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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오디세이] 샤브롤의 뮤즈, 스테판 오드랑

<도살자> Le Boucher/ 클로드 샤브롤/ 1970

스테판 오드랑은 클로드 샤브롤의 뮤즈다. 샤브롤이 화려한 데뷔 뒤 곧바로 침체에 빠졌다가 심리스릴러 작가로 거듭난 데는 ‘엘렌느’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오드랑의 역할이 컸다. 보통 ‘엘렌느 사이클’로 불리는 <부정한 여인>(1969), <도살자>(1970), <파멸>(1970), 그리고 <어두워지기 전에>(1971) 등에서 오드랑은 늘 ‘어둠’을 숨긴 엘렌느라는 여성으로 등장하며, 우리를 비밀스러운 심리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인다.

여성이 리드하는 심리스릴러

<도살자>에서 오드랑이 보여준 역할도 역시 비밀이 있는 여성이다. 고다르의 뮤즈였던 안나 카리나는 왠지 감독의 조종을 받는 마네킹 같았는데, 오드랑은 그렇지 않았다. 오드랑은 오히려 남편이자 감독인 샤브롤을 리드하는 것처럼 보였다. 섹시한 몸매에 경험있는 여성들에서 보이는 여유있는 자세, 그리고 퇴폐미까지 갖고 있다. 게다가 얼굴 구석에 자리한 어두운 그림자는 그녀가 심리스릴러의 주인공이 되기에 더없이 좋아 보였다. 금발의 완벽한 몸매라는 외모, 그러나 그 표면 아래 숨어 있을 것 같은 억압의 그림자, 이 둘 사이의 대조 자체가 하나의 스릴러에 가까운 것이다.

흔히 샤브롤은 히치콕의 후계자라고들 말한다. 히치콕처럼 스릴러를 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샤브롤 스스로 히치콕을 흠모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샤브롤은 히치콕과 여러 면에서 달랐으며, 결정적인 차이점은 바로 여성 캐릭터의 정체성에 있다. 샤브롤의 여성들은 히치콕의 그녀들처럼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다. 히치콕의 여성들은 답답할 정도로 남성에게 조종당하는데, 샤브롤의 여성들은 반대로 자신들이 남성을 이끌고 조종한다. 샤브롤의 스릴러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주도하는 인물은 여성이며, 이런 인상을 심어준 데는 오드랑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도살자>에서 엘렌느(스테판 오드랑)는 시골의 조그만 초등학교 교사로 나온다. 그녀에게 최근 15년간 전쟁에 참여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군인 포폴(장 얀)이 접근한다. 그의 직업은 ‘정육점 주인’이다(영화의 원제목). 엘렌느와 포폴은 피터 브뤼겔의 <시골의 결혼>(1567)처럼 흥겨운 결혼 축하연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정력적’인 정육점 주인이 아니라 연약할 것 같은 여교사다. 시원한 여름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길 위를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데, 길 가운데서 담배를 입에 물고 주변 풍경을 압도하는 사람은 단연 여성인 엘렌느다. 스테판 오드랑 특유의 당찬 태도가 남자의 존재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섹스를 상징하는 정육점 주인은 그녀 옆에서 ‘다소곳이’ 걷고 있다. 여교사와 정육점 주인에서 상상되는 일반적인 관계가 뒤집힌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 호감을 보인 채 헤어진 바로 그날 평화로운 시골에 난데없이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이율배반적인 범죄라는 샤브롤의 전형적인 스릴러가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는 교사와 정육점 주인, 이 두 사람이 거의 다 끌고 간다. 그렇다면 장르의 법칙을 아는 관객은 감독이 아무리 트릭을 써도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 법이다. 그런데 정육점 주인은 너무나 순진하고 착하게 그려졌다. 게다가 그는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전장을 선택한 불우한 성장기도 갖고 있다. 그에겐 죽음의 전장이 억압적인 가정보다 더 나은 곳이었다. 관객의 동일시 대상인 사랑스러운 그가 범인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살인은 또 일어난다.

사이코패스를 만들어내는 세상

포폴은 당시로선 아주 생경한 캐릭터인 사이코패스다. 엘렌느를 사랑했던 그는 그녀와의 관계 시도가 좌절될 때 충동적으로 살인을 한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범죄와 아무런 관계없는 억울한 희생자들이다. 엘렌느와 그가 칼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릴 때가 영화의 절정이다. 긴박한 순간, 그는 갑자기 엘렌느 대신 자신의 배를 찌른다. 사이코패스인 포폴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단, 포폴은 엘렌느에게 친구 이상의 관계를 원했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랑 때문에 범죄와 자해를 저질렀다. 그의 주검 앞에서 엘렌느는 심한 죄책감을 느낀다. ‘눈에 보이는’ 표면을 지키려던 그녀의 태도는 포폴에겐 얼음장처럼 차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치지 않으려고, 표면에만 집착했던 그녀의 심리는 루이 14세 시절의 지나치게 형식적인 춤인 궁정무용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에서 극적으로 표현돼 있다. 감정이 쏙 빠진 채 오로지 형식만이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세련된 춤을 아이들과 함께 추며 엘렌느는 지극히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따지고 보면 포폴은 이런 ‘표면’의 희생자가 아닌가. 엘렌느는 누구를 위해 그 표면을 지켰을까?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그래서 샤브롤은 ‘부르주아 윤리의 비판자’라는 평가를 자주 받는다. 여전히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마을의 강가에서, 엘렌느가 밤새 담배를 피우며 이 마을을 바라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마을은 계속하여 표면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것이고, 아마 또 다른 희생자가 포폴처럼 등장할 것이다. 마을을 바라보는 엘렌느의 우울한 시선에서, 포폴에 대한 그녀의 죄의식이 관객에게까지 서서히 전달되는 것이다.

다음엔 존 휴스턴의 <아스팔트 정글>(The Asphalt Jungle, 1950)을 통해 평화로운 시골의 또 다른 기능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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