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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오디세이] 소비주의를 비판하는 알레고리극의 전범

<그랜드 뷔페> La Grande bouffe, 마르코 페레리, 1973

리안 감독의 <음식남녀>(1994)를 보면 요리한다는 행위 자체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딸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드는 아버지의 헌신적인 마음이 화면 가득히 느껴진다. 음식이 사람 사이의 관계를 흐뭇하게 만드는 마술 같은 소재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마르코 페레리 감독의 <그랜드 부프>(1973)를 보면 사정은 영 다르다. 여기선 음식이 사랑과 헌신을 전혀 의미하지 못하고 대신 인간의 무한정한 탐욕을 상징한다. 탐욕은 절대 만족을 모르는 법. 영화 속의 인물들은 끝없이 먹어댄다. 그리고 배가 불러오면 섹스하느라 정신없다. 70년대 유럽의 소비주의가 낳은 뒤틀린 사회를 풍자한 탁월한 알레고리 드라마가 한편 발표된 것인데, 영화 속의 세상이 지금에 와서도 별로 변한 게 없다는 게 <그랜드 부프>의 통찰력을 웅변하는 것이다.

음식과 섹스의 알레고리

마르코 페레리(1928~97)는 보통 과격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좌파로 이탈리아 공산당 지지자이고, 실제로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페레리의 영화는 부르주아에 대한 공격과 풍자로 일관한다. 그런데 내용도 과격할 뿐 아니라 형식도 파격이다. 누드는 보통이고, 외설에 가까운 정사장면이 쉴새없이 이어진다. 제라르 드파르디외는 <마지막 여성>(1976)에서 부르주아 윤리에 대한 저주의 표시로 전기칼로 자신의 성기를 자르기도 한다. 기성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여기서 그의 과격한 이미지가 굳어진 것이다.

<그랜드 부프>는 페레리의 창의력이 절정일 때 발표된 그의 최고작 중 하나다. 여전히 쇼킹한 내용인데, 그해 칸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FIPRESCI)상을 받아 세계에 감독의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파리에 사는 네 중년 남자들의 이야기다. 이탈리아 배우 두명, 프랑스 배우 두명 등 스타배우들이 자기 이름 그대로 나온다. 비행기 조종사 마르첼로(마스트로이안니), 음식점 주인 우고(토냐치), 판사 필립(노이레), 그리고 TV연출자 미셀(피콜리)이 그들이다. 모두 부르주아 계급을 상징하는 사람들인데, 권태에 지친 이들은 주말에 판사의 별장에 모여 그리스 로마식의 광란의 주연(Orgy)을 벌이기로 한다. 실컷 먹고 섹스하다 죽자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여기서 나왔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고기, 채소, 과일 그리고 별의별 술들이 준비된다. 요리는 음식점 주인 우고가 매끼 제공할 것이다.

네 남자는 모두 비밀스러운 심리적 질병들을 갖고 있다. 마르첼로는 아름다운 스튜어디스들이 주위에 넘치지만, 타락한 사랑을 보장하는 창녀가 아니면 관계를 갖지 못한다. 우고는 돈 버는 식당의 요리사로 자신을 묶어두려는 아내에게서 도망가고 싶다. 생태계에 관심이 많은 미셀은 환경을 파괴하는 회사의 지원을 받으며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현실이 고민스럽다. 판사는 지금도 유모와 함께 사는 독신이다. 유모는 판사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해준다. 심지어 판사가 다른 여자를 생각할 때면 바지에 손을 넣어 자위를 해주며,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까지 한다. 편리한 생활에, 섹스문제까지 해결되니 남의 눈만 없다면 판사로선 지금 그대로 사는 게 편하다.

부르주아의 탐욕을 비판하는 묵시록

첫날부터 이들은 무지하게 먹기 시작한다. 모든 게 먹는 것을 위해 예정돼 있다는 듯 이들은 맛있는 음식을 찬미하고 달콤한 포도주를 마신다. 우연히 이 집으로 흘러 들어온 여성과는 번갈아가며 섹스까지 해댄다. 그녀는 루벤스의 누드화에 잘 어울리는 육덕있는 몸집을 갖고 있다. 살찐 엉덩이와 출렁이는 가슴을 영화 내내 드러내며 이 집을 떠날 생각은 전혀 않고 남자들과 번갈아가며 섹스를 한다. 이들은 마치 블라드미르가 고도를 기다리듯,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무의미한 행동을 매끼 반복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페레리의 패러디 의도가 짐작될 듯하다. 부르주아 윤리에 지독한 혐오증을 갖고 있던 그는 목적 없는 소비주의가 부른 생지옥이 유럽사회라고 봤다. 그 소비의 상징으로 먹는 것을 선택했다. 여기서 먹는 것은 배고픈 것과는 아무 관련없는 행위다. 사람들은 오로지 더 많이, 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먹는 것’이 지상목표가 된 사회에 살고 있다. 블랙코미디답게 남자들은 결국 차례로 죽어간다. 물론 먹고 섹스하다 죽는다. ‘최고’의 죽음은 요리사 우고의 죽음이다. 그는 더이상 먹을 수 없는 조건에 놓였는데도, 식탁 위에 누워 계속 입 안으로 음식을 쑤셔넣는다. 그리고 살찐 그녀에게 자위를 부탁한다. 죽을 줄 알면서도 계속 먹어대고 그 순간에 섹스까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음식은 결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어주는 매개가 되지 못하고, 타락과 죽음을 이끄는 탐욕, 곧 원죄의 씨앗으로 나타나 있다. 부국이 되겠다며 못 먹는 음식도 팔고 사겠다는 요즘 세상을 보면 결코 먼 나라의 옛일이 아니다.

파졸리니는 <살로 소돔의 120일>(1975)에서 탐욕으로서의 음식을 다시 써먹는다. 더 과격해졌다. 카니발을 벌이듯 사람들은 배설하기 위해 음식을 먹어대고 결국에는 그 배설물까지 먹어치운다. 그칠 줄 모르고 먹어대는 부르주아 사회의 탐욕에 대한 묵시록적 작품으로, 페레리의 <그랜드 부프>는 파졸리니에 의해 다시 상찬받은 것이다.

다음엔 찰스 로튼의 <사냥꾼의 밤>(The Night of the Hunter, 1955)을 통해 청교도주의를 위장한 또 다른 탐욕의 모습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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