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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디지털 대중의 열망, 영화로 화하다

괴수영화를 일인칭 페이크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은 <클로버필드>

이 영화를 보고 당혹감을 느낀 것일까? 내게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영화가 극장에 걸려 있는 동안에는 너무 바빠서 볼 수가 없었고, 뒤늦게 인터넷을 뒤져 그것의 출처만큼이나 어둡고 음침한 영상을 다운로드받아 볼 수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 위에서 자막없이 보았으니, 영화를 제대로 본 거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고해상에서 저해상으로

미국의 가정에 TV 수상기가 대량으로 보급되던 시절, 할리우드는 저해상의 TV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고해상의 화면을 거의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주는 것으로 이 전자매체의 도전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클로버필드>는 여기서 다시 TV보다도 선명하지 못한 작은 홈비디오의 포맷으로 돌아간다. 당혹감은 아마도 관객이 영화관에 거는 기대가 무참히 배반당했다는 느낌에서 온 게 아닐까?

게다가 핸드헬드 카메라로 촬영한 화면은 데카르트 좌표의 네 방향으로 마구 흔들리면서, 영화 관람의 시각적 안락함을 방해한다. 움직이는 시점이 연극과 구별되는 카메라의 문법이라 하나 영화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더 완벽한 현전의 기능, 즉 시각의 제한을 확장하고 시각의 내용을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클로버필드>에서 카메라의 흔들림은 정상적인 지각을 방해한다.

포커스가 안 맞는 저해상의 화면은 인지를 어렵게 하고, 카메라의 흔들림은 구토와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안락한 조망을 즐기는 대신 관객은 인지적, 육체적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이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이 영화를 기꺼이 봐주는 것은, 그래도 그 안에 뭔가 새로운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막연한 의식 때문일 게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포인트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

말이 괴수영화라 하나 사실 괴수물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통상적인 괴수물이라면 가능한 한 괴수를 공포스럽게 연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흔들리는 저해상의 단편 속에 가끔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괴수의 이미지가 아니라, 외려 잘려나간 자유의 여신상의 목, 피를 뿜으며 폭발하는 여인의 모습일 게다. 이는 이 영화의 컨셉이 다른 데에 있음을 시사한다.

즉각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일인칭 시점. 영화의 카메라는 대개 3인칭 관찰자 시점(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한다. 일반적인 괴수영화라면 아마 시각적 효과를 위해서 괴수의 모습을 충실히 보여주는 3인칭 시점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괴수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저 TV나 비디오 화면에 우연히 잡힌 모습으로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래픽의 수준은 60년대 고질라를 연상시킬 정도다.

일인칭시점은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영화의 내용 역시 충실히 일인칭시점을 따른다. 예를 들어 영화 속의 상황은 철저하게 개인의 주관적 의식 속에 묻혀 있다. 영화를 끝까지 보아도 그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놈이 어디서 왔으며, 또 뉴욕에는 왜 나타났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들은 끝내 자기들이 왜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죽는다.

어떤 리얼리즘

일인칭시점의 페이크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극영화이면서도 서사를 전개하는 방식이 통상적인 극영화와는 다르다. 사실 행위와 행위의 연결은 감독의 손에 의해 정교하게 계산되고 배치된 것이리라. 그런데도 마치 아무런 인위적 편집이나 각색없이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그냥 ‘재생’시킨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이 영화를 (극영화 못지않게 편집과 각색을 거치는) 다큐멘터리보다 더 현실에 가깝게 만들어준다.

이는 배우의 연기에서도 드러난다. 아무리 ‘리얼리즘’이라 해도 그것도 하나의 예술언어, 거기에는 예술적 관습과 규약의 느낌이 난다. 연극의 연기보다 더 리얼하다 해도 영화의 연기에는 어딘가 연극적 제스처의 오버액션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클로버필드>에서 배우들의 연기나 대사는 극도로 자연스러워 영화를 만들 의도없이 진짜 현실의 단편을 잘라온 듯한 느낌을 준다.

상투성에서 벗어나 괴수영화를 일인칭 페이크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다는 발상은 참신해 보인다. 하지만 화려한 괴수영화를 기대하고 영화관에 들어선 관객은 바로 그 점에 실망할 수도 있을 게다. 괴수영화를 왜 굳이 그런 형식으로 만들어 요란한 볼거리를 기대하는 관객의 뒤통수를 쳐야 할까? <클로버필드>가 애초에 괴수영화가 아니라고 가정하면, 이 실망감이 어느 정도 풀릴 것이다.

대중의 이미지 취향

아주 오래전에 어느 내전의 현장에서 촬영을 하던 방송기자가 찍은 영상. 갑자기 카메라가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더니 렌즈 앞에서 촬영자의 떨리는 손을 보여준다. 그 장면에서 영상은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그전까지 영상은 내전의 ‘관찰자’의 시각을 유지했으나, 기자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 영상은 내전의 ‘체험자’의 시점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감독이 핸드헬드 카메라를 선택한 것은 이 효과를 위해서리라. 영화에 초점조차 안 맞는 저해상의 영상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대중에게는 그런 동영상에 대한 취향이 생겼기 때문일 게다. 흔들리고, 초점이 안 맞고, 해상도가 떨어지는 영상에 대중이 열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캘리포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때 휴대폰으로 찍은 동영상을 생각해보라. 시각이 제한되어 있어 범인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나, 거기에는 영화나 방송의 카메라로 전달할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과 진실성이 있다.

따라서 감독이 영화에 핸드헬드 홈비디오의 일인칭시점을 취한 것은 전적으로 적절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것이 과연 리얼리즘보다 판타지에 가까운 장르에 적합한 방식이었는지 물을 수는 있겠다. 사실 핸드헬드 카메라로 아무리 현장감, 긴박감을 연출한다 해도 고해상의 이미지와 고출력의 사운드로 연출하는 몰입효과를 따라갈 수는 없는 것 같다. 괴수는 어차피 리얼리티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다.

UCC의 영화화

영화가 유일한 동영상이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났다. 50년대에 TV가 등장했고, 60년대에 비디오가 등장했고, 80년대에 비디오 게임이 등장했고, 최근에는 디지털 캠코더와 휴대폰 카메라가 등장했다. 이는 영화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종류의 동영상을 포함하는 <JFK>, 컴퓨터게임의 단계적 미션 수행을 닮은 서사를 가진 <다이하드>, 그 밖에 컴퓨터 모니터처럼 화면을 여러 개의 창으로 분할하는 영화들을 생각해보라. <클로버필드>의 전략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유튜브에 올라오는 것과 같은 UCC 동영상을 영화화한 것, 한마디로 디지털 대중이 사용하는 영상의 전략을 본격적으로 영화 속에 도입하는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이 흔들리는 저해상의 불량한 영상을 대중이 기꺼이 참아주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의 일상적인 영상 취향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관에서만은 다른 영상을 보고 싶어하는 이는 거기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다.

발터 베냐민이던가? 그는 “예술에서 혁명은 내용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형식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저 기술의 혁명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홈비디오의 영상을 이용하는 <클로버필드>의 독특한 형식, 일인칭시점으로 관찰한 사건의 체험으로 이루어진 그것의 내용. 이 두 가지 새로움에 선행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기술의 혁명이 낳은 동영상 UCC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의 파편화

이 영화가 9·11 테러를 연상시킨다고들 하나 나는 이 영화의 상징적 측면을 좀 다른 데서 찾고 싶다. 방송이나 영화의 카메라가 집단적/객관적 시각을 대변한다면, 홈비디오는 철저하게 개별적/주관적 시각을 구현한다. 영화문화가 객관적 시각의 집단적 수용이라면, UCC의 영상문화는 개별자들 사이의 주관적 체험의 교환이라 할 수 있을 을 게다. 일인칭시점에 함몰된 <클로버필드>의 세계는 다시 개별화, 파편화하는 새로운 영상문화를 상징한다.

허드는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촬영을 계속한다는 것은 언뜻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촬영을 향한 이 뜨거운 열망이야말로 현대 대중의 현실이 아닌가. 영화의 마지막에 사람들은 죽고, 영상은 남는다. 디지털 시대의 임종성사일까? 마치 삶의 유한함을 영상으로 극복하려는 듯 두 사람은 카메라를 보며 사랑의 영원함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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