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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미국 시민권을 지닌 영화의 지극히 글로벌한 유통

시민이 적을 색출할 수 있던 80년대 미국에 대한 향수 <위 오운 더 나잇>

<위 오운 더 나잇>은 5월29일에 개봉한다. 그러나 이제 극장 개봉의 의미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목을 빼고 극장 개봉을 기다리던 관행은 이제 특별히 극장의 영화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남아 있다. 이 영화 리뷰로 들어가기 전에 현재 우리가 영화를 향유하게 된 수상한 방식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려 한다.

영화를 보게 되는 경로가 P2P로 다운로드한 파일을 포함하게 되면서 영화의 언더그라운드 혹은 온라인 유통에 있어 다양한 버전의 글로벌한 비동시성과 동시성들이 한꺼번에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서의 영화, 필름 베이스의 극장 상영이나 VHS, DVD를 통한 관람 양태를 급격히 바꾸고 있다. 온라인 서점이었다가 이젠 책 이외에도 많은 것을 팔고 있는 아마존에서 2007년에 개봉된 <위 오운 더 나잇>을 온라인상의 클릭 한번으로 빌리거나 사서 바로 볼 수 있다. 대여는 3.99달러 그리고 구매는 14.99달러다. 미국 시민권 여부와는 관계없이 미 영토 밖에서는 다운로드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다운로드된 파일이 P2P사이트나 메신저들을 통해 글로벌하게 확산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영토화된 판매지를 한번만 우회하면 탈영토화는 시간문제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옹.

프랑스 더빙으로 먼저 만난 <위 오운 더 나잇>

이 와중에 파일 리뷰를 읽어본 뒤 다운받았다고 하더라도, 자세한 내용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로 더빙된 할리우드영화 <위 오운 더 나잇>을 보게 되는 일도 생긴다. Quoi(What의 프랑스어에 해당?) 사실 나도 <위 오운 더 나잇> 프랑스 더빙 버전을 먼저 보았다.

변화한 환경 속에서 영화는 예측하지 못했던 여러 길들을 우회해 우리에게 온다. <위 오운 더 나잇>의 아마도 <대부>에 바치는 색감의 경배- 흐릿한 황금색과 갈색- 가 위와 같은 파일 유통의 경로 속에서 어떠한 색채를 띠게 되는지 그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색채 변이의 예측 불가능은 디지털 시대, 매체 융합의 어떤 은유가 된다. 필름 베이스의 아날로그 시네마가 디지털 세계로 융합되면서 우리는 ‘영화의 죽음’이라는 경고를 10여년 전부터 들었고, 이제 그 경고는 현실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알려진 대로 디지털의 ‘digit’는 라틴어 ‘digitus’다. 손가락이란 뜻으로 숫자를 세는 손이다. 디지투스, 손가락 그중 둘째, 집게손가락은 영어로는 인덱스(index), 색인, 지표 손가락을 가리킨다. 현실 세계의 정보를 이진법으로 컨버전스하는 디지털 시스템은 영화와 비디오를 구성하는 사운드와 이미지의 아날로그 세계를 이진법으로 변환한다. 역설적이게도 디지투스, 디지털 시그널은 아날로그가 기반하고 있는 기호의 인덱스 기능을 지우면서, 미디어 문화, 그 기상도의 변화를 가리킨다. 필름 베이스의 영화가 가진 영화적 특이성은 이제 디지털적 가변성, 융합성, 복합성으로 바뀐다.

미디어 융합의 시대, 필름이나 비디오 그리고 디지털이라는 물질적 베이스의 구분 대신 이제 포털들은 이미지와 동영상이라는 분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시네마나 TV라는 매체 분류 대신 이미지와 동영상으로 일반화된다. 디지털 영상 테크놀로지가 구성해낸 것이 바로 필름과 디지털을 망라하는 이러한 동영상 문화다. 디지털카메라, 캠코더의 보급은 동영상 시청만이 아니라 제작을 일상화한다. 이러한 동영상이 뜨는 공간인 컴퓨터 스크린은 초음파 스크린 등과 더불어 텔레비주얼하며 레이더와 같은 군사 기술과 기원을 같이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 컴퓨터 스크린 등은 점점 더 이미지화되고 그 이미지가 스크린상으로 나타나는 스크린 중심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반면 칸영화제 60주년을 맞이하여 구스 반 산트, 왕가위, 차이밍량 등 35명이 참가해 만든 <그들 각자의 영화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영화, 영화관에 대한 향수어린 경배다.

80년대 후반의 미국 사회를 향한 진혼곡

상황은 이렇고 난 <위 오운 더 나잇> 극장 개봉에 맞춰 리뷰를 쓰고 있다. 이 영화를 어떤 맥락에 위치시키기는 매우 쉽고도 어렵다. 우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와 마틴 스코시즈의 <갱스 오브 뉴욕> <디파티드>, 그리고 최근 리들리 스콧의 <아메리칸 갱스터> 등 노장, 명장들의 뉴욕 갱에 바친 연대기가 할리우드 영화창고에 적재된 중에 감독 제임스 그레이는 무슨 생각으로 ‘정통 범죄액션 드라마’인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감독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크게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뉴욕타임스>에 실린 경찰관의 장례식 사진의 비통한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는 부분은 그토록 많은 뉴욕의 갱들을 다룬 영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영화를 새삼스레 만들었는지를 추론하게 해준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영화의 절정은 비오는 날 추격신 뒤 경찰서장인 아버지(로버트 듀발)의 죽음장면에서 온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 시리즈 이후 스트리트 액션의 연출은 그만큼 더 어려워졌는데, 자동차의 와이퍼를 이용한 스위시팬 효과와 어떠한 CG 효과도 내지 않은 액면 그대로의 총격 장면- 숏건의 긴 총구가 추격 중인 차창 밖으로 나오고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힌다― 에 따른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비통한 아들들과 동료들이 참석하는 장례식은 이 영화가 필름누아르, 갱 장르의 어법으로 애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드러낸다. 비는 내리고 아들을 지키려던 아버지는 그 빗속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다. 아들 바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빗속에서 거의 숭고하고 신성하게 클로즈업되고 멈춘다.

즉 이 영화는 애도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아버지, 예컨대 아들을 지키다가 희생하는 아버지를 위한 진혼곡이다. 아니, 아버지를 위한 진혼곡이라기보다는 그 죽음 앞에 애도할 수 있는 아들, 그 애도를 통한 아들들의 갱신, 각성한 형제들의 연맹에 관한 향수로 지극하다.

프로이트는 널리 알려진 에세이 <애도와 우울증>에서 사랑하는 대상이나 조국 상실에 대한 반응을 애도와 우울증 두 양태로 분류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치러내지 못하면 그것이 일종의 병리적 상태, 우울증의 상태로 변이해가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2001년 9월11일 이전, 국가가 아닌 한 개인이나 가족, 즉 시민들의 애도 작업이 불가능하지 않았던 그리고 향락과 향유가 가능해 보였던 미국의 80년대 후반을 향수어린 시선으로 복기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나쁜 놈들’이 러시아계 미국인 갱들로 구성된 것은 기존의 <대부>나 <디파티드>의 이탈리안계나 아일랜드계 미국인 갱들과 비교해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85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 이민자들에 대해 논평하고 있는 듯도 하고, 기존의 갱영화들의 인종적 설정과 차이 만들기로도 보인다. 즉 80년대 후반만 해도 러시아 이민자와 그들의 친척들 몇명만 없애면 법질서의 회복은 가능해 보였다는 것이다.

영화는 1988년 뉴욕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디스코의 시대 ‘엘 카리브’라는 나이트클럽의 매니저인 바비(와킨 피닉스)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연인 아마다(에바 멘데스)와의 충분히 관능적일 수 있었던 정사신은 급작스런 방해를 받는다. 이런 엉거주춤한 중단은 영화 다이제시스 안에서 앞으로 바비가 겪을 고난을 전조한다. 이에 앞선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은 스틸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스틸 사진들은 현재 NY PD 경찰들의 모습을 총이나 총탄을 페티시화하고 강조해 보여주지만 마치 1920년대 금주령 시대의 재연인 양 흑백이고 재즈 사운드가 흘러나온다. 이 스틸 사진의 슬라이드 쇼에 이상하게도 감독 제임스 그레이로 하여금 이 영화를 만들도록 추동시켰다는, 동료를 잃고 마음을 다친 경찰들을 담은 바로 그 사진은 부재한다. 파토스적이고 정감어린 사진 대신 도입부의 사진들은 한편으로는 총을 찬 경찰들의 위험한 측면을 보여주고, 시체 안치실에서 끝난다.

그 문제의 사진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장례식장에 모여든 경찰관 동료들, 가족들의 애통어린 모습으로 사진이 아닌 하나의 시퀀스로 재연된다. 이 영화의 한편에는 애도할 만한 시민, 희생자로서의 경찰관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이 있고 그의 희생으로 아버지의 이름 그루진스키 대신 앵글로 색슨계처럼 들리는 어머니의 성, 그린을 자신의 성으로 하면서 범죄 조직과 연결된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아들이 경찰로, 적법한 시민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가 나이트클럽의 매니저로 일하던 당시 아버지 역할을 했던 러시아 이민자는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뒤 감옥으로 보내진다.

<위 오운 더 나잇>은 역설적이게도 밤의 지배를 선언하는 제목과 달리 사실 누가 미국의 낮을 지배하는가라는 ‘시민권’ 주장을 그 정치적 무의식으로 하고 있다. 카바레를 경영하는 러시아 이민자들 외에 아마다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고 바비의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못마땅해한다. <호모 사케르>의 저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개인과 시민의 차이는 주권 그리고 국민국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하면서 나치들이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낼 때 뉘른베르크 법령 이후 부분적으로 남아 있던 그들의 국적을 완전히 박탈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권의 행사는 주권과 결합되었기 때문에 이민자들은 시민권의 보장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위 오운 더 나잇>에서 밤의 지배자들인 나쁜 이민자들은 축출되고 죽은 시민이 된 아버지의 희생은 애도된다. 그리고 그의 희생은 형제들의 혈연 동맹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시작, 사랑은 아마다와 바비의 것이었으나 영화의 끝, 바비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형 그루진스키다.

이 영화는 그래도 시민이 적을 색출할 수 있는 미국의 80년대를 향수하나, 앞서 말한 대로 이 영화의 유통은 글로벌해 프랑스, 스페인어판 <위 오운 더 나잇>이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닌다. 미국 시민권을 가졌던 영화의 이러한 유통, 변형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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