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소설의 충실한 요약본 <눈먼자들의 도시>
장영엽 2008-11-19

영화 보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지수 ★★★★★ 줄리언 무어 완소 지수 ★★★★★ 제작진의 안목 지수 ★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들이 공유하는 몇 가지 고민이 있다. 첫째, 소설의 어떤 부분을 영상으로 옮길 것인가. 둘째, 선택한 대목을 시각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셋째, 이렇게 만든 영화가 과연 원작 이상의 무언가를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이 세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영화는 이미 절반쯤 성공한 셈이다.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의 제작진은 촬영에 들어가기도 전에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소설의 판권을 넘길 수 없다"며 뭇 감독들의 구애를 매정하게 뿌리치던 원작자 주제 사라마구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영화는 노작가를 설득한 만큼 관객을 설득시키지 못한다. 촬영 이전에는 자신있게 내놓았을 고민의 답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소설 <눈먼자들의 도시>의 충실한 요약본이다. ‘눈앞이 하얘지는’ 실명 전염병이 창궐한 도시, 오직 한 안과의사(마크 러팔로)의 아내(줄리언 무어)만이 눈이 멀지 않는다. 길거리엔 오물이 가득하고, 굶주린 개가 죽은 자들의 시체를 물어뜯으며, 시력과 함께 이성 또한 사라진 도시는 단테가 묘사한 아홉 가지 지옥의 축소판이다. 영화는 그 다양한 지옥 중 몇 가지 모습을 골라 줄리언 무어의 눈을 통해 선택적으로 보여준다. 격리시설 제3병동의 ‘왕’(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과 그 일당들이 식량을 무기로 여자들을 강간하는 장면이나 안과의사 일행이 은신처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더러운 몸을 씻겨주는 장면이 비중있게 다뤄지는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적어도 사라마구의 소설에서 인간의 선과 악이 가장 극렬하게 대비되는 대목이 어느 부분인지는 알고 있다는 증거니까. 그러나 매끄러운 요약에 집중한 나머지 영화는 소설의 은유를 효과적으로 표현해줄 영상언어에 대한 고민을 잊은 듯하다.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장면에 내레이션이 불쑥 끼어들어 극의 흐름을 방해하고, 시각적으로 좀더 강렬해도 좋았을 만한 장면(이를테면 병동이나 거리의 폭동)에서는 도발하지 않음으로써 <눈먼자들의 도시>는 소설 특유의 아우라를 잃었다. ‘눈먼’ 제작진들이 방향을 잃고 헤매는 동안, 오직 줄리언 무어만이 든든한 연기로 이 영화를 뒷받침한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영화화가 못내 아쉬운 작품이다.

Tip/마크 러팔로를 비롯해 ‘눈먼 자’를 연기하는 700여명의 출연진(엑스트라 포함)은 맹인 연기를 위해 특수한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눈앞이 실제로 하얗게 보이는 백색 컬러렌즈를 끼고 걷고 대화하고 길을 찾는 연습을 했다고.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