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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태산보다 높은 2008년 보릿고개
강병진 2008-10-21

경제위기의 여파로 허리띠를 졸라맨 한국 영화관련업체들

경제위기의 한파가 안 그래도 추운 영화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내년은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한 투자관계자의 전망도 “자금사정으로 봐서는 지금이 밑바닥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덧붙을 정도다. 한국영화에 반등의 기회를 줄 듯 보였던 <모던보이>와 <고고70>이 박스오피스에서 저조한 성적을 보이는데다, 최근에는 김아중, 류승범 등 톱배우가 캐스팅돼 화제를 모은 <29년>마저도 투자의 어려움으로 제작이 연기되면서 영화계는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쩌면 지난해부터 불황으로 신음하던 영화계로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계 안에서도 업계의 불황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하는 이들에게는 단지 마음의 준비로 끝나는 상황이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산업의 실물경제와 맞닿아 있는 카메라 및 발전차 렌털, 필름 공급, 보조출연, 포스터 디자인, 예고편 제작 등등 영화관련업체 종사자들은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물어봤다.

“예년 같으면 지금쯤 이듬해에 참여할 작품들이 결정됐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전혀 예상할 수 없다.” 보조출연업체 ID의 이옥희 실장의 말은 2008년 10월 현재 대부분의 영화관련업체들에 적용될 수 있다. 발전차를 운영하는 이시형씨는 “올해 12월이나 내년에 같이 하자는 영화들이 있기는 한데, 그런 약속도 믿기 어렵다”고 말한다. 한국영화 포스터를 주로 디자인해온 스푸트닉의 이관용 실장은 “내년을 내다볼 만한 작품은 <공중곡예사> 한편뿐”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공중곡예사>도 올해 촬영에 들어간 작품이다. 카메라 렌털업체인 옵티칼 캠의 김완석 이사도 “오가는 말들은 많지만, 구체적으로 치고 가는 작품은 없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내년보다도 당장 올해 살림살이 걱정이 더 큰 편이다. 스푸트닉의 경우, 지난해 하반기에는 다섯 작품의 포스터를 디자인했지만 올 하반기에는 <쌍화점>이 개봉하지 않는다면 라인업이 한편도 없는 상황이고, 이시형씨의 경우는 “2월, 4월, 7월 10월에 들어가려 했던 작품이 모두 제작을 연기한 탓”에 올해는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작품이 거의 없다. 그립장비를 운영하는 영화사랑의 최운진 팀장은 “지난해에는 15편 정도의 영화에 참여했지만, 올해는 10편 안팎이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예고편 업체인 하하하의 최승원 감독이 말하는 감소 폭도 비슷한 수치다. 옵티칼 캠이 대여하는 카메라의 대수도 지난해와 비교할 때 50% 정도 줄었다고 한다. 물론 제작편수의 감소는 예견된 일이었다. “내년이라고 해서 갑자기 편수가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란 말들도 새로운 전망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계의 소극적인 제작풍토가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꽤나 적극적이다.

미수금으로 인한 타격이 큰 영화관련업체

먼저 이들은 불황이 깊어지면서 잔금이 돌아오는 날짜도 한없이 길어졌다고 말한다. ID의 이옥희 실장은 “영화가 개봉해 극장에서 내렸는데도, 잔금을 결제해주지 않는 곳들이 많다”고 말했다. 보조출연업체의 경우는 출연자들의 일당을 미리 계산해야 하는 터라 미수금으로 인한 타격이 큰 편이다. 촬영단계에 참여하는 업체들은 그나마 크랭크업과 비슷한 시기에 잔금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마케팅 관련업체처럼 촬영 이후에 참여하는 이들은 결제시기를 놓고 제작사나 배급업체와 씨름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하하의 최승원 감독은 “지난 1년 내내 언제 결제해줄 거냐고 통화하는 일밖에 안 한 것 같다”고 말한다. “올해는 정말 힘들었다. 대기업에서 투자하는 영화들은 그렇지 않지만, 조금 규모가 작은 투자·배급사의 영화들은 잔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그쪽에서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온다면 법적 대응이라도 하겠지만, 다들 사정을 봐달라고 하니 그러기도 힘들다.” 이관용 실장의 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잔금의 50%만 받으라며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곳도 있다. 그래도 우리 회사는 다른 업체와 비교할 때 적지 않은 작품을 했지만, 미수금 때문에 운영에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법적 대응을 하고 싶어도 한다고 해서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안 하고 있다.” 한 홍보대행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 같은 상황은 마케팅 관련 비용이 제작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마케팅 비용은 투자·배급사에서 지급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제작비에서 구멍이 난 것들을 이 비용으로 메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의 영화가 빚으로 제작되는 현 상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다.

고육지책으로 덤핑도 불사하는 현실

그나마 불황 속에서도 살길을 모색하는 업체들은 강요받은 덤핑을 받아들이거나, 아예 먼저 덤핑을 제안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이런 상황을 영화계의 거품빼기로 보지만, 사실상 받아들이는 쪽이나 제안하는 쪽이나 불가피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이상 불황을 타개하는 묘책은 못되는 형편이다. 이시형씨는 “이제는 제작사나 PD들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저쪽에서는 더 낮은 가격에 해준다고 하는데, 왜 당신은 그렇게 안 하냐는 식이다. 그래서 어디가 그렇게 해주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밝힐 수 없다고 한다. 결국 동종업계에서 상호불신밖에 생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가 하면 ID의 이옥희 실장은 “덤핑으로 일을 받느니, 안 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어렵지만 현재 단가를 고집하고 있다. 다른 업체들이 제시하는 덤핑가격을 받아들이면, 남는 게 없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적자가 날 거라고 본다.” 그나마 영화가 아닌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업체들의 사정은 나은 편이다. 스푸트닉의 경우, 이전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외화 포스터나 공연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있다. 이전부터 영화뿐만 아니라 CF에 참여했던 카메라 렌털업체 옵티칼 캠도 CF쪽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CF쪽 사정도 밝지는 않다. 김완석 이사는 “요즘에는 CF도 과거에 제작한 것을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영화계의 거품빼기가 이뤄질 거라는 긍정적인 전망도 있어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비교적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필름공급업체인 태창사의 이호남 과장은 “필름공급량의 감소가 단지 제작편수의 감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영화당 필름 사용량은 예년에 비해 줄고 있다. 일단 찍고 보자는 식이 아니라 그만큼 촬영 전에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같다. 올해가 거품을 거두는 해인 건 맞는 것 아닐까?" 발전차 운영업자인 이시형씨도 "촬영이 연기되는 작품이 많으면 우리로서는 타격을 입지만, 그만큼 심사숙고해서 만드는 영화가 많다는 뜻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스푸트닉의 이관용 실장은 “무작정 낙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든 영화를 찍기는 찍을 것이기 때문에 내년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하하하의 최승원 감독은 “몸집을 줄여서 적게 쓰는 구조로 바꾸다 보면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기대는 다시 자금난의 문제와 직결된다. 과연 언제쯤 지금의 위기가 기회로 바뀔까. 자금을 쥐고 있는 투자관계자들이 바라보는 시점도 내년이다. CJ엔터테인먼트의 최준환 부장은 “현재 제작비를 효율적으로 세팅하는 것과 영화계 곳곳에서 해외시장 개척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내년 하반기에는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오픈 앤 디드 픽쳐스의 서영관 대표는 “투자자들 사이에서 심리적인 공포가 있지만, 내년이면 지갑을 여는 이들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화계의 투자심리가 산업의 실물경제를 움직이는 이들의 반응으로 이어지는 시점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영화계의 적극적인 제작풍토가, 더 넓게 보자면 한국경제의 상황이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 역시 적극적일 거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영화관련업체들이 2009년 한국영화계에 바라는 것

“보조출연업체들은 아무래도 예산이 큰 영화들을 기다린다. 그래야 보조출연자들도 많이 쓰고, 보조출연쪽 예산도 몇억씩 잡히니 말이다. 지금은 2천만원에서 3천만원 정도의 예산이 잡힌다. 지금은 전체 예산이 5억원 정도 되는 것도 많다. 20억원 정도의 영화라고 하면 꽤 큰 영화가 돼버렸다. 내년에는 흥행성 높은 대작이 많이 제작되기를 바란다.” - ID의 이옥희 실장

“포스터 디자인 업체는 사실 포스터만 디자인하는 게 아니다. 보통 영화가 투자받기 전부터 일을 시작하는데, 제작사의 로고나 명함, 그리고 시나리오 표지디자인까지도 해야 한다. 돈을 못 받아도 잡일이 많은 거다. 이게 어느덧 관례가 돼버렸는데, 좀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를 바란다.” - 스푸트닉의 이관용 실장

“계약을 이행하는 일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장비가 많은 회사는 크게 영향을 안 받겠지만, 적은 회사는 계약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큰 타격을 받는다. 다른 영화에 장비를 대여할 수 있는데,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제작이 연기된 것도 아니고 갑자기 업체를 바꾸는 경우는 더 받아들이기 힘들다.” - 발전차 운영업자 이시형

“아직 잔금을 못 받은 작품이 몇개 있다. 예전에는 기다리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영화쪽이 다른 데에 비해서 그리 삭막하지는 않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년에는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하하하의 최승원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