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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 <단지 유령일 뿐>
이화정 2009-03-18

synopsis 휴가철 미서부로 떠난 여행 중 권태를 느끼는 부부 엘렌(마리아 시몬)과 펠릭스(오거스트 딜), 친구가 반한 남자 라울(스티페 에르체그)에게 호감을 갖고 그의 초대로 제프텐버그로 가는 카로(카리나 플라체카), 남편의 친구 이레네(이나 베이세)와 요나스(보탄 빌케 모링) 커플의 방문으로 아이슬란드에서의 단조로운 일상에 흔들림을 느끼는 요니나(솔베이그 아니스도티). 친구따라 자메이카로 여행 왔다가 원주민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려 섬을 떠나지 않는 크리스틴, 여행 중인 부모를 찾아 베니스에 왔다가 자신의 외로움을 발견하는 마리온(프리치 하벌란트). 낯선 도시로 여행 중 맞닥뜨린 감정의 동요로 이들 각자는 심란하다.

“독일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살아요. 여행 갔다가 다시 가서 일하고….” 미서부 여행 중 클럽에서 만난 주민 남자와 대화를 나누던 엘렌은 이렇게 말한다. 부부가 함께 원거리 여행을 하는 것이 남자에게는 특별한 행사 같아 보이지만, 이들 부부에게, 특히 독일인에게 여행은 ‘이벤트’가 아닌 휴가철의 평범한 관습일 뿐이다. <단지 유령일 뿐>은 이렇게 별스럽지 않은 다섯 그룹의 여행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을 뒤쫓는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감정이지만, 마음속의 커다란 동요임을 드러낸다.

낯선 거리, 낯선 음식,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가지는 것은 꽤 그럴듯한 기분 전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일상의 고민들을 잔뜩 짊어지고 여행을 한다. 권태기에 접어든 부부의 자동차에도, 친구의 남자를 탐하는 여자의 열차 티켓에도, 여행 중인 부모와 만난 여자의 커다란 배낭에도 이 고민의 무게는 버겁다. 그러나 대개의 로드무비가 그러하듯, 인물들은 각자가 떠난 길의 끝에서 자신들이 당면한 고민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얻는다. 친구를 저버리고 사랑을 택하든가,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외로움을 솔직하게 인정하든가, 그도 아니면 숨겨두었던 원주민을 향한 은밀한 감정을 폭발하는 식으로.

독일 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원작자 헤르만이 직접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원작이 잘게 쪼개진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영화는 쪼개진 이야기들을 교차편집한다. 그런데 다섯편의 이야기가 뭉뚱그려진 탓에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다. 베니스, 아이슬란드, 그랜드 캐니언, 자메이카 등 시시각각 변하는 로케이션과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을 꿰맞추려면 인포메이션에서 지도 한장이라도 발급받아야 할 지경이다(한국 개봉 버전엔 관객 이해를 돕기 위해 독일판에 없는 장소 자막이 등장한다). 드라마적인 결합 요소가 약하다보니 결국 남는 건 인물들이 가진 무거운 감정의 조각이다. 단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고민이라는 이유로 관객이 이 짐을 기꺼이 떠안으리라는 건 섣부른 기대다. 이들의 고민이 한편의 영화를 넘어 선뜻 다가오지 않는 건 그래서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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