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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빠삐놈 신드롬

이게 다 촛불집회 때문일까? 사람들은 전에 없던 미디어 환경을 경험했다. TV에서 볼 수 없는 집회의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가 하면 경찰의 시위자 구타 장면이 파일로 순식간에 전파돼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누구든 어디서든 동영상을 찍어 만인과 공유하는 세상. TV와 신문의 절대적 권위는 상처를 입었고 새로운 미디어 문화가 민주주의의 큰 진전을 의미한다는 기사들이 나왔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던 때처럼, 카메라가 설치된 휴대폰이 처음 보급됐을 때처럼 머리로 받아들이기 전에 몸으로 익히는 일들이 이어졌다. 문자세대에 속하는 나 같은 사람은 특히 이런 사태가 당황스러웠다. 짤방, 힛갤, 햏자 같은 표현이나 블로그에 익숙해지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고 UCC라는 단어도 그저 마케팅을 위한 용어처럼 보였다. 이렇게 인터넷 문화에 발빠르게 적응 못하는 사람이 최근 몇달간 촛불집회 생중계에 열을 내고 ‘뼈의 최후통첩’을 보고 웃으며 동영상 검색을 일상에 포함시키게 된 걸 보면 뭔가 미디어 환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선 빠삐놈 열풍의 배후에 촛불집회가 있다 할 것이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언제나 흥분을 자아낸다. 나치시대 독일을 경험한 베냐민은 영화에 대해 그렇게 반응했다. 귀족이나 부르주아만이 향유할 수 있던 예술은 영화에 이르러 복제를 통해 얼마든지 전파될 수 있는 대중예술이 됐다. TV가 태어났을 때도 TV의 진보적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는 견해가 나왔다. 영화에 비해 시청자의 능동적 참여를 이끌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였다. 물론 영화나 TV가 얼마나 진보에 이바지했는지는 단정짓기 어렵다. 영화만 놓고 보면 레닌이 공산주의적 인간을 만드는 데 이바지할 거라 믿었던 만큼 히틀러도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고 정치적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무뇌아가 되는 즐거움도 만끽하게 해주었다. TV가 엄청난 양의 정보를 동시다발로 전파하는 한편 바보상자로 기능하는 것도 매체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예다. 인터넷이 민주주의의 확대를 이끌 것이라는 견해는 비교적 최근 것이지만 경험적으로 볼 때 이 역시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황우석 사건이나 <디 워> 논쟁에서 보듯 진지한 토론이 되지 못할 위험성은 상존한다. ‘뼈의 최후통첩’의 정치풍자와 빠삐놈의 비정치성이 상존하는 지금의 UCC 문화도 분명 이중적일 것이다. 열풍을 불러일으킨 빠삐놈은 이 같은 매체환경의 변화지표로 눈길을 끈다.

빠삐놈을 보면 영화의 초창기 몽타주이론이 떠오른다. 장면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의미가 생성되고 현실이 재현된다는. 역설적으로 빠삐놈은 의미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순수한 유희라는) 의미를 만든다. 정한석 기자의 표현대로 우리 시대의 낙서문화인 것이다. 거기엔 심오한 어떤 것이 아니라 원작을 훼손하고 겹치고 덧붙이는 유희정신만이 있다. 촛불 관련 동영상을 통해 민주주의의 확대를 발견한 이들에겐 다소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빠삐놈은 정치적 의식 이전에 그냥 동영상으로 노는 행위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 이번 특집은 그 놀이에서 메시지가 무엇이냐를 따지기보다 놀이문화 자체가 어떻게 생성되고 증식되는지를 보려는 시도다. 최초의 영화는 그냥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을 찍은 것이었지만 오늘날 영화는 과거와 엄청나게 다른 것이 됐다. 빠삐놈도 지금처럼 단순한 동영상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될까? 그러거나 말거나 올 여름 더위를 내게 맡기라는 빠삐놈이 이렇게 되묻는 것 같다. Why so serio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