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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틈새시장

아파트는 한국에서 보편적인 주거형태다. 인구는 많고 땅은 좁으니 많은 사람이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점유하기에 적당한 방식이다. 여러모로 도시생활자의 편의를 고려해 설계한 집인데 그렇다고 아파트에 사는 각자의 필요를 모두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2인 가구라면 왜 30평도 안 되는 아파트에 방을 3개나 만들었나 불만스럽고 5인 가구라면 좁더라도 방을 4개로 만들어주길 바랄 것이다. 가족 구성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불만사항이 다르지만 아파트는 각자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다. 가장 많은 가족 형태를 모델로 평균치의 감각으로 만든 집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에서 방 하나에 거실 넓은 30평 아파트를 찾아달라고 하면 면박당하기 십상이다. 현대사회에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시스템에 포섭되지 않는 욕망을 실현하는 일은 어렵다. 돈도 노력도 더 많이 들여야 한다. 아파트를 예로 들었지만 평균치 감각과 평균치 욕망을 원하는 것은 건설회사만이 아니다. 대형 마트에서, 커피 체인점에서, 브랜드 의류 상점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서로를 비슷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각자의 필요와 욕망을 묻지 않는 거대하고 일방적인 편리함이다.

영화에서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혁명이 일어난 것은 70년대 미국이다. 수백개, 수천개 극장에서 일제히 개봉하는 블록버스터는 영화의 취향을 하향평준화한다고 비난받았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미국영화가 블록버스터 일색이 된 것은 아니다. 스케일이 크고 액션과 멜로가 적당히 있는 영화라고 무조건 잘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소규모 영화들이 각자 나름의 시장을 창출하고 배급방식도 와이드 릴리즈 일변도가 되지 않았다. 수억달러 제작비를 들인 영화부터 100만달러도 못 미치는 제작비를 들인 영화까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된다는 점이 지금 미국영화의 힘이다. 한국은 90년대 후반부터 블록버스터, 와이드 릴리즈 바람이 불었다. 해마다 흥행기록을 갈아치우는 영화가 나온 덕에 와이드 릴리즈 배급질서도 큰 문제없이 굴러갔다. 하지만 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으면서 문제의 심각성이 두드러졌다. 지난해 추석과 올해 설은 한국영화의 대목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난무하는 상황을 보여줬다. 비슷한 타깃을 노리는 한국영화 3~4편이 한꺼번에 개봉할 때 관객은 늘지 않고 분산되기만 했다. 평균치 정서와 평균치 감성에 호소하는 마케팅, 제작, 배급 방식이 벽에 부딪힌 것이다.

어쩌면 관객의 필요와 취향을 무시하고 똑같은 아파트 모델을 공급하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 아파트에 산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수도 있지만 각자가 원하는 모델은 다를 수 있다. 원룸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방을 줄이고 거실을 늘려달라는 사람도 있다. 기존 모델에 만족 못하는 소비자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 만하다면 공급자의 생각이 바뀌는 게 필요하다. 와이드 릴리즈 전략에만 매달리는 영화계는 4인 가족 기준 아파트만 만드는 건설회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틈새시장에 관한 이번호 특집기사에서 우리는 관객의 수요가 흔히 생각하는 평균치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욕망, 다른 필요, 다른 취향을 영화시장은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쉽지 않겠지만 도전과 모험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