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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 또는 `위험한 관계`
2001-11-15

르네 클레르 감독의 <위대한 전략>

Les Grandes Manoeuvres 1955년, 감독 르네 클레르 출연 제라르 필립 <EBS> 11월18일(일) 낮 2시

“난 프랑스영화가 르누아르가 아니라 카르네와 클레르에게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에릭 로메르 감독은 이런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영화 후배격인 ‘누벨바그’ 세대로부터 정당한 지위를 강등당한 감도 있지만 프랑스영화사에서 르네 클레르 감독이 차지하는 지위는 특별하다. 유성영화 초기에 사운드를 독창적으로 활용했으며 사회풍자적인 코미디를 만들었다는 점 외에 르네 클레르 감독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발해낸 연출자다. 감독의 <우리에게 자유를>(1931)이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 영향을 주었음은 유명한 일화. 영화학자들은 1930년대 르네 클레르 영화에서 이후 프랑스 코미디의 전범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후 클레르의 작업은 하강곡선을 그렸다. 1955년작 <위대한 전략>은 클레르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지만 더이상 전성기의 빛나는 영감을 발견하기란 사실 어렵다. 게다가 이 영화는 코믹한 톤이 강조되지만 르네 클레르 영화로는 예외적으로 ‘비극’으로 끝맺음하는 드문 사례다.

여성에게 인기좋은 장교 아르망은 친구들과 내기를 벌인다. 특정한 여성을 정해진 시간 안에 정복할 수 있느냐는 것. 파리 출신의 이혼녀 마리 루이즈가 정복 대상으로 선정되는데 그녀는 젊은 장교의 구애를 은근히 조롱하는 태도를 보인다. 초조해진 아르망은 열성적으로 마리 루이즈에게 접근하고, 그 와중에 진실한 사랑에 덜컥 빠져버린다. 마리 역시 차츰 아르망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지만 사실의 전모가 적힌 한통의 편지를 받고 기겁한다. 아르망이 단순히 내기를 목적으로 접근했음을 밝힌 내용이다.

<위대한 전략>에서 클레르의 인장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달콤한 로맨스와 대사의 묘미, 화려한 춤과 음악을 곁들인 연출 스타일은 온전하게 르네 클레르의 것이다. 클레르는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소설 속 모티브를 그대로 빌려온다. 내기에서 이길 요량으로 여성을 함락하고자 했던 남자가 진심어린 감정에 빠져버린다는 역설이 그것. 그런데 이렇듯 뻔한 내용인데 영화는 꽤 속도감 있다. 시공간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이야기 흐름이 부드럽기 때문. 클레르는 고전적 편집이나 촬영 테크닉을 응용하면서 영화를 이끌어간다. 페이드 아웃과 팬 기법을 활용해 영화 속 공간을 자유자재로 옮겨놓는 것이다. 게다가 춤추는 무희들이 등장하고 음악이 중간중간 영화의 디딤돌 역할을 하면서 극을 매끄럽게 이끌어간다. <위대한 전략>은 르네 클레르 영화 중에서 최고 수준이라 할 순 없지만,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그만의 연출기법을 한번에 감상할 수 있는 값진 작업일 터이다. 덧붙이자면, <위대한 전략>은 스타에게 의존한 영화다. 아르망 역의 제라르 필립은 당시 프랑스영화계에서 도발적인 이미지로 이름을 날렸던 청춘스타인데 그는 <위대한 전략>을 찍은 뒤 37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마리 루이즈를 연기한 미셸 모르강은 우리에게 <전원교향곡>이나 <안개낀 부두>의 히로인으로 친숙한 배우. 마치 얼굴에 안개가 머무르는 듯 애수 깃든 표정만으로 가치를 지닌, 희귀한 여배우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