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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고통의 역사에 구경꾼의 역할을 묻다
김용언 2009-03-24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가 처한 딜레마, 택한 돌파구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소아성애자가 아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스티븐 달드리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논쟁적인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를 영화화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가 개봉한 직후, 발빠르게 올라온 몇몇 인터넷 리뷰들은 다른 무엇보다 영화 속 10대 소년과 30대 여성의 육체적 사랑에 대해 침 튀기며 설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이클을 맡은 독일 배우 데이비드 크로스가 만 18살(독일에서는 18살이 넘어야 섹스신을 찍을 수 있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촬영할 정도로 철저하게 규정을 지켰지만, 달드리 자신은 영화 속 섹스신이 그리 많지도 혹은 굉장히 논쟁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을 보시라. 책에는 섹스에 대한 더 많은 본질적인 묘사들이 들어 있다. 영화에서는 오히려 소극적으로 찍었다고 생각하는데….”(스티븐 달드리) 그러니까 이건 폭력이나 죽음보다 섹스에 대해서만큼 강박적으로 청교도적 자세를 유지하려는 일부 미국인의 유난스러운 태도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 <더 리더>는 또 다른 논쟁의 중심으로 옮겨갔다. <뉴욕타임스>는 <더 리더>를 두고 “예술적으로 흩뿌려지는 눈물과 함께,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방부제 처리하는 영화”이자 “끼워넣기 수법을 멋지게 발휘함으로써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역사적 파국에 관해 호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종류의 영화”라고 비판했다. 한편 <할리우드 리포터>에서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 중 성숙의 정점에 도달한 잘 짜인 이야기”라고 호평했다. 스티븐 달드리의 신작 <더 리더>는 과연 홀로코스트를 미화하는 영화인가 그렇지 않은가. 혹은 이것은 ‘올바른’ 홀로코스트 영화인가 아닌가.

한나의 선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1950년대 독일. 15살 소년 마이클은 열병에 걸려 길 한복판에서 심한 구토를 일으키고, 그 앞을 지나던 여인 한나는 그를 도와준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마이클은 알 수 없이 냉담한 여인 한나를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그녀는 어느 날부턴가 사랑을 나누기에 앞서 책을 읽어줄 것을 부탁하고, 소년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어준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어떤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다. 소년은 당혹감과 좌절, 방향없는 분노에 사로잡힌다. 시간은 흘러가고 그는 점차 극복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수업을 위해 참관한 2차 세계대전 전범 재판장에서 한나를 다시금 발견한다. 그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크라카우 근교의 작은 수용소에서 2년 동안 여성 경비원으로 일했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때부터 마이클의 고뇌는 커진다.

영화 <더 리더>는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의 줄거리에 충실하되, 몇몇 부분에서 미세한 변화를 보인다. 우선 각본가 데이비드 헤어는 마이클의 소설 속 일인칭 내레이션 진행을 영화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주인공은 여전히 마이클일 수밖에 없으며, 한나라는 캐릭터가 별다르게 극의 중심이 될 순 없었다. 베른하트르 슐링크가 독일의 원죄를 표현하기 위해 구현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한나는 수수께끼의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게다가 영화 속 한나는 원작에서보다 더더욱 대사를 적게 부여받았다. 원작에서 그녀는 마이클의 시선을 통해 그려졌지만, 영화에선 그에 더해 카메라라는 프레임까지 이중의 시선에 포박된 존재다(그리고 그 제약 속에서 한나라는 캐릭터에게 현실성을 부여해야만 했던 케이트 윈슬럿의 놀라운 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치기 어린 청춘인 마이클의 좁은 시야 안에서, 그리고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에서 이미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지난 현재 시공간의 관객에게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아야 했다. 원작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감추기 위해서 늘 싸워왔고 또 싸웠다. 그것은 실제로는 힘찬 후퇴일 수밖에 없는 전진과 실제로는 은폐된 패배일 수밖에 없는 승리로 이루어진 삶이었다.”

한나의 선택.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 구체적으로 말해지지 않았고 쓰여지지 않았으며 이미지화되지 않았지만 우리 대부분이 막연하게나마 공유하는 어떤 특정한 지식간의 전투를 형상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슐링크가 원작에서 그것을 기나긴 내적 독백으로 처리한 건, 소설(과 언어)이 가질 만한 특권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나는 한나의 범죄를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또 그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고 싶었다. 너무나 두려웠다. 그녀의 범죄를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범죄에 대해 당연히 내려야 할 합당한 유죄 판결을 결코 내리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범죄에 합당한 유죄 판결을 내리려고 하면, 그녀의 범죄를 이해할 수 있는 한뼘의 공간도 남지 않았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

전후 2세대와 3세대의 화해

스티븐 달드리와 데이비드 헤어는 소설에서 한나를 통해 구현되었던 테마 자체를 영화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다른 장치들을 시도했다. 그들은 십대의 마이클과 중년의 마이클을 번갈아 등장시키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나간다. 또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마이클의 딸을 주요 인물로 설정한다. 한나와 마이클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전쟁에 관여했던 자(1세대)와 그 희미한 영향권 아래 놓인 자(2세대)를 구현한다면, 마이클과 딸의 관계는 이제 전쟁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고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3세대와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를 의식적으로 상기시키는 장치다.

영화에서 딸은 마이클에게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마다 그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전 죄책감을 느꼈어요”라고 고백한다. 그 죄책감의 무게는 그녀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마이클과 딸은, 전후 2세대와 3세대는 그렇게 연결된다. 달드리와 헤어는, 50년 동안 숨겨온 비밀을 ‘집필’이라는 행위로 털어놓는다고 마무리짓는 원작의 결론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구현할까 고심했다. “마이클은 딸에게 한나와의 사연을 들려줌으로써 고해성사를 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해방시킨다.”(달드리) “원작은 대화의 강력한 수단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도 ‘대화’를 사용했다.”(헤어) 이 선택이 과연 효과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마이클이라는 독일 전후 세대(2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의 곤혹스러움은, 한나라는 1세대보다 3세대와의 화해를 향해 나아가는 쪽으로 좀더 비중이 커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61년,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나치 친위대 중령으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을 담당했다) 재판이 예루살렘에서 열렸다. 여기 참석한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에 관련한 보고서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했고 즉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그녀가 책 말미에 딱 한번 언급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오해는 불필요한 것이다. 그녀는 “우리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이 평범하다거나 혹은 우리 모두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녀는 아이히만을 두고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한마디로 ‘상상력의 결여’이자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순전한 무사유’라고 표현한다.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기계적인 ‘행위’가 불러올 수 있는 위험

아이히만을 둘러싼 이 격론은, <더 리더>의 한나 슈미트를 둘러싼 논란과도 그대로 겹쳐진다. <타임> 은 이렇게 말한다. “한나의 문맹이, 2차 세계대전 도중 그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던 대량 학살에 대한 독일인의 자발적인 무지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비교문학박사 학위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 한나 슈미트가 문맹이라는 사실, ‘인류 문명의 집결소’인 ‘책’에 그녀가 눈멀어 있었고 그처럼 무지한 상태의 노동계급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이 과연 그녀를 무죄 처리할 수 있는 요인일까.

한나는 자신의 몸이 아는, 그리고 편협한 영혼의 세계에서 인지할 수 있는 세계만을 믿고 그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 소설에서 한나는 재판 도중, 왜 지멘스 회사를 그만두고 친위대에 들어갔냐는 재판장의 힐난 어린 질문 앞에 멍해진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내가… 지멘스에 취직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인가?” 이 장면이 주는 통렬함은 대단하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질문을, 그녀 자신이 필사적으로 선택한 삶의 행로의 중요성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녀가 아는 언어는 규칙과 명령체계에 종속된 언어였다. 들을 줄은 알지만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의 ‘의지와 사유와 행위’를 비좁게 규정지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도 궁금하게 생각하게 된다. 아이히만이 그랬듯 ‘나는 톱니바퀴의 하나의 이에 불과했다’는 주장,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를 받았을 때 그것이 수백만명을 가스실로 보내는 명령이라 하더라도 정의의 여부에 상관없이 수행된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한나 아렌트는 “그것이 범죄인 한 그 기계의 모든 톱니바퀴의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상관없이 법정에서는 즉시 범죄의 수행자, 즉 인간으로 변형된다”라며, 단호하게 아이히만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한나의 내면을 엿본 우리 역시 이 모든 것에 눈감고서라도 그녀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이 전적으로 옳은 걸까.

오랜 세월이 지나 마이클과 한나가 다시 한번 마주했을 때,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왜 나에게 답장을 쓰지 않았냐”라고 묻는다. 마이클은 이에 답하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느냐”라고 질문한다. 한나의 표정은 미묘하게 실망하는 것처럼 바뀐다. “내가 뭘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뭘 느끼는지도 중요하지 않아. 죽은 자들은 여전히 죽어 있을 뿐이야.” 한나의 복잡미묘한 상황이 이 대사 한마디 때문에 추락할 수 있음에도, 달드리와 헤어는 그녀의 대사를 여기서 멈춰버린다. 그녀는 타인의 세계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그녀는 타인과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서 평등을 추구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의 기회가 차단되었던 인물이다. 이것은 곧 ‘말’(언어라고 포괄적으로 부르는 게 허용된다면)이 사라진 세계에서의 기계적인 ‘행위’가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인 것이다.

이것은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그러니까 영화 <더 리더>는 다른 무엇보다, 한나 슈미트의 문맹에 집중함으로써 그녀와 역사의 관계를 좀더 손쉽게 처리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게 되었다. 대신 그 선택을 통해, <더 리더>가 단지 ‘포스트 홀로코스트 영화’에 머무르지 않게 되는 지점을 마련한 것도 사실이다. 로저 에버트는 <더 리더>의 평에서 “이는 모든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최근 월스트리트 붕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은 똑같은 변명을 되풀이했다. ‘난 그저 내 일을 했을 뿐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부시 대통령은 우리를 잘못된 전제의 전쟁으로 이끌었고, 이제 와서야 불완전한 지식에 의해 잘못 판단했다고 변명했다. 미국 군인은 자신들이 명령받았기 때문에 고문을 했다고 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스티븐 달드리 역시 여러 인터뷰에서 콩고와 르완다의 민간인 학살사건, 혹은 다르푸르 사태 등을 언급하면서 이 모든 것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속됨을 상기시키곤 했다. 이 또한 ‘홀로코스트를 편리하게 일반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더 리더>의 원작과 영화 버전 모두가 이에 대해 용감하게 질문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수긍해야 한다.

여기서 (특히 한나로부터) 위험스럽게 비죽 솟아나는 아름다움, 일종의 괴물 같은 아름다움은 어찌 보면 케이트 윈슬럿의 연기에 전적으로 빚지는 부분이다. 영화가 한나와 역사의 관계를 축소시킨 대신, 그녀는 쉽게 잊을 수 없는 특이성을 지닌 개인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리고 마이클이 이같은 한나에게 실망하고 거리를 두는 것은, 그가 전쟁 1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화 <더 리더>는 한나와 마이클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온전히 마이클 내면에 각인된 기억의 흔적이자 독백으로서의 러브스토리가 되었고, 인류 발생 이후로 지속되어온 고통의 역사에 대해 ‘구경꾼’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격론장이 되었다. 당신이 바라 마지않는 ‘걸작’이라고 말할 순 없을지 몰라도, 이 영화를 본 다음 맘 편하게 눈감고 잠들어버리기는 불가능하다.

앤서니 밍겔라에게 추모를

<책 읽어주는 남자>의 영화화 판권은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감독 앤서니 밍겔라에게 있었다. 1999년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고 ‘믿을 수 없이 복잡한 도덕적 미로’에 매혹된 달드리는 밍겔라에게 판권을 넘겨달라고 졸랐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각본가 데이비드 헤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자마자 밍겔라에게 전화했지만 그는 내게 작품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했다. ‘안돼, 안돼. 내가 쓸 거야.’ 난 말했다. ‘그럼 당신이 제작을 하고 내가 쓰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영광은 다 당신한테 가고 일은 전부 내가 하는 게 되지.’ ‘아냐, 아냐, 나 정말 이 작품을 쓸 거야.’ ‘장담하는데 당신은 큰 영화들 때문에 이 작품을 만들지 못해. 하지만 난 작은 영화를 선호한다고.’ ‘아냐, 아냐, 정말 내가 하겠다니까.’

그리고 8년이 지나 앤서니는 스티븐과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데이비드 말이 옳았어. 난 절대로 이 작품을 쓸 시간을 내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써. 하지만 대신 1년 내에 완성해. 베른하르트 슐링크한테 영화가 곧 만들어질 거라고 약속했거든.’” 앤서니 밍겔라는 시드니 폴락과 함께 <더 리더>의 제작자로 크레딧을 올렸고, 두 사람 모두 영화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같이 읽으면 좋을 책

아이라 레빈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두 가지 전혀 다른 방향의 응답이라면, <책 읽어주는 남자>와 함께 뜻밖이지만 스릴러의 걸작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이히만보다는 밍겔라를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한)일 것이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작가 프리모 레비가 쓴 이 책은, 발간 당시인 1947년에는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유대인조차 홀로코스트의 기억에 대해 발화하고 증거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종의 ‘살아남은 자의 수치심’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심지어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한나 슈미트의 말년 독서 목록에도 이 책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원작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내가 법에 대해 정말 좋아했던 건, 법이 역사나 철학처럼 끝없는 담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법에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사건들은 판결받는다.”

법대 교수이자 판사, 베스트셀러 작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이력은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는 자신의 고등학생 시절 고마웠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어렵게 털어놓은 바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스탕달, 디킨스, 발자크를 영어로 읽게 했던 그 멋있는 선생님은, 실제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게슈타포와 관계있는 사람이었음이 밝혀졌다.

1944년생인 슐링크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통스런 깨달음을 매우 자주 겪었을 것이다. 슐링크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그들의 경험에 대해 방어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는 우리 세대의 독일인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나이든 독일인에게 전쟁에서 그들이 무얼 했는지 물어보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또한 우리 자신도 동시대인과 함께 터놓고 대화하는 것 역시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슐링크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개 형사거나 그들 삶의 숨겨진 단서를 찾아가는 남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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