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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폭 코미디 해부] ‘게으른 후속편’이 말아먹은 영광

미국 비평가 달시 파켓의 눈에 비친 한국식 조폭코미디

<넘버.3>를 높게 평가하고 의외로(?) <두사부일체>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미국 출신의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은 <주유소 습격사건>을 한국 조폭코미디의 원형으로 본다. 만국 공통어인 ‘갱스터 코미디’라는 개념 안에서 한국 조폭코미디를 읽는 달시 파켓은, 이 장르를 한국사회 내의 어떤 미묘한 맥락 안에 둔다. 한 서구 비평가의 눈에 조폭코미디는 어떤 계보를 그려나갔을까.

송능한의 <넘버.3>(1997)가 4∼5년만 늦게 만들어졌다면 어땠을까? 만약 2002년이나 2003년에만 나왔어도, 그 인상적인 캐릭터들과 한 깡패가 스스로 자초한 엄청난 몰락을 다루는 뛰어난 솜씨로 평론가와 관객을 모두 놀라게 하지 않았을까? 그 이전의 <조폭마누라> <달마야 놀자>와 2003년의 뛰어난 작가영화들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 <올드보이>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면서 아마 500만, 600만 관객 동원은 문제없었을 것이다. 물론 2002년이라면 1997년같이 그런 배우들을 모두 캐스팅하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말이다. 만약 최근 한국영화사를 다시 쓸 수 있다면, 이게 내가 쓰고 싶은 플롯이다. <넘버.3>가 한국형 갱스터 코미디를 구한다는.

왜 조폭이냐고? 그냥!

<넘버.3>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 1997년에 한국영화는 여전히 한국 관객의 관심권 밖에 있었고, 입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느려서 이 영화는 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때는 작가 감독적 감성으로 상업적인 장르영화를 만드는 모델이 존재하지 않았다. 송능한은 외로운 개척자였던 셈이다. 이 영화는 물론 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송강호의 배우 경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김지운, 봉준호, 최동훈 같은 감독들이 그 뒤를 이었다.

<넘버.3>

<신라의 달밤>

어떤 평론가들은 <넘버.3>를 한국형 갱스터 코미디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장르의 캐릭터들이나 태도는 다른 영화- 김상진의 <주유소 습격사건>(1999)에서 왔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이 영화가 갱스터들이 벌이는 극적인 소동을 그리며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이후 다른 영화들의 기반을 이루는 일종의 정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인 낸시 아벨만과 교육학자인 최정아는 2005년에 그들이 발표한 논문에서 이 영화의 핵심은 그들이 주유소를 터는 이유- ‘그냥’ - 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그냥’에 내포된 막나가는 자기중심적 태도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거부는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를 보여준다고 논한다. 경제개발기의 몇 십년간, 국가는 한국인에게 개인적인 즐거움을 더 큰 목적을 위해 희생하라고 요구해왔다. ‘그냥’은 이런 논리를 부정하고 거부한다.

이 ‘그냥’이라는 태도는 그 이후 갱스터 코미디들에 반영된다. 예를 들어 <두사부일체>의 광고 포스터에 “그래, 나 또 조폭이다. 왜?” 같은 문구로 다시 나타난다. 별로 바람직한 정서는 아니지만 영화에 특별한 에너지를 불어넣었던 것은 바로 이 정서다. 많은 평론가들은 2001년의 유명한 갱스터 코미디 4인방 <신라의 달밤> <조폭마누라> <달마야 놀자>와 <두사부일체>를 한국영화의 부끄러운 후퇴로 여긴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이 영화들은 무척 흥미롭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사부일체>는 멜로드라마와 도덕적 분노의 역설적인 정조(사회 정의를 위해서 깡패들이 학교의 관료들과 싸워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라)를 결합하면서 한국적인 스타일의 감정적 효과를 만든다. <달마야 놀자>는 불교 사찰이라는 장소, 한국 놀이들, 사투리 등 디테일에서는 한국적인 것을 살리지만 감정적인 구조는 할리우드영화에 더 가깝다. 두 영화는 모두 절묘한 코믹 타이밍과 효과적인 내러티브 전개가 돋보이고 그래서 무척 재미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성취다.

여고 공포영화가 더 오래 살아남겠네

<조폭마누라>는 이 영화들처럼 잘 만들어지지는 않았을지언정 한국형 갱스터 코미디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이들 초기 갱스터 코미디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이 컨셉 영화라는 점이다. 간단한 한 문장으로 전체 플롯을 요약할 수 있고, 그 한 문장만 봐도 그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한 필리핀 영화감독은 <조폭마누라>의 영어 제목(<My Wife Is Gangster>)를 듣고 나서 바로 웃음을 터트렸고 그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영화 자체는 여러 결함이 있지만 신은경이 연기한 주인공(박상면의 뛰어난 연기에 의해 뒷받침된)은 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이미지다.

따로 나누어놓고 보면 이 영화들 각각은 사실 별볼일없는 영화들일 수 있지만, 이들은 새로운 트렌드를 이루면서 부분보다 더 큰 전체로서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냈다는 데 가치가 있다. “뉴 갱스터 코미디”를 보러 온 사람들은 특정한 기대를 안고 영화를 보러 왔으며, 감독들은 여러 흥미로운 방법으로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다 해도, 국제적으로는 물론이고, 한국 갱스터 코미디는 하나의 브랜드를 이루었다. 한 나라의 영화산업이 성공적으로 이렇게 특정한 하위 장르를 만들어내는 일은 드물다. 그리고 이것이 지속될 경우 상업적이고 창조적인 면에서 많은 이점이 있다.

그러나, 결국, 갱스터 코미디보다는 여고 공포영화가 더 긴 생명력을 보여주며 살아남을 것 같다. 특정 하위 장르가 지속되기 위해서 꼭 그 장르의 뛰어난 영화들만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면 좀 형편없더라도 같은 장르의 영화를 계속 내놓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처음에 <가문의 영광>은 갱스터 코미디가 장수할 수도 있으리라는 전망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제작자들은 갱스터 코미디를 마지막 한 방울의 과즙이 다 나올 때까지 레몬을 쥐어짜듯 그렇게 쥐어짜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난 몇년간 ‘게으른 후속편’ 모두를 억지로 보았다. 이들은 장르에 뭔가 새로운 것을 보태기보다는 옛날에 써먹었던 농담들의 닳고닳은 기억을 들추면서 돈만 짜내려 했다. 초기영화들의 플롯이 흥미로운 문장 하나로 요약될 수 있었던 데 반해, 후속작들의 줄거리는 요약할 가치조차 없다. 때로는 크게 성공한 영화가 하위 장르의 존폐에 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수백만명의 관객이 돈을 주고 티켓을 사서 결국 이 영화들은 이제 더 볼 게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면 말이다.

아마도, 부활은 불가하리니

많은 평론가들이 갱스터 코미디를 무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조차 이들 영화를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되는 영화라고 여기는 것은 슬픈 일이다. 개인적으로 갱스터 코미디의 쇠락이 유감스럽다. 시작은 아주 좋았고 무언가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것으로 자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늦었다. 이런 성차별적 언사를 쓰는 것이 퍽이나 유감이지만, 갱스터 코미디는 아들이 없어 대가 끊기게 된 조선시대 양반 가문과 같다. 옛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완전히 새 가문을 세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