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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위험한 사랑, 욕망의 클라이맥스
주성철 2009-05-07

상반기 최고 기대작 박찬욱의 <박쥐> 첫 공개

두말 할 것 없이 올해 상반기 가장 뜨거운 영화,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드디어 그 베일을 벗었다. <복수는 나의 것>(2002) 이후 송강호와 사실상 7년 만의 만남이면서 그 스스로 엄격한 가톨릭 환경에서 성장한 기억이 짙게 반영된 작품이다. 종교적 바탕 위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문제적’ 장면들도 많고, 지금껏 단 한번도 멜로영화에 출연한 적 없다 할 만한 송강호로서는 꽤 수위 높은 장면 속으로 녹아들었다. 더불어 추락과 구원, 욕망과 딜레마에 빠져든 인물들은 지금껏 그의 영화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면서도 가장 직설적이다. 파격과 귀여움이 한데 살아 있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부조리한 유머도 여전하다. <박쥐>에 대한 첫 번째 감상과 더불어 그의 오랜 단짝인 정정훈 촬영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조영욱 음악감독을 만났다.

친절한 상현씨는 뱀파이어지만 괜찮아. <박쥐>는 박찬욱 감독이 이미 10년 전에 예고한 작품이자, 이미 워밍업까지 끝낸 영화다. 바로 미이케 다카시, 프루트 챈 감독과 함께한 옴니버스영화 <쓰리, 몬스터>(2004) 중 <컷>을 연출하면서, 영화 속 영화감독(이병헌)이 만드는 뱀파이어 영화에 염정아를 뱀파이어로 출연시킨 것. <박쥐>와는 사뭇 다른 거대하고 넓은 바로크적인 공간에서 한 남자의 피를 마시던 염정아는 전화를 받고는 “그냥 저녁 먹던 중이었어. 자긴 먹었어? 자기 먹으라고 조금 남겼어”라고 말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아들의 목에 쇠꼬챙이가 꽂히자 출혈 과다를 우려해 장기밀매단 엄마가 “경동맥이야, 빼지마”라고 외쳤던 바로 그 부위다. 그러고는 배가 부른지 속이 좀 안 좋다며 트림까지 한다. 게다가 ‘유통기한이 지났는지 속이 메슥거린다’고도 하고 ‘양수기로 피 뽑는다’는 표현도 있었다. 실제로 <컷>에 참여한 스탭들은 음악만 ‘복숭아’가 맡아서 <박쥐>의 조영욱 음악감독과 다를 뿐 정정훈 촬영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박현원 조명감독에다 편집의 김상범과 김재범, 의상의 조상경에 이르기까지 그 스탭들도 똑같다. 그리고 뱀파이어의 습성과 일상을 다소 희화화하는 정서도 얼핏 <박쥐>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박쥐>는 예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겁기만 한 영화가 아니다.

가장 오래도록 숙성된 꿈의 프로젝트

<박쥐>는 이미 박찬욱 감독이 전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를 제작하면서 예고했던 작품이다. 그가 지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대해 ‘5년 걸린 복수 3부작’과 오래전부터 별러온 ‘<박쥐> 사이에 놓인 작은 섬’이라고 표현했으니까. 아마도 그가 확실하게 차기작(<박쥐>)을 정해둔 상태에서 현재의 영화(<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만들었던 경우는 그때가 처음일 것이다. <올드보이>도 <친절한 금자씨>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도 이처럼 구체적인 ‘마음가짐’에서 탄생한 작품은 아니었다. 더불어 <박쥐>는 박찬욱 감독에게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인혁당 사건의 영화화와 더불어 가장 오래도록 숙성된 꿈의 프로젝트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그가 그렇게 만들고 싶어 했던 두 작품이 각각 현실과 공적인 역사(인혁당 사건), 환상과 사적인 기억(<박쥐>)이라는 서로 완전히 다른 극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박찬욱 감독이 언제나 딜레마에 처한 인물들을 관심있게 그려왔던 것처럼 그 역시 묘한 딜레마에 처한 감독이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어쨌건 그의 지금 선택은 <박쥐>다. 그 스스로 얘기하듯 “나의 종교적 성장환경이나 개인사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을 정리하려는 의도로 기획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이전 영화에 종교인들이 등장한 적은 있다. <3인조>(1997)에는 수녀가 되려 했지만 현재는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려 하는 마리아(정선경)라는 여자가 등장했고,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이영애)는 ‘살아 있는 천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저 여&#44612;어요. (천사님) 나와 주세요”라고 외치던, 적어도 교도소 내에서는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즐거운 엉뚱함의 영감 “당근이죠”

이처럼 그런 기획 의도는 누가 봐도 충분히 무거운 것이다. 지금껏 한번도 그런 얘기를 한 적 없던 영화감독이 ‘자기 반영적’이라는 암시를 넌지시 비치는 것 말이다. 실제로 그는 신학교에 갈 뻔했을 정도로 엄격한 가톨릭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 속 상현(송강호)의 첫 대사는 누군가의 얘기에 응하는 “당근이죠”라는 대답이다.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머나먼 아프리카로 고행의 길을 떠나, 500여명의 바이러스 실험 지원자들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와서(엄밀하게 말하면 죽었다가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난) ‘몸소 병을 얻고 기적을 일으킨 붕대 감은 성자’로 추앙받는 투철하고 고지식한 신부 치고는 무척 ‘깨는’ 대사다. 그의 영화들 중 가장 시적인 오프닝이라 불러도 좋을, 마치 잉마르 베리만의 고전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벽에 비친 나무 그림자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가 느닷없이 그 대사의 정서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 대사가 기존 송강호식 유머와 발성법으로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박쥐> 역시 이탈리아 비평가 마르코 그로솔리가 그에 대해 묘사한 ‘즐거운 엉뚱함의 영감’ 아래 자리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박쥐>에서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구원과 속죄, 또 치정극이라는 거대한 컨셉 속에 놓여 있지만 <박쥐>는 그렇게 관객을 (마치 ‘모호필름’이라는 제작사의 이름을 환기시키기라도 하듯) 모호한 상태로 시작하게 만든다. 제목이나 설정에서부터 종교영화나 호러영화로 생각될 만큼 무섭고 엄숙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상현과 태주(김옥빈)의 위험한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무척 밀도 높은 멜로드라마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그런 가운데 박찬욱 감독 특유의 부조리한 유머 역시 제자리를 찾고 있다.

모처럼 그의 영화에서 한국어 노래 가사를 듣는 기분도 묘하다. <3인조>의 들국화나 <공동경비구역 JSA>의 김광석에 이어 <박쥐>에서 들려오는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나 이난영의 <선창에 울러왔다>는 묘한 감정적 울림을 만든다. 더불어 <박쥐>는 배우들의 존재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영화다. <컷>에서 한 배우(이대연)가 영화감독(이병헌)에게 어떤 영화에 출연해야 할지 묻는다. 그가 ‘한국의 존 워터스’라 생각하는 장필호 감독과 함께하라고 권유하지만, 배우는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채 김창 감독은 어떻냐고 묻는다. 장필호의 <핑크 팬티>는 좀 사악한 영화 아니냐는 말도 덧붙이면서. 이에 대해 감독은 말한다. “김창 감독 영화는 감독만 살지 배우는 하나도 안 보여요. 그리고 너무 착한 영화만 하면 바보 됩니다.” 말하자면 <박쥐>는 배우도 살고 적당히 착하지 않은 ‘센’ 감정과 표현들로 치장한 영화다. 언제나 ‘스타일’ 자체가 늘 그의 화려한 관심사이자, 사람들에 따라서는 오직 그것에만 열중하는 평자들도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그 어떤 것도 이 영화가 지닌 전복적인 묘사들 그 자체를 넘어서진 못할 것이다.

소설 <테레즈 라캥>에 아주 느슨하게 기초한…

박찬욱 감독은 함께 시나리오를 쓴 정서경, 최인 작가와 함께 개봉 전 <박쥐>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그것이 완성된 영화와 가장 가깝다고 보면 그보다 앞서 그는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원작’이라고 밝혀둔 적 있다. 물론 그것은 완전한 원작의 의미가 아니라 영감을 받은 정도다. 소설 <박쥐>의 작가후기에 따르면 ‘<박쥐>는 <테레즈 라캥>에 아주 느슨하게 기초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적당한 한국식 단어가 없어 ‘원작’이라고 쓰긴 했지만 영어로는 ‘inspired by’로 표기했다. 그러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졸라가, 타락한 종교와 성직자에 대해 매서웠던 그가, 자기 소설이 ‘뱀파이어가 된 신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놀랄까?”라고도 덧붙였다.

<테레즈 라캥>과 <박쥐>의 기본적인 설정은 같다. <테레즈 라캥>의 우둔하고 과묵한 여자 테레즈는 파리의 음침한 골목길에서 늙은 어머니와 병약한 남편과 함께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산다. 그리고 남편 카미유의 옛 친구이자 화가의 꿈을 접고 평범한 직장에서 일하는 몸집이 크고 동물적인 남자 로랑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테레즈 라캥>에서 목요일 저녁마다 집에서 도미노 놀이가 펼쳐지는 것처럼 <박쥐>에서는 수요일에 마작 판이 벌어진다.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바로 소설의 로랑이라고 할 수 있는 <박쥐>의 상현이 뱀파이어가 된 신부라는 점이다. 웃자고 비교하자면 로랑은 <올드보이>(2003)에서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사는’ 오대수 같은 남자다. 그러니까 상현이 종교밖에 모르는(태주를 만나기 전까지 키스 한번 못해본) 고지식한 신부인 반면 로랑은 ‘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한 관계로 억지로 욕망을 참아온’ 바람둥이에 가깝다. 바로 신앙과 돈이라는 결정적 분기점이다. 게다가 로랑은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 여자는 내 정부가 될 수 있지’ 혹은 ‘카미유 같은 남편에게는 만족할 수 없는 게 분명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처음에는 ‘테레즈는 정말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사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테레즈를 건드려도 돈 들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서, 친구의 아내를 빼앗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부추긴 결과다.

그렇게 로랑과 상현은 결정적으로 상반된 인물이긴 하지만 급속도로 서로를 탐닉하는 과정과 위험천만한 만남,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비슷하다. 어쩌면 ‘뒤늦은’ 서문이자 에밀 졸라가 <테레즈 라캥>에 대한 비평에 대해 ‘오해될지도 모를 미래를 피하기 위해’ 직접 쓴 소개글을 인용하는 것도 <박쥐>와 너무나 잘 들어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두 주인공에 대한 깊은 애정이자 변호라고나 할까.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에 대한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에밀 졸라나 박찬욱 감독은 같은 크기의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들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강한 남자 한명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욕구 불만 상태의 여자 한명을 설정했다. 그들 속에서 어리석음을 찾는다. 그런 다음 그들을 난폭한 드라마 속으로 내던지고 그 두 존재들의 느낌과 행동들을 면밀히 기록한다.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하여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행한 것뿐이다. 내가 보기에 테레즈와 로랑의 잔인한 사랑 속에 부도덕한 점이나 잘못된 열정으로 내몰릴 만한 소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이 얘기는 <박쥐>의 상현과 태주에게도 그대로 겹친다. 심지어 상현이 겪는 도덕적 딜레마와 고통은 로랑보다 더하다. 태주와의 치명적인 사랑에 눈뜨면서 신부라는 고결한 지위마저 그저 일상적인 직업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신부지만 사랑해도 괜찮아

<박쥐>는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가장 깊이 욕망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자신을 따라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하는, 그러니까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나면 바다를 볼 수 있을 것이라 믿는 눈먼 노신부(박인환)와의 관계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욕망의 핵심은 치명적인 사랑이다. 그런 측면에서 송강호로서도 ‘첫 번째 멜로영화’지만 그건 박찬욱 감독도 사실상 비슷하다. <달은… 해가 꾸는 꿈>(1992)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정도를 ‘가볍게’ 제외하고는 그가 이처럼 밀도 높은 사랑의 감정에 집착했던 경우가 있었던가. 가령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영화 속 ‘싸이보그의 칠거지악(七去之惡)’, 그러니까 싸이보그로서 가져서는 안될 7가지 감정을 묘사한 적 있다. 동정심 금지, 슬픔에 잠기는 것 금지, 죄책감 금지, 망설임 금지, 쓸데없는 공상 금지, 설렘 금지, 감사하는 마음 금지 등 7가지가 그것인데 영화 속 일러스트를 통해 소개된 그 욕망들은 <박쥐>에서 일거에 분출된다. 그것의 목적은 상현이 태주라는 ‘가여운’ 사람을 지옥에서 꺼내주는 것이다. 비록 태주가 신앙이 없어 성당을 찾는 사람은 아니지만 상현으로서는 그것이 그에 대한 구원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발을 마주 비벼서 정전기로 영군(임수정)의 몸을 공중 부양시켜주고, 요들송을 불러 즐겁게 해주며, 밥을 안 먹는 영군의 팔을 잡아끌어 ‘싸이보그지만 먹어도 괜찮아’라며 밥을 먹여주는 구원의 행위와 유사하다. 그래서 <박쥐>는 ‘신부지만 사랑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작품임과 동시에 태주에 대한 구원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테레즈 라캥>에서 테레즈가 로랑에게 첫눈에 빠져들었던 것과 달리 <박쥐>에서 상현과 태주의 스킨십은 불현듯 찾아온다. 숨 막히는 집 안 공기가 싫어 밤거리를 몽유병 환자처럼 내달리던 맨발의 태주 앞에, 오직 밤에만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는 상현이 문득 마주치게 된 것.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와 딸이 서서히 친해져가면서 금자가 팔을 펼쳐 조그만 딸아이가 그 팔 아래로 쏙 들어가던 사랑스러운 장면처럼 상현은 아무 말 없이 태주를 번쩍 들어올려 자신의 구두를 신겨준다. 그때부터 태주의 몸은 상현에게 그 어떤 종교적 공간보다 가장 안락한 성소가 된다. 노총각이자 숫총각인 상현이 지금껏 경험했던 그 어떤 것들보다 따뜻했다. 뱀파이어로서 태양빛을 보지 못하고 사는 참담한 나날들에 대한 보상과도 같다. 사제로서의 절제와 도덕도 욕망 앞에 무릎 꿇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태주의 남편인 강우(신하균)라는 필연적인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테레즈 라캥>에서 태양이 빛나는 아름다운 센강에서 그 장애물을 살해했던 것처럼 상현과 태주도 그렇게 한적한 밤 낚시터로 강우를 유인한다. 혹시 태주를 팜므파탈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3인조>에서 색소폰 연주자 안(이경영)의 바람 난 아내(김부선)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태주로서도 어릴 때부터 자신을 가둬온 권태로운 이 비극의 지옥에서부터 탈출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그런 극단적인 선택으로 빠져든다. 그 비극이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서로가 서로를 더욱 탐닉하게 되지만. 하지만 완벽한 살인이 남긴 것은 공포와 불면의 밤뿐. 이제 상현은 마치 “제가 그렇게 사악한 행위를 하는 동안 천사는 어디 있었을까요. 내 안의 천사는 오직 내가 부를 때만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을 알아요. 어디 계신가요. 나와 주세요”라고 신앙 간증을 하는 금자씨의 기분이 된다. <테레즈 라캥>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사람은 서로의 공포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욕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증오만이 끓어오른다. 그렇게 상현과 태주는 지옥과 천국의 입구가 결국 같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뜨거웠던 사랑에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달려간다.

“흡혈귀란 거 생각보다 귀엽네요”

<박쥐>는 후반부 들어 반전의 요소가 있긴 하지만 치정 멜로라는 큰 흐름 안에서 큰 국면 전환을 불러오는 정도는 아니다. 또 기본적으로 <박쥐>는 위험한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인간 내면의 어둡고 깊은 진실과 만나는 것이지만 그 속에는 예상치 못한 유머의 코드들도 있다. 질투심에 불타는 괴력의 뱀파이어 상현이 철제 전봇대를 주먹으로 쳐서 우그러트리거나, 밤에만 활동하기에 누군가의 약속 제의에 “낮에는 좀…”이라고 머뭇거리는 표정, 그리고 먹기 편하게 피를 냉장고에 저장해두는 모습까지, 태주가 상현을 향해 “흡혈귀란 거 생각보다 귀엽네요”라는 말하는 순간의 정서가 영화 전편에 깔려 있다. 다시 마르코 그로솔리가 그의 영화에 대해 “그의 시각적 구조는 아주 유쾌하고 매력적이며 억제할 수 없이 즐거운 엉뚱함 덕에, 그 유쾌함과 엉뚱함은 고통에서까지도 언제나 거의 같은 페이스로 유지되는 듯 보인다”고 썼던 인상이라고나 할까. 그처럼 <박쥐>는 지금까지 박찬욱 감독이 축적한 그 모든 것들의 추출이면서, 전혀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다. 뱀파이어가 되어 예상 밖의 힘을 얻은 주인공처럼 가장 높이 뛰어오르고, 가장 멀리 달아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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