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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일] 출연료 받을 때 연기 맛 느끼지

<국가대표> 배우 성동일

지난해 여름, 성동일은 <국가대표>의 방 코치 역할을 제안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 무렵 캐스팅 제의를 받은 드라마만 3편이었다. “그냥 드라마 찍고 돈을 벌어?” 아니면 “끌리는 대로 영화를 찍어?” 힘든 시절부터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은 아내의 속깊은 내조가 아니었다면 ‘생활형 연기자’ 성동일이 추리닝 입은 방 코치를 택하진 못했을 것이다. “지난해 7월부터 올해 4월까지 찍었는데, 최근 몇년 동안 처음으로 생활비 걱정을 해봤다. (웃음)” 흔히 스포츠영화 속 조련사들은 화려한 이력을 가졌거나, 못다 이룬 꿈을 품고 있지만 방 코치는 예외다. 졸속으로 스키점프팀을 만들려는 지자체에 고용된 별볼일 없는 어린이 스키교실 강사. 스키점프를 스카이 점프라고 알고 있으며, 젊은 선수들을 꼬드길 때 내놓는 카드 또한 ‘군 면제’가 전부다. ‘거울 보고 시나리오 쓰는’ 김용화 감독은 방 코치 역할에 <미녀는 괴로워> 때도 함께했던 성동일을 일찌감치 염두에 뒀다. 시나리오가 막힐 때는 어김없이 성동일에게 전화를 걸어 실제 그의 말투를 참조해 인물을 만들기도 했다 한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국가대표>의 성동일은 그러나 흔한 ‘감초’ 연기와는 뭔가 다른 것을 보여준다. 두 시간 넘게 캐묻고 보니 조금 다른 무엇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차기작이 10월부터 방영 예정인 드라마 <추노>라고 들었다. =오늘 오전에 가발 맞추고 의상 피팅했다. 방송사에서 곧바로 오느라 옷차림이 좀 그렇다.

-이번에도 코믹한 역할인가. =아니, 진짜 악역이다. 조선시대 노예사냥꾼 이야기인데, 악역이어서 출연하기로 했다.

-악역은 처음 아닌가. =<삼김시대>(1998)의 고문전담반 역할 정도. 쫑파티할 때 고문상을 받을 정도로 악역이었다. 그 뒤로는 연출자가 악역을 맡겨도 악역이 아닌 것처럼 두루뭉술하게 호감형으로 만들었다.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내가 먼저 악한 놈으로 만들어 달라 했다.

-먹고살아야 했다는 의미가 뭔가. 혹시 광고? =내가 CF 제의를 많이 받는 사람도 아니고. 무명을 벗으려면 튀어야겠다, 악역으로는 튈 수 없고, 그러려면 재미있는 캐릭터로 가보자, 과거엔 그런 생각이 컸다. 이제는 남이 알아봐준다고 좋아할 나이도 지났고. 내가 재밌는 것을 찾아서 할 때가 됐다. 남을 괴롭히는 악역만큼 또 재밌는 게 어딨나. <국가대표>의 방 코치도 그냥 웃기는 것 이상을 좀 해보고 싶어서 출연한 것이고.

-코치 역할이라 따로 몸 만드는 데 애쓰진 않았겠다. =스키를 배우진 않았지만, 젊은 배우들하고 같이 뛰고 달리기는 많이 했다. 코치 폼은 만들어야 하니까. 무주에서 촬영할 때 스키점프대까지 가려면 차에서 내려서 30분 이상 걸어야 한다. 팬티만 입고 촬영장까지 달리기도 하고, 축구 시합해서 술 내기도 하고. 올림픽 장면 전후로는 살을 좀 빼야 했는데 술 마시고 오바이트 열심히 해서 빼고 그랬다.

-알코올 다이어트를 주로 하나? =갑작스럽게 해야 할 때는 그것만큼 좋은 게 없다.

-얼마나 술을 마셔야 효과를 보나. =얼마를 알 정도로 먹으면 다이어트가 안되지.

-부작용은 없나. =(속 아파도) 이겨내야지, 뭐. 신기한 게 난 해장음식이 매번 달라진다. 어떨 때는 식혜가 좋고, 칡즙이 맞을 때도 있고. 자장면을 먹기도 하고, 그러다 맞지 않으면 콩국물로 가보기도 하고.

-<국가대표> 촬영 때는 해장음식이 주로 뭐였나. =김치찌개였다. 밤장면이 별로 없었다. 무주 같은 곳은 해 지면 딱히 할 게 없다. 해 지면 ‘멍’한다. 뭘 해야 하나, 그러다 맘에 맞는 사람들한테 전화해서 한잔 먹자 하는 거지. 매일 마셨다. 상대를 매번 바꿔가면서. 다행히 공기가 좋아서. 아침 6시에 깨서 창문을 요만큼 열어놓으면 술이 급격하게 깨는 게 느껴진다.

-스무살 넘게 차이나는 배우들과 가까워지는데도 술이 필요했겠다. =맨정신에는 토킹할 수가 없지. 할 말이 없다고 해서 연기를 가르칠 것도 아니고. 일단 형처럼 편하게 보여야 하니까, 소폭을 좀 많이 먹였다. 나중 되니까 후배들도 소폭 잘 만들더라. 야, 공구리 쳐라, 그러면 알아서들. 서먹서먹한 걸 푸는 데 (하)정우가 중간 다리 역할을 많이 해줬다.

-그런데 아까 촬영장 갈 때 팬티 입고 뛰었다고 했는데 다른 배우들도 속옷 차림이었나. =너무 시원할 것 같아서 한번 해보고 싶었지. 일반인은 출입금지 구역이라 별로 거리낄 게 없기도 했고. 그런데 애들은 절대로 안 하더만. 팬티만 입고 뛰면 술도 빨리 깨는데.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해외 로케이션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까지 동남아시아밖에 못 가봤다. 그래서 이번엔 잘하면 유럽을 가는구나 했지. 그런데 제작사에서 단호하게 ‘유럽은 카메라만 갑니다’ 그러더라. (웃음)

-방 코치 역할도 실제 모델이 있다. 그분과 사전에 많이 이야기를 나눴나. =실제 만나보진 못했다. 직접 만든 30m짜리 점프대에서 뛰어내리다가 다리 다쳤다는 에피소드만 들었지. 대신 촬영 때 현재 코치, 선수들과 친하게 지냈다. 연습하는 걸 자주 봤는데 정말 안쓰럽더라. 잔디밭 훈련장에서조차 제대로 연습을 못한다. 관리하는 곳에서 1년 내내 단체손님을 받는 바람에 잔디밭은 여름이고 가을이고 술판이다. 선수들은 한쪽에서 다리 힘 기른다고 숏 축구만 죽어라 하는 거지. 가슴엔 태극기 뛰고 나는데 정작 태극기의 주인들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해외 경기 나가면 가수 비만큼이나 사인을 해줄 정도로 인기를 얻은 그들이지만, 정작 주머니에는 십원도 없다. 이동할 때도 봉고차 타고, 돈 아껴서 햄버거 먹고. 선수들 중에 조금 넉넉한 사람이 있다 해도 한팀이다 보니 같이 굶을 수밖에 없다. (돈이) 있어도 못 쓰고, 없어서 못 쓰고.

-<국가대표>의 방 코치는 너스레를 떨다가 갑자기 정색하고, 그러다 또 한방 먹는 그런 역할이다. 스키(ski)를 스카이(sky)라고 쓰는 공사장 장면이 대표적인데. 일반적인 코미디 연기와는 호흡이 좀 다르다고 느꼈다. =처음부터 김용화 감독한테 그랬다. 아무것도 준비 하지 않고 가겠다고. 대본도 안 보고 갈 테니, 대신 리허설만 좀 많이 시켜달라, 그리고 실제로 나를 좀 가르쳐 보라, 고 했다. 정말 현장 갈 때 오늘 뭘 찍는지조차 모르고 갔다. 만들어 가면 안 고쳐진다. 사실 그동안 뭘 하려고 애쓰다 보니 버리는 법을 잘 몰랐다. 애드리브도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갔다. 공사장 장면에서 하정우가 철자를 고쳐쓰자 ‘알았어~, 들어가, 알았어’ 하는 장면이나 ‘그거 나중에 먹고 이리 와~’라고 막내를 부르는 것이나. 보여주기 위한 애드리브는 삼갔다.

-<국가대표>에선 훅이나 스트레이트가 아니라 잽을 택한 셈이다. =그렇지. 일본 코미디영화들을 이전부터 챙겨봤는데 거기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든 <으랏차차 스모부> 같은 영화를 보면 단조로운 장면이 ‘슉’ 하고 지나가지만 한참 뒤에 아, 하고 웃을 때가 있지 않나. 한국의 경우, 너무 설명적이다. 강제로 설정을 집어넣을 때가 많다. 흔히 말하는 니주(덧마루)를 너무 많이 까는 거지. 일본영화는 잊어먹을 만하면 툭툭 치는데, 그게 재밌더라. 일부러 쑤셔넣는 것보다. 그래서 방 코치의 대사도 일부러 빨리 쳤다. ‘0.5초만 빨리 가자’가 원칙이었다. 누구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후루룩’ 하거나 ‘투투툭’ 하는 거지. 그게 아니면 툭 치고 빠지고, 툭 치고 빠지고.

-이전에 <뉴하트>나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한 것 같다. =<뉴하트>는 원래 박철민씨랑 아옹다옹하는 캐릭터였다. 톰과 제리 같은. 그런데 나까지 지지고 볶고 까불면 안될 것 같았다. 촬영 들어가서 심지어 연출자가 ‘선배님, 왜 재밌게 안 하세요’ 하더라. 내 생각은 철민씨 혼자서도 극을 잘 살리고 있는데 나까지 맞불을 놓으면 코미디가 아니라 볼썽사납게 될 것 같았다. 내가 빠져야지 싶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 받았던 캐릭터와는 다른 인물이 나왔다.

-자신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 상대 배우의 연기 패턴이 영향을 미치나. =<국가대표>에서도 상대에 따라서 일부러 좀 다르게 했다. 나도 한때 애드리브 좀 치고, 잘 놀았던 놈이다. 그런데 이젠 그걸 알겠더라. 절대로 싸워선 안된다는걸. 내가 남을 잘 이해해서는 아니고. 애 둘 낳고 기르다 보니 알게 됐다. 때론 욕심을 버리고 빠져야 연기도 살고, 극(劇)도 산다.

-지금까지 영화 출연작이 다섯편밖에 안된다. <7인의 새벽>(2001) 이전에 비공식 데뷔작이 있을 것 같다. =<7인의 새벽>이 데뷔작 맞다. 단성사에서 3일 개봉하고 간판을 내린 영화지. 그 뒤로 단성사는 공사 들어가고. (웃음) <미녀는 괴로워>도 원래 하지 않으려고 했다. 몇번 안 한다고 했는데, 프로듀서가 과거 연극하던 후배여서 김용화 감독을 만난 거다. 얼굴만 보자고 해서 일단 나갔는데, 무조건 같이 하자고 하더라. 사람 간을 안 보는 게 좋았다. 배우가 무슨 재래시장의 생선토막도 아니고. 과거에 영화쪽에 안 좋은 추억이 많다. ‘얼마 받아요?’‘그래요?’‘알았어요, 연락줄게요’. 길거리 캐스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존심 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홀딱 벗겨놓고 간만 보고, 양아치 취급하고. 오래전 이야기지만, 출연료 100만원을 내놓으면서 ‘당신이 언제 이런 감독하고 해보겠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1980년대 말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적도 있는데 나중에 제작사 사장님 부인이 너무 빈티 난다고, 교체하라고 해서 출연이 무산된 적도 있다.

-대학에서 기계설계를 전공했는데. =편한 인텔리를 꿈꿨는데, 두 학기 지나니까 안되겠더라. 우연히 대학로에 놀러갔다가 연극인들을 만났다. 밥 굶기 딱 좋은 연극이 뭣이 좋아서 저렇게 하는 것일까. 호기심에 술자리까지 끼게 됐고 그 이후 김태수, 김철리 형 아래에 있었다. 탤런트 시험 보기 직전까지는 76극단에서 (기)국서, 주봉이 형이랑 (오)광록이 형이랑 같이 연극했고.

-호기심만으로 배고픈 무대를 견디긴 쉽지 않았을 텐데. =무대에 서기 전까지 넋을 놓고 나를 봐줬던 사람이 없었다. 단지 그거 하나였다. 누군가 나를 아는 척해준다는 느낌. 그전에 외로웠다는 뜻은 아니고, 나를 좀 진지하게 대해줬다고 해야 정확할 거다.

-1991년 SBS 공채 1기로 탤런트가 됐는데. 무대를 떠난 이유가 뭔가. =배고파서. 돈 벌려고 응시했는데 한번에 됐다. 연극은 출연료라기보다 사례비에 가까웠다. 술값 부족하면 줬던 사례비마저 다시 걷어간다. (웃음)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해서 다행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연극할 때 집에 1천만원만 있으면 통닭집 했을 거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지금까지 온 거지. 공채 합격했을 때 얼마나 좋았으면 선산에 떼까치 울었다고 농담을 다 했을 정도다. 부평에서 포장마차하던 엄마에게 전화해서 고생 끝났다고 하고. 물론 한달에 28만원 받던 무명배우 딱지 떼고 그 약속 지키기까지는 무려 10년이 걸렸지만.

-여전히 <은실이>(1999)의 양정팔, 빨간 양말 성동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 썼던 사투리 때문에 고향을 전라도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많을 텐데. =인천에서 태어나서 지금도 살고 있다. <하나님 비상예요> <금관의 예수> 등을 무대에 올린 적 있는데, 검열을 피하려고 마당극식으로 풀어서 했다. 전라도 사투리는 그때 배운 거다. 맞으면서 배웠는데 나중에는 다른 극단 선배들로부터 품바해보라는 제의까지 받았다. 어차피 돈 못 받는 건 똑같은데 두 시간, 세 시간 미친 듯이 뛰어야 하는 게 싫어서 거절했지만. (웃음)

-애초에 양정팔은 단역이었는데. =권해효씨 똘마니 역이었는데 4회 분량이었다. 차비 없어서 집에 안 가고 탤런트실에서 자고 그랬는데. 조감독 형이 전화가 왔다. 용돈이나 벌라고 하더라. 대사도 처음엔 별로 없었다. ‘아따, 형님 그요?’‘아따, 근갑소’ 정도였다. 그런데 시청률이 좋아지면서 분량이 늘더라. 나중에 조감독이 고기나 먹고 가라고 해서 회식에 처음으로 간 적 있는데, 이금림 작가님이 부르셨다. 당신께선 전라북도 출신이고 내가 하는 대사는 남도 바닷가 사투리라면서, 알아서 고치라고 하더라. 그날 회식을 기점으로 단역에서 고정이 된 거지. 그 뒤로는 생오버를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빨간 양말과 함께 줄무늬 의상도 트레이드 마크가 됐는데. =그거 원래 <삼김시대>할 때 김영삼 역할 맡았던 길용우 선배가 입었던 의상이다. 의상실 형들이 좋은 옷이라고 안된다고 하는 걸 ‘한번만 줘 봐’ 해서 입었다.

-<은실이>로 떴지만 그 이후 출연작이 별로 없었다. 2000년과 2001년은 아예 한편도 없다. =세상 물정 보면서 살았어야 했는데. <은실이>로 사실 돈을 꽤 모았지만 아는 연기자 소개로 광주에 고깃집을 열었다가 모두 날렸다. 쇼무대에서 취객들에게 수박 껍질 맞으며 노래 부르고 벌었던 돈까지 모두 다 날리고 나니까 충격이 크더라. <야인시대>(2002) 출연할 때도 식당을 운영했는데, 출연료로 직원들 월급 주고 그랬으니 연기가 눈에 들어왔겠나. 그런데 아는 형님 한분이 내게 술 한잔 사겠다고 하더라. 일부러 달마다 직원들 회식을 우리 식당에서 갖곤 하는 분이었는데, 그분 말씀이 이 식당이 너한테는 ‘암’이라고 하더라. 암이 있으면 떼야 하냐, 안고 가야 하냐, 다시 시작하려면 정리하라고. 그 이야기 듣고 집에 와서 누웠는데 잠이 안 오더라. 그 다음날 친구한테 돈 빌려서 빚잔치했다. 성동일이 남의 돈을 떼어먹을 수는 없는 일이고. 물수건, 나무젓가락 값까지 다 갚아주고 올라왔다. 서울 와서 보니 통장에 28만원 있더라. 2억원 빚과 함께. 지금도 식당하는 분들 보면 대단하다고 속으로 생각하곤 한다.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다시 하기 전에 쇼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했는데. =놀고 있는데 쇼 프로그램 섭외가 많이 오더라. 처음에는 내가 왜 거기 나가서 주접을 떨어야 하나, 그래서 안 갔다. 그 일로 식구들끼리 싸우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얼마 뒤에 아내가 모 감자탕 집에서 설거지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자존심 꺾어야지, 어떡하나. <스타 골든벨> <불량아빠클럽> 등에 출연하면서 여기저기서 불러댔다. 쇼 프로 안 하던 놈이 한다고 하니까 막 들어오는 거지. 그렇게 2년쯤 보내니까 다시 드라마에서 찾더라.

-듣고 보니 돌아온 탕자 스토리다. 연기하길 잘했구나 싶었을 텐데. 연기의 맛을 느낄 때가 언제인가. =출연료 받을 때와 출연료 쓸 때. (웃음) 사실 내가 예술하는 배우는 아니잖나. 생활연기자인 셈이지.

-어떤 블로그를 보니까 베트남에선 <뉴하트>의 지성보다 더 인기가 있다던데. =그거 나도 봤다. (웃음) 내가 출연한 드라마들이 다 잘됐다. 망한 게 별로 없다. 필리핀에 사는 친구 만나러 갔다가 하루는 슬리퍼 신고 팬티 사러 갔는데 백화점 안이 난리가 났다. <파리의 연인>이었나, 필리핀에서 방영됐나 보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더운 동남아에선 나처럼 재밌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더라. 그때 깨달았다. 멋을 좀 내고 다녀야겠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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