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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단편] 죽음과 비상에 대한 경쾌한 단상
정재혁 2008-03-06

김한누리 감독의 <죽고 싶다는 것과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

죽음과 비상, <죽고 싶다는 것과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행위에 대한 가벼운 단상이다. 무슨 일 때문인지 자살을 결심한 남자는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리려 한다. 하지만 그때 어깨에 빨간 망토를 두른 소년이 슈퍼맨의 비상을 따라하며 아파트 골목을 지나 옥상까지 올라온다. 세상에 낙심한 남자가 소년의 천진난만한 장난을 본 순간 그는 자신의 행위가 하늘을 날려는 소년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죽음과 비상, 전혀 다른 이 두 행위는 아파트 옥상에서 우연히도 겹친다.

김한누리 감독의 8분짜리 단편 <죽고 싶다는 것과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은 정말 8분 안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야기보다는 행위의 의미를 단편적인 이미지에서 짚고 들어가는 이 영화는 인물의 심리, 사건의 개연성을 따지기보다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는 두 남자의 짧은 순간에 포커스를 맞춘다. 발상은 신선하지만 영화 자체도 거기서 멈추어버린다는 게 이 단편의 가장 큰 약점이다. 하지만 <죽고 싶다는 것과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은 남자가 소년을 구하기 위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카메라를 잠시 돌려 템포를 늦춘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다른 공간을 응시할 줄 아는 여유. <죽고 싶다는 것과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은 소재를 가볍고 상쾌하게 다를 줄 아는 호흡을 지녔다.

경희대학교 연극영화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김한누리 감독은 <죽고 싶다는 것과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을 군대에 있을 때 구상했다. 휴가를 나와 테스트 촬영을 하고 시나리오를 수정하며 촬영은 2007년 제대한 뒤 3월에 들어갔다. 영화동아리 필름메이커의 동기, 후배들을 스탭, 배우로 불러 이틀 만에 촬영을 마무리지었다. 아파트 옥상의 문을 안 열어주려는 경비아저씨, 이웃들과 싸우며 고전하기도 했지만 촬영에 큰 차질은 없었다. 1주일에 한두편씩 함께 작업하는 동아리의 숙련도와 팀워크가 있어서일까. 김한누리 감독은 <죽고 싶다는 것과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 이후 <너보다 내가>와 <좋은 밤> 등 단편 두편을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더 찍었다.

김한누리 감독이 영화를 시작한 건 <쥬라기 공원> 때문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영화를 자주 보던 김한누리 감독은 중학교 3학년 무렵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후 연출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연극영화과에 들어와 연출 전공을 택했고, 공부를 하면서는 촬영과 조명에 대한 관심을 발견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너무 좋아” <괴물>의 조명부 막내로 들어가 일했고, <해부학교실>에서도 조명부 막내로 현장을 익혔다. “실제로 봐도 잘 모르겠다”며 농담 섞인 고백을 했지만 그는 현장에서 한편의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배웠다.

김한누리 감독은 특정한 이미지, 아이디어 하나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죽고 싶다는 것과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은 비상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했고 <너보다 내가>는 남녀 모두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는 설정에서 출발했다. 졸업작품인 <좋은 밤>은 추격장면이 찍고 싶어서 기획한 영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단점도 잘 알고 있다. “장편 시나리오 쓰기가 너무 힘들다”고 고백하고, 앞으로 “이야기를 어떻게 엮어나갈지를 고민하는 게 과제”라고 말한다. 다만 그에게 목표가 있다면 봉준호, 김지운 감독처럼 “군더더기 없는 웰메이드 영화를 만드는 것”. 조명과 촬영을 배워 “더 예쁜 화면을 만들기 위해 궁리하는 것”도 다 이 목표를 위해서다.

<죽고 싶다는 것과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의 엔딩 크레딧에는 인상적인 제공처가 하나 들어가 있다. 한누리충무김밥. 어머니가 운영하는 분식점이다. 김한누리 감독은 <괴물>과 <해부학교실>의 스탭으로 받은 돈에 어머니가 내주신 자금을 더해 영화를 찍었다. 아직 학생이라 촬영도 수업시간 틈틈이 쪼개 만들곤 한다. 아직은 고민도,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은 학생 감독. 올해 8월 졸업을 앞두고 있는 그는 공부를 계속할지, 촬영현장에 나가 실전을 익힐지 하늘을 날 준비에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