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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후면비사] 국제영화제 참가자는 인사청문회 필수?
이영진 2007-10-15

“국가 대표 외교사절단” 이유로 정부개입, “빈곤한 농촌 생활” 묘사한 영화 출품 제지도

<돈>

“이날 시공관에서는 개관 전부터 구경꾼들로 들끓고 있었으며 유리창 깨지는 소동까지 있었다… (중략)… 7명의 미인들이 ‘스폿트·라이트’가 어른거리는 무대 위에서 수영복만을 입고 날씬한 포즈로 맴도 돌고 옆으로 섰다 뒤로 섰다 하는 동안 관중은 숨소리까지 죽이기도 하였다.”(<경향일보> 1957.5.20, <한국여성문화사2>에서 재인용)

50년 전에 처음 치러진 미스코리아대회 풍경이다. 어깨와 허벅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파격 패션의 여성들을 맨눈으로 구경하기 위해 남성들은 거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1959년에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교통안전여왕선발대회’까지 열렸는데, 이 행사에서까지 수영복 심사가 이뤄졌다고 한다. 미스코리아는 각종 미인대회 열풍을 불러일으킨데다 미를 평가하는 잣대까지 완전히 바꿔놓았다.

미스코리아대회가 이처럼 세인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던 건 비단 노출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성들이 아리따움을 겨루는” 종전의 경염(競艶)대회와 달리 미스코리아에는 ‘국가를 대표하는 미의 사절’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붙었다. <한국일보>가 1957년에 처음 주관한 미스코리아 행사는 “미스유니버스대회에 파견할 대표를 선발하기 위한” 사전 테스트였다. 풍만한 가슴과 길고 곧은 다리를 소유한, 서구인들의 팔등신에 기죽지 않을 ‘글로벌 스탠더드’ 체형의 여성이 되기 위한 노력은 지극했다. 1960년 <가정교육>에 임형신은 “모름지기 어머니들은 자기 모양만 낼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미인을 창조하는 데 깊은 관심과 노력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다. 호소가 먹혔는지, 1964년부터는 리틀미스코리아대회도 개최됐다.

원조국가의 이미지를 씻고 세계인의 당당한 일원으로 자리하고 싶었던 것일까. 충무로도 이런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1958년 <국제영화> 3월호에 실린 ‘아시아영화제 파견을 둘러싼 여배우들’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릴 제5회 아시아영화제를 앞두고 영화계가 참가 여배우 선정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고 있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 대규모 참가단을 파견하며 국제영화제의 첫 신고식을 치렀고, <시집가는 날>이 희극(喜劇) 부문에서 수상해 “민간외교에 있어 일대 개가를 올렸”지만, 당시 참가 여배우들이 파티 석상에서 “일본인의 게다 짝이 그리웠다”는 등의 실언을 내놓거나 호텔에서 빠져나가 개인행동(?)을 취하는 등의 일로 국가적인 망신을 당했는데, 이런 일이 두번 다시 있어선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엄포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국제영화>는 당시 활동 중이던 7명의 여배우를 거론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사절이며 우리 문화수준을 소개하는 인사”로 적절한지 여부까지 따져물었다. 이른바 인사청문회인 셈인데, 그 기준이 오락가락, 별로 신뢰가 가진 않는다. 이를테면 OOO양은 스캔들이 많아 문제이긴 하지만 “한국무용을 전공했기 때문에” 기필코 참석해야 한다고 부추기고, OOO양은 출연작이 많지 않으나 “누구보다 외교에 능하고 영어 실력이 출중하니”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1950년대는 연간 해외여행자 수가 외교관을 포함해도 5천명이 채 되지 않던 때였다. “외국 문물을 구경하는” 기회가 가장 많았다던 1958년을 기준으로 해도 그렇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격이었으니.

이런 중대사에 정부가 참견 안 할 리 없다. 제5회 아시아영화제를 앞두고 충무로에선 출품작 선정을 둘러싼 웃지 못할 공방도 벌어진다. 애당초 제작자협회에서 출품작으로 결정한 영화는 <그대와 영원히> <> 등 2편. 하지만 정부는 “<>에 묘사된 농촌생활이 어둡고 빈곤하다”는 이유로 출품을 허락지 않았고 이에 제작자협회는 출품작을 급히 <청춘쌍곡선>으로 교체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영화제는) 그 나라의 사회제도나 국민생활 실태를 스크린을 통해 그 빈부를 가려보자는 것도 아니오. 각국의 영화 설비의 우열을 가리기 위함도 아니라”는 비난이 없지 않았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추태는 계속됐다. 강원용 목사는 <역사의 언덕에서>에서 1966년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맡았으나 중앙정보부가 형편없는 ‘장개석 선전영화’에 그랑프리를 안기라고 명령했다며, “영화를 영화로서 평가할 수 없는 것이” 정상이던 시대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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