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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비드 핀처의 기이한 사건

‘고통의 왕’이 만든 매혹적인 판타지 로맨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비드 핀처의 신작.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의 앙상블. 이것만으로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호기심이 갈 만하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가 아는 그 데이비드 핀처의 암울하고 폐쇄적인 세계는 온데간데없고 지고지순한 사랑과 동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묵시록의 스타일리스트, 고통의 왕인 데이비드 핀처가 방향을 바꾼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이 영화가 올해 아카데미 시즌 13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가장 강력한 폭풍의 눈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시계가 거꾸로 돌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에릭 로스의 전작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가 세상의 많은 신기한 일을 경험한 뒤 고향에 돌아와 벤치에 앉아 사람들에게 들려주던 바로 그런 종류의 이야기. 포레스트와 벤자민에게 동일한 운명이 있다면 그들이 고향을 떠났다가도 마침내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며 우리가 듣는 영화의 전편이 그들의 회고담이라는 것이다. 이름을 짓자면 ‘홈타운 무비’라고 할 만한 그런 영화들. 이 영화들은 아늑하고 풍요로운 상상력의 시간을 안겨준다.

<쎄븐> 감독이 홈타운 무비를?

그런데 놀라운 건 올해 아카데미 시즌의 핵으로 떠오른 이 홈타운 무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연출한 감독이 다름 아닌 할리우드의 소문난 비관주의자이며 스타일리스트인 데이비드 핀처라는 점이다. 핀처가 홈타운 무비를 만들다니. 이 영화의 원제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을 빗대어 말하자면 이건 정말 데이비드 핀처의 기이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늙어 병석에 누운 할머니가 딸에게 누군가의 일기장을 건네며 읽어달라고 청한다. 그건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이라는 남자가 쓴 일기장이다. 벤자민은 1차대전에서 아들을 잃은 어느 시계공이 아들을 기리기 위해 기차역에 거꾸로 가는 시계를 만들어 세우던 1918년 그 어느 날에 태어났다. 그런데 거꾸로 돌아가는 그 시계 탓이었을까. 그는 태어날 때 이미 노인이었고 나이를 먹으면서 젊어지다가 결국에는 아이로 죽게 되는 운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이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한 그의 친아버지가 벤자민을 양로원 앞에 내다버리고, 양로원을 운영하는 흑인 퀴니가 그의 엄마 노릇을 하며 그를 키웠다. 벤자민은 17살이 되어 집을 떠나고 선원으로 전세계를 여행하며 러시아에서는 영국 외교관의 부인 엘리자베스 애봇(틸다 스윈튼)을 만나 잠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정착지는 결국 첫사랑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였다. 유년 시절에 만나 사랑에 빠진 뒤 벤자민은 평생 그녀 곁을 맴돌고 한때는 그녀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는다. 하지만 벤자민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젊어지고, 아니 어려지고, 데이지는 점점 늙어간다. 벤자민은 아이를 위해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데이비드 핀처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각본을 건네받은 건 1992년이다. 당시 핀처가 원작자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을 읽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이후에 들려준 생각은 이렇다.“로빈 스위코드의 초안을 읽었을 때는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에릭 로스의 것을 읽고는 (이 영화가) 죽음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러브 스토리에 대한 좀더 심오한 맥락이 있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러브 스토리는 늘 죽음으로 끝나지 않나.” 한편으론 “내가 정말로 반응한 것은 운명에 휘둘리지 않는 두 인물”이었다고도 말한다. 운명에 휘둘리지 않는 인물들. 핀처 영화의 주인공들은 늘 운명과의 대면에 있었다. 운명에 포박된 얼간이들이거나 무능력자들이거나 그것에 파괴적으로 저항하는 인물들이었다. <조디악> 이전까지는 그 운명에 피와 주먹다짐으로 버티다가 결국에 패배하는 남자들이 있었고 <조디악>에서는 끝까지 강박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자가 있었고 지금은 그 운명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다.

내밀하게 두터워진 스타일 정신

‘게임보이’, ‘고통의 왕’. 그러니까 그동안 핀처는 늘 이런 식으로 불려왔다. 그는 할리우드가 기피할 만한 고통스럽고 파격적인 소재를 택했고 그러면서도 성공을 거듭해왔다. 광고를 찍어내는 솜씨를 보고 단순히 돈을 벌어들일 만한 녀석으로 생각하고 <에이리언3>(1992)의 감독으로 발탁한 이십세기 폭스의 관계자들을 그가 전에 없던 묵시록적 버전으로 놀라게 한 건 유명한 일화다. 결국 <에이리언3>는 30분 분량이 잘려나갔고 그 뒤 핀처는 <에이리언> 시리즈 박스 세트의 감독 코멘터리에 불참함으로써 그 앙갚음을 했다. <쎄븐>(1995)은 지금까지도 묵시록적인 분위기로 네오 누아르의 경지를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더 게임>(1997)과 <패닉 룸>(2002)은 확실히 허술했지만 테크니션으로서 그의 위치를 더 확고히 했다. 그 사이에 만들어진 <파이트 클럽>(1999)은 핀처의 추종자들에게는 지금도 최고작으로 꼽힌다.

큰 변화가 일어난 건 <조디악>(2007)이다. 핀처 2기라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누군가는 이 작품이야말로 핀처의 최고작이라고 꼽는다(<필름 코멘트>의 켄트 존스). 여기서 데이비드 핀처는 확실히 다른 걸 시도한다. 그는 <조디악>을 찍으며 크게 두 가지를 바꾸었다. 디지털카메라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 방식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도 고수했다. 또 하나는 영화의 분위기를 다른 식으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현란하고 긴박감이 넘치던 자리를 중후함이 대신했다. 스타일에 대한 추구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내밀하게 두터워졌다.

<조디악>에서 영화의 이야기는 제이크 질렌홀쪽으로 바통이 넘어가는 중반 이후 급격하게 힘이 떨어진다. 하지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산재하는 노란색과 푸른색에 대한 강박과 거기에서 오는 이상한 정서적 감응(주인공이 일하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사의 커다란 둥근 기둥들과 그 밖에 각종 소품 및 의상의 색상은 어떻게 변해갔던가), 또는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벨벳>이 그러했던 것처럼 몽상적이고 우주적인 음악을 음침하고 위험한 분위기의 음악으로 단숨에 탈바꿈시켜버리는 것(도노반, 마빈 게이 등의 음악) 등이 이 영화를 감정적으로 복잡하게 만든다.

어쨌든 핀처는 <조디악>까지 운명에 도전하거나 그것에 갇힌 얼간이와 무능력자들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건 스릴러와 서스펜스 또는 SF 장르 내에서 그려냈다. 하지만 이때 그 시간을 지배하는 진짜 운명의 정체가 실은 ‘주어진 아이러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핀처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한계상황에 봉착하거나 운명에 부딪치는 진짜 이유가 될 것이다. 동시에 그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그 이전의 작품들과 이어주는 점이다. 육체의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한 남자의 지속적인 삶에 관심을 두고 이 아이러니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만 있는 특징은? 핀처는 지금 생애 처음으로 슬프고 아름다운 로맨스를 그려내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 로맨스는 처음으로 이야기의 중심에 들어왔다.

특수분장보다 두 배우에 집중하라

피츠제럴드의 원작에는 끝끝내 다시 돌아갈 고향과도 같은 사랑이란 없다. 풍자가 원천적인 힘이다. 하지만 영화는 오로지 사랑의 시간 안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장점을 특수분장이라고 말하는 건 협소하다. 브래트 피트의 표정연기를 모션 캡처(배우의 몸에 센서를 부착하여 표정이나 움직임을 재생해내는 시스템)한 다음 CG로 손보고 대역 배우의 몸에 합성하여 완성한 늙은 벤자민의 유년 시절의 모습은 기술적 진일보일 수는 있지만 그다지 신기해 보이지는 않는다. 궁금한 건 거꾸로 세월을 사는 사람의 희로애락을 어떻게 표현해낼까 하는 점일 텐데, 그건 특수분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때 핀처가 그동안 뽐내지 않았던 로맨틱한 연출 감각과 더불어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 두 배우를 주목해야 한다.

브래드 피트는 더이상 안젤리나 졸리의 남편으로만 기억될 배우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브래드 피트는 그냥 잘생긴 배우가 아니라 미치광이, 얼간이, 무표정한 목석을 가장 잘 연기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 됐다. <쎄븐>과 <파이트 클럽>은 그러한 브래드 피트의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시간을 거슬러 태어난 운명에 대해 벤자민으로서의 그가 무표정을 지으면 지을수록 더 깊은 인생의 골이 남는다. 반면 케이트 블란쳇은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임을 다시 확인시킨다. 말괄량이에서 노년까지 그녀는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삶을 새로 창조해낸다. 이 영화를 볼 때는 무엇보다 이 두 배우에 집중해서 보는 재미를 놓치면 안될 것 같다. 이건 벤자민과 데이지의 믿을 수 없이 절실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생에 관한 한편의 아름다운 우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핀처 세계의 기념비적 작품이 될 것인가 혹은 변화를 알리는 분기점이 될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고 답해야겠다. 변종을 만드는 성병에 걸린 1970년대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그래픽 노블 <블랙홀>을 비롯하여 그의 차기작으로 거론되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예전의 장르들이다. 그는 자신이 다뤄왔던 장르 안으로 다시 돌아갈 것 같다. 거기에서 다시 이처럼 초연한 로맨스를 다룰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이번에는 뒤집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놀랄 만한 예외성은 그만큼 더 크게 부각될 수도 있다. 핀처는 자신에게 없다고 사람들이 믿었던 능력을 뽐내듯이 능숙하게 보여주었다. 피츠제럴드의 원작조차 시간을 거꾸로 세우는 문제를 풍자에만 집중한 반면 그는 에릭 로스라는 각본가의 이야기 위에 은밀한 시각적 풍요로움을 포개면서 생에 관한 한편의 우화를 그려냈다. 그러니 이 영화는 당분간 핀처의 필모그래피에서 예외로 남게 되겠지만, 사실은 그가 판타지와 로맨스에도 재주꾼이라는 주장을 입증하기에는 더없이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사실은, 죽도록 사랑하지 않아

벤자민은 피츠제럴드의 원작과 어떻게 다를까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을 어떻게 각색했을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을 보고 나면 늘 드는 궁금증이다.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살리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영화들도 있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원작에서 벤자민이 태어나는 해는 1918년 뉴올리언스가 아니고 1860년 볼티모어다. 남북전쟁 직전이며 영화에서 그의 태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짐작되는 맹인 시계 수리공의 일화 등은 없다. 벤자민은 그냥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난다.

여러 가지 차이들이 있지만 원작에서 벤자민은 태어나자마자 버려지지도 않았고 죽 가정의 품 안에서 자라 예일대와 하버드까지 진학하게 되고, 어렸을 때는 이미 날 때부터 말을 하고 유년 시절에는 키가 173cm로 묘사된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라면 영화와 달리 소설의 벤자민은 아내 힐데가드를 죽도록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나이가 마흔쯤 되었을 때 이미 약간의 싫증을 낸다(소설에서 여주인공의 이름은 힐데가드다. 데이지가 아니다. 데이지는 피츠제럴드의 유명한 장편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인물 이름인데 영화는 여주인공의 이름을 그렇게 바꿔 지었다). 소설에서 벤자민은 손자까지 보며 산다.

피츠제럴드는 이 단편소설을 1922년 <콜리어스>(Collier’s)에 발표한 뒤, 언젠가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 맨 처음에 오고 최악의 순간이 마지막에 온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에 영감을 받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집필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피츠제럴드는 트웨인이 말을 중심에 놓고 이리저리 거꾸로 생각해본 것 같다. 인생의 시간이 뒤바뀌면 행복할까, 슬플까? 무엇이 바뀔까? 소설의 기조는 다소 유머러스하기까지 하여 인생에 대한 유쾌하면서도 풍자적인 짧은 한 토막 이야기를 전해 듣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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