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종합문제를 푸는 심정이었다”
2001-11-16

배창호 감독 인터뷰

<흑수선>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을 몇시간 앞둔 11월9일 1시,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기자, 평론가들과 첫 만남을 가졌다. 프린트는 이미 완성돼 있었지만 영화제 쪽의 요청으로 개막일까지 시사를 미룬 것. 이날 시사회는 개막작 상영을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도 객석은 가득 찼고 외국 기자들과 피에르 리시앙 등 해외영화제 관계자들도 눈에 띠었다. 아마도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흥분된 날을 보내고 있을 배창호 감독을 현장에서 만났다.

부산영화제 예매 개시 직후에 매진돼 화제가 됐다. 감회가 새로울 텐데.

기분 좋지만, 좀 우려가 된다. ‘재미’만을 추구한 영화는 아닌데, 관객이 그것만 기대하는 건 아닐까 해서. 미스터리스릴러라는 장르적 운반수단을 통해서 조금 진지한 얘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영화의 어떤 요인이 관객의 기대를 부추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마케팅적인 요소겠지. 스타가 나왔다는 것, 그리고 볼거리가 화려하다는 것이 부각됐으니까.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는 점 때문에도 기대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같은 영화는 아니다. <흑수선>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는 것이 감독 개인에겐 어떤 의미인지.

영화제가 해를 거듭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그만큼 국내외적인 관심이 쏠리는 자리라서, 영화의 위상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대중성은 물론이고, 작품성에 있어서도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개막작 선정 사실이 좋은 자극이 됐다. 그 때문에 후반작업도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고.

촬영과 후반작업이 좀 빠듯했던 걸로 안다. 아쉬움은 없는지.

영화 전체의 퀄리티에 영향을 끼칠 만큼 빠듯하진 않았다. 감독으로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힘들어지긴 했지만. 편집이나 음악 작업을 촬영 중반부터 틈틈이 해 뒀기 때문에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모니터 시사가 2회 있었던 걸로 안다. 당시 반응은 어땠나.

좀 찡할 거라고 짐작한 대목에서 관객이 생각보다 크게 반응했다. 황석이 손지혜를 위해 총알받이로 나서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리고 사건이 해결되면서 스토리의 비극성이 부각되는 시점에서, 관객이 울더라. 또 하나 느낀 건 요즘 관객이 사소한 걸 잘 꼬집어낸다는 점. 눈들이 참 섬세해졌다. 그들의 지적과 반응이 많은 도움이 됐다.

가벼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요즘 경향에 위축되진 않는지.

시대적인 흐름이긴 하지만 영화를 소모품으로, 킬링타임용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은 좀 우려가 된다. 영화가 갖는 ‘의미’라는 걸 너무 버거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요즘 관객이 영화를 다각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믿음은 있다.

제작 발표 당시 ‘배창호 감독이 블록버스터를 만든다’는 사실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에서다.

한상준 프로그래머가 90% 가편집본을 보고 그러더라. 배창호 감독 영화라고. 어떤 스케일로 또 어떤 스타일로 만들더라도, 내가 인간을 보는 시각, 형식적인 리듬감, 절제적인 요소들,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 같은 것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번 영화에서도 달빛이나 햇살, 그림자, 바람, 안개, 비 같은 자연적인 요소들에도 이야기와 감정을 담으려고 했다. 같은 액션이라도 인간의 정서와 연결해 보여주려 했고. 그런 아우라가 있다고 할까.

<최후의 증인>이라는 소설과 영화가 원작이라고 들었다. 원작의 어떤 점에 끌려서 영화화를 결정했나. 각색 포인트가 있었다면.

이야기의 뼈대는 같지만 범인은 다르다. 원작의 허무적인 분위기를 지우고, 역사에 상처받고 희생당한 두 남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원작은 이야기의 주공간이 빨치산인 반면, <흑수선>은 거제포로수용소로 접근했다는 점도 다르고. <텔미썸딩> 같은 형사영화가 대중적 인기 장르로 자리잡고,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전쟁이 낳은 남과 북의 현실, 그런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가 등장하는 걸 보면서 ‘이제 때가 됐다’는 생각을 했었다. 한국전이라는 소재야말로 시각적으로 테마적으로 국제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영화적 스펙터클로 관객을 잡아끌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이제 한국영화계가 그런 소재를 형상화할, 기술적인 능력을 갖춘 것이다.

거제포로수용소를 이야기의 주공간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연하게 시작했다. 지난해 8월에 거제도로 여행와서 포로수용소 기념관에 들렀는데, 다시 지어 놓은 막사들을 보면서,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최후의 증인>이 떠오르더라. <제17포로수용소>나 <콰이강의 다리>나 <대탈주>처럼 2차대전을 다룬 고전영화들이 있잖나. 이 공간이라면 그처럼 의미도 담기고 시각적으로도 충분히 강렬한 영화를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수선(이미연)’의 내레이션 위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내레이션은 확실히 시나리오보다 늘어났다. 스토리 전개상 필요한 사건들을 압축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방대한 이야기를 펼치기엔 시간이 부족하니까. 과거로 들어가는 매개체가 ‘흑수선’의 일기장이기 때문에 그걸 읽어내려가는 듯한 형식을 취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은 지금 젊은 관객에게 낯선 역사다. 거제포로수용소가 어떤 곳인지도 잘들 몰라서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했다. 오프닝에 거제포로수용소에 대한 설명 자막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역사적인 배경을 알려주고, 또 사실감을 던져주기 위해서는 사전 설명이 필요했다. 특히 젊은 관객과 외국 관객을 위해서.

아이러니인 것은, 그 시대 그 공간에 놓인 캐릭터들의 정체성과 이념이 탈색돼 있다는 사실이다.묘사할 것만 묘사했다. 민족 분단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비극성, 그 보편적인 비극성을 다룬 것이다. 이건 리얼리즘영화가 아니다. 그렇게 가기엔 시간도 없었고, 톤도 맞지 않았다.

미스터리스릴러라는 장르와 휴먼 드라마적인 메시지를 어우러지게 하는 일이 연출의 관건이었을 것 같다.

촬영 당시에도 이야기했듯이 ‘종합문제’를 푸는 심정이었다. 이 영화에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사건도 많고, 시대도 왔다갔다 하고, 캐릭터 소개도 해줘야 하고, 복선도 갈등도 많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진행하면 할수록 처음 생각보다 ‘깊이’가 생겼다. 이상하게 제작자도 그걸 바라더라. 진국을 끓여서 기름기를 걷어냈다고 할까. 이번엔 편집도 새로 배운 셈이다. 필름 10만자를 써서 2시간 넘는 영화로 찍어 놨지만,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나니 1시간40분도 쓰기 나름으로 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0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스토리라서, 배우들에게 특별한 연기 주문이 필요했을 것 같다.

같은 소재의 영화를 30년 전에 만들었다면, 연기와 분장에서 별로 걱정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 라텍스 특수분장을 시도했는데, 배우들 얼굴에 심한 트러블이 일어나는 등 부작용이 많았다. 어차피 극사실주의적인 표현은 어려웠기 때문에, 배우들에게 그 세월의 간극을 감정 연기로 표현해보자고 주문했다. 회화의 경우에도 사실주의가 있는가 하면 인상주의도 있지 않나.

배우들과의 호흡은 잘 맞았나.

안성기씨를 제외하곤 서로 잘 모르는 상태라 처음엔 좀 서먹했다. 그런데 미연씨도 좋은 의견을 많이 내줬고, 정재씨도 감독을 신뢰해주고 잘 따랐다. 안성기씨 덕에 내가 좀 편했다. 현장에서 솔선수범하니까, 내가 편했지. 우리 부감독이었다. (웃음)

비주얼에 특히 많은 공을 들였다. 시대와 공간에 따른 시각적 컨셉이 있었는지.

전반적으로 구도의 입체감을 살리려 했다. 스크린이라는 평면이 3차원적으로 느껴지도록. 슈퍼35mm 촬영으로 와이드하게 펼치면서, 선의 대칭을 살리려 했다. 과거 신은 범행의 동기가 드러나는 대목에선 세피아톤으로 좀 강렬하게 갔고, 나머지 과거 신은 갈색으로 은은하게 잡았다. 현재는 블루와 그레이로 모던한 느낌을 살리려 했다. 오 형사와 한동주가 마주 하는 일본에서의 촬영분은 원색을 중심으로 써서 극적인 강렬한 느낌을 주려고 했다. 이런 색감이 잘 사는 공간을 찾아 장소를 선정하고 촬영을 했다.

큰 촬영이 많았는데, 어떤 신이 특히 힘들었나.

탈출 포로들이 폐교 바닥의 땅을 파다가 수맥을 건드리는 장면이 있다. 2분 분량인데, 그 장면을 일주일 동안 찍었다. 배우들이 수영을 못해서 많이 힘들어 했고, 감독이 물 속에 들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과엔 어느 정도 만족하는지.

만족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때론 능력이 부족해서, 때론 시간이 부족해서, 때론 판단이 성급해서, 제대로 못한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느냐 열정을 갖고 임했느냐의 잣대로 답하자면, 만족한다. 대중영화 속으로 7년 만에 들어왔다. 관객이 많이 까다로워졌다는 걸 느낀다. 스탭부터 굉장히 세밀하더라. 예전엔 그냥 넘어갔던 디테일들을 일일이 따지고 들어오더라. 그동안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차기작 계획을 묻기엔 좀 이르지만, 다음 행보가 정말 궁금하다.

<흑수선>의 결과에 관계없이, 또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할 거다. 아주 강렬한 영화가 될 거다. <흑수선>처럼 현대적인 기법이면서, 한국적인 색깔을 지닌 그런 작품. 박은영 cinepark@hani.co.kr▶ 장인의 세기와 영화청년의 패기가 뒤엉킨 <흑수선>을 말한다

▶ 영화제 인사들의 <흑수선> 관람평

▶ 배창호 감독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