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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식코>의 힘

영화의 기능 가운데 교육과 계몽의 힘을 일찍 깨달은 것은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였다. 레닌이 가장 중요한 예술로 영화를 꼽은 건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 영화만큼 효과적인 매체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히틀러의 독일도 이 점에선 레닌의 소련과 다르지 않았다. 미학적 완성도를 자랑하는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가 지금껏 비난받는 이유는 나치의 선전도구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내용 면에서 레니 리펜슈탈의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마이클 무어에게도 영화는 교육과 계몽의 수단이다. <식코>에서 구소련의 선전영화가 인용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이클 무어는 그 점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피아니스트>의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당신 영화의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메시지 같은 건 우체국에 가서 찾아라. 내 영화에 메시지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것과 상반된 태도다. 마이클 무어에겐 메시지가 중요하고 그의 영화는 메시지를 가장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매체다.

<식코>의 메시지는 민영화된 미국 의료보험제도의 병폐다.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이런 시스템을 한국에도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시급히 봐야 할 영화임에 틀림없다(자세한 내용은 이번호 기획기사를 보시라). <식코>에서 내가 흥미롭게 본 대목은 미국의 의료보험제도를 이렇게 만든 닉슨부터 근자의 부시까지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수사법이다. 그들은 모두 이런 제도가 도입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은 혜택을 보는가를 역설한다. 병원에서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어지며 정성들인 의료서비스를 경험하게 되며 좋은 약을 먹게 될 것이라는 감언이설이 부자나라 미국에선 먹혔던 것이다. 미국에선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무상 의료서비스를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반면 캐나다, 영국, 프랑스, 쿠바는 정반대다. 수십년 전 국가가 의료서비스를 무상제공하도록 법을 만들었던 그들은 이런 제도 자체가 얼마나 훌륭한지 일상적으로 체감하지 못한다. 미국에서 보험없이 사고를 당하는 경험을 해본 뒤라야 국가가 의료서비스를 하는 제도가 좋다는 걸 안다. 혹은 프랑스처럼 공공서비스를 후퇴시키는 조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면서 깨닫는다. 한쪽에선 너무 당연한 것이 다른 한쪽에선 꿈도 못 꿔볼 일처럼 보이는 역설. 인터넷을 통해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이런 역설은 굳건히 존재한다. 공분할 만한 정보가 주어진다고 의식이나 제도가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마이클 무어도 그 사실을 알기에 <식코>에서 일견 무모해 보이는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9·11 복구작업에 참가했다 후유증을 얻은 소방관들을 데리고 관타나모 수용소에 가는 대목은 과도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마음을 움직인다. 남에게 알리는 것을 넘어 스스로 광대가 되어 현실과 부딪치는 저돌성. 그것이 마이클 무어의 영화가 다른 다큐와 다른 대목이다.

<식코>를 보고나서 미국이 어쩌다 제약회사와 보험회사의 농간에 놀아나게 됐는지 생각해본다. 의료보험 민영화가 빈자를 의료사각지대에 놓을 것이며 의료혜택을 받는 일이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그들 역시 더 나은 의료서비스가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짓 예언은 승리했다. 검증 노력을 게을리한 덕에 이뤄진 미국 의료보험 실태를 보면서 지금 한국에서 횡행하는 숱한 거짓 예언들이 떠올랐다. 하나하나 따져묻지 않으면 <식코>의 미국보다 더한 재앙이 덮칠 것이다. 이번호에 영화평론가 남다은씨가 쓴 인디다큐 감독 3인에 관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P.S. 메신저토크와 진중권의 이매진 코너가 이번호로 막을 내린다. 이동진, 김혜리, 진중권 세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아쉬움이 남지만 4월 창간 13주년 기념호부터 다른 지면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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