다.

<행복>이 흥미로운 까닭은 그것이 사랑의 균열과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서다. 우리는 왜 행복을 견디지 못하는가? 왜 사랑을 지키지 못하는가? 그것은 영원히 긴급한 질문이다. 하지만 <행복>은 정작 영화의 관점을 힘주어 형상화해야 할 후반부는 상투적 상황 전개와 급한 호흡으로 달려가는 반면, 전형적인 사랑의 전개부에 많은 시간과 풍성한 디테일을 할애해 아쉬움을 남긴다. <행복>의 또 다른 차별성은 전편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일 것이다. 인물을 중환자로 설정한 동기를 감독은 “더 잃을 것 없는 사람들끼리의 사랑이 행복해 보여서”라고 밝혔다. 그러나 죽음이란, 심리적 조건으로만 머물기에는 너무 위력적인 실체다. 육체의 고통은 때로 정신을 거꾸러뜨릴 만큼 포악하고 징그럽다. 질병의 악취를 전하지 않는 <행복>에서 죽음은 인물의 일부라기보다 플롯의 일부로 보인다. 허진호 감독의 대답은 다음 작품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염두에 둔 차기작의 원작은, 오랜 간병 끝에 아내의 장례를 치르는 중년 남자의 심경을 쓴 김훈의 소설 <화장>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