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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신설국> -김진호 목사
2008-02-29

동해시 허름한 여관에서 떠올린 눈의 고장

가장 훌륭한 요리사는 ‘시장기’라고 한다. 거기에 추억이 가미되면 ‘맛의 기억’은 오래도록 저장된다. 할머니와 단둘이 서울 변두리, 신주택지로 막 개발되던 농촌 마을의 빈집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한때― 그 동네엔 집이 여섯채 있었는데 우리를 포함해 두 가구만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끓여준 고추장찌개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옆 마을 밭에서 사온 양파 조금과 고추 조금 그리고 감자 조금이 전부인, 양파와 감자가 흐물거리도록 푹 익어 걸쭉해진 찌개, 목소리 예쁜 여자아이가 부른 <아빠의 얼굴>이 어린이방송 시그널음악으로 들릴 때 반찬도 없이 거의 매일 찌개 하나만으로 저녁을 먹었다. 막 사춘기를 맞은 소년의 설렘이 할머니의 찌개 맛 속에 반찬처럼 어우러져 마음속 어딘가에 아련한 추억으로 저장되어 있다.

내 마음속의 영화도 ‘정신의 시장기’와 얽히면서 추억으로 저장된 여러 편이 여전히 회상의 힘을 받아 생생한 기억으로 불끈거린다. 고3 예비고사를 끝내고 대학입학원서 값으로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며 봤던 <닥터 지바고>, 대학 시절 종교적 갈등에 휩싸여 있을 때 유랑하는 자유의 가능성에 눈뜨게 한 <갈매기 조나단>, 재주에 막히고 권력에 막혀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던 글쟁이의 자괴감이 기묘한 자만심으로 전환되던 무렵의 심리적 알리바이가 됐던 <폴라 X>, 홀로 사는 중년의 멜랑콜리에 허우적대던 어느 날 여자 친구가 불쑥 내민, 탱고 추는 다리의 얽힘 속에 이방인간의 존재의 얽힘을 발견하고 관계에 설레했던 <탱고 레슨>, 그 밖의 여러 편.

하나하나 명품들이지만 그 품격을 알아차릴 만큼의 감수성이 일천한 이에게 회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그때마다 절묘하게 영혼의 시장기가 얽혀들었던 탓이겠다. 한데 아직 열거하지 않은 몇편 중엔 별로 명품스러워 보이지 않아, 글이나 말로 재생하길 주저했던 것들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중 하나를 말하고픈 충동을 자제하지 않기로 했다.

가벼운 우울증에 시달리다 문뜩 짧은 여행길에 올랐다. 오래전 읽은 윤대녕의 <신라의 푸른 길>의 경주에서 동해로 가는 버스 안의 느낌을 재현해보고자 했다(나의 부실한 기억은 강릉을 동해로 착각했다). 육지와 바다 사이, 그 경계 위를 흔들거리며 달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싶었던 것이다. 일상인 나의 존재감과 비일상인 여행이 겹치면서도 나뉘는,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것의 모호한 연결을 기대한 것이었다. 대개 그렇듯이 그런 기대는 실현되지 못했다.

한데 엉뚱하게도, 동해시의 허름한 여관에서 영화 <신설국>이 떠올랐다. 주인공의 연기나 극의 구성에 거의 공감할 수 없었기에 ‘좋은 영화’로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 실패한 나의 짧은 여행에서 일기장에 메모할 거리를 남겨줄 줄은 생각지 못했다. 20년도 더 전에 읽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의 회상의 힘은 여전히 나를 압도하고 있었고, 특히 그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雪國)이었다”는 세월이 꽤 지난 지금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왜 가와바다는 니가타 현으로 가는 현(懸)의 경계를 ‘국경’이라고 했을까, 몇년 전 문득 오래된 기억이 물음으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이 실감나지 않은 여행은 엉뚱하게도 전혀 무관한 듯 보였던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해명에로 나를 이끌었다.

가와바다의 탄생 100년을 기념해서 저술했다는 패러디소설 <신설국>은 읽지 못해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을 영화로 만든 <신설국>은 <설국>의 시작과 같은 문장을 내레이션으로 하여 시작한다. 삶에 절망한 채 자살을 생각하며 얼마 안 되는 돈을 다 챙겨 존재의 마지막을 소비하고자 했던 중년의 남자는 설국에서 한 게이샤와 사랑에 빠진다. 40대 남자와 20대 여자의 만남, 희망없는 내일을 삭제하기로 하고 오늘만을 기억하려는 이들간의 얽혀든 감정, 보수적인 도쿄 중산층의 일상을 몸에 담은 채 중년을 살아왔던 남자와 일탈의 공간에서 성적(性的) 지배문화 경계 밖을 사는 여자의 사랑. 영화가 담고자 했던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근데 영화 속 설국의 정경은 집도 나무도 거리도 모두 뭉뚝하고 두루뭉술한 세상으로 만들어놓았다. 경계들의 뾰족한, 날카로운 선을 덮어버리는 세상이 기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익숙한 정경의 기묘한 낯선 느낌, 이게 설국인 것이다. 필경 거기에서 불가능한 남녀의 엮임과 사랑은 국경/경계를 월장하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다시 국경을 되돌아 일상의 공간으로 복귀한다. 자살의 결심은 생의 활력으로 전환되었고, 그 사이엔 여자의 구원론적 죽음이 있었다. 남자의 구원을 위해 여자를 죽여야 했던 작가의 남성적 시선은 소설적/영화적 전환의 알리바이 때문이었겠다. 혹은 구원의 값비싼 비용에 관한 종교적 심성이 강박으로 남아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설국은 국경 저편의, 인습 저편의, 편견 저편의 구원 체험의 일탈적 공간이라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설국으로 가는 터널은 인습에 묶여 월장하지 못하는 국경 밖으로의 가능성을 향한 일탈적 구원체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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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목사·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계간 <진보평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